69화
표연원이 겨우 비품창고 창문으로 몸을 끼워 넣고 안으로 들어섰다. 나올 때보다 들어갈 때 훨씬 힘겨 웠다.
다행히 그의 오랜 부재를 눈치챈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문 너머로 고요함이 흐르고 있었다.
슬그머니 문을 열고 저 안으로 스
며들기만 하면 이 일탈은 아무도 모를 텐데.
조금 망설이게 됐다.
'머릿속에 울렸던 목소리들이 단순 히 내 환청이 아니란 걸 알았으니 까. 저 안에서 여론을 주도하고 있 는 '박영찬 헌터'는…… 이미 잡아 먹히고 껍데기만 남은 거겠지.'
그렇다고 이들을 모두 버리고 혼 자만 내빼기엔 내키지 않았다. 하지 만 사실을 주장한다고 해도 이미 헌터라는 후광에 눈이 먼 다른 사 람들이 표연원의 말을 믿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 순간.
"아아아아악!"
문 너머로 비명소리가 들렸다.
"난 아냐! 진짜 아니라고! 미, 믿 어줘……. 난 결백해! 사람이라고!"
"뭐 해? 입에 옷이라도 물려. 저따 위 말에 현혹되지 마."
"진짜야! 난, 난 사람이야! 그러니 까 제발……읍, 으븝! 으으읍!"
퍼억, 쿵!
살벌한 소리가 났다. 두어 번의 타
격음 사이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 다.
표연원은 문고리를 쥔 채로 딱딱 하게 굳어있었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지?'
너무 충격적인 상황 탓에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질 않았다. 자신은 결 백하다고 소리 지르던 남자의 목소 리도 매우 낯익었다.
처음 게이트가 열린 직후에 신입 생들을 다독여주는 데 큰 역할을 했던 2학년 선배였다.
"으븝.....읍..."
목소리가 점점 잦아든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소름끼치는 감각이 발끝부터 타고 올라왔다.
"후……. 이것 참."
박영찬의 겉가죽을 뒤집어쓴 몬스 터가 말을 이었다
"여기. 쥐새끼도 하나 있네?"
끼이익-
비품 창고의 문이 열리고. 놈과 눈 이 마주쳤다.
표연원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로 그를 올려다봤다. 마치 먹음직 스러운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놈은 가볍게 입맛을 다시고는 태연하 게 웃는 낯을 했다.
"왜 여기서 나와요?"
"네? 아, 그게…… 제가 어제 여기 서 깜빡 잠들어서……
"변명이 궁색하시네."
" 그게.
"당신. 몬스터지."
" 네?"
갑작스러운 의심이었다.
"이 안에서 나올 이유가 뭐 있는 데요? 몬스터가 학생 하나 끌고 들 어가서 잡아먹고 혼자 나온 거 아니야? 이거 완전..
"잠깐만요! 그런 억측으로 사람을 몬스터로 몰아세우는 게 어디 있습 니까?"
표연원이 강하게 항변했으나 상황 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미 여론은 기울어져 있었고, 공포로 물들어 섣 불리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표연원과 눈이 마주치면 다들 황 급히 딴청 부리기에 바빴다.
"그러면요? 몬스터 잡을 다른 방 법이라도 있어요? 의심 가는 순서 대로 뭐라도 해봐야 우리도 사는 거 아닙니까. 이대로 몬스터한테 잡
아먹히길 기다리면서 가만히 있는 게 맞아요?"
"그렇게 남들을 몬스터라고 몰아 세우는 쪽이 더 의심스러운데요."
마피아 게임의 법칙 아닌가. 소리 높여 누군갈 몰아가는 주도자가 가 장 의심스러운 법이니까.
그러나 박영찬은 함정에 빠져 발 버둥치는 쥐새끼를 보듯 살짝 입꼬 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내가 몬스터면 차라리 다들 조용 히 구조나 기다리자고 했을 겁니다. 그 편이 몬스터가 누굴 잡아먹기 훨씬 좋은 환경이니까요."
아차, 하는 순간 이미 늦었다.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요."
박영찬의 안광이 번들거리며 빛났 다. 표연원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 었다. 무언가 일이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4관의 3층. 강우중이 알려준 바로 는 그랬다.
서둘러 움직인 덕분에 생각보다 이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는 길에 마주친 몬스터는 원샷 원킬로 거의 바로 죽인 덕에 사실상 멈추 지 않고 쭉 달려온 셈이었다.
"야……! 헉, 허억……. 아, 죽겠 네!"
조연호는 반쯤 죽을 것처럼 굴었 지만, 실제로 죽는 건 아니니 상관 없었다 .
그러나 우리의 여유는 얼마 가지 못했다.
퍽! 우드득!
-그만, 그만! 저는 정말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낯익은
현상이었다. 우리가 다녀온 곳에서 도 비슷한 일이 있었으니까.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이 목소리…… 표연원?'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는 것이다.
쾅!
거칠게 문을 열고 총을 쥔 채 들 어섰다.
"다들 멈추십시오!"
내 외침 이후 내부에 싸늘한 정적 이 감돌았다.
"헌터……?"
역천의 자격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지금 내 전투복에는 역천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누군가 알아 봤다.
"역천! 역천이다!"
"헌터가 우릴 구조하러 왔어……!"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내게 닿 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바 닥을 구르고 있는 한 사람.
엉망이 된 표연원이 그곳에 있었 다.
" 연원아……
"아……. 서하 누나……? 여긴 어
떻게……
내가 그를 아는 척하자 주변에 있 던 사람들이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 다. 역겨운 일이었다.
" 젠장......
조연호도 작게 욕지거릴 내뱉었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 이었으나, 그다지 보고 싶은 광경은 아니었다.
"아니……. 누나…… 맞죠?"
"나 맞아."
"하지만……
"너 새터 가는 날 아침으로 혜원
언니가 토스트 구워줬잖아. 사과 잼 발라서! 됐지? 이제 알겠어?"
"그래. 우린 계속 같이 있었어. 진 짜 맞아, 연원아."
내가 남들은 알기 어려운 며칠 전 기억을 내뱉자 그제서야 좀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조연호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러자 표연원이 조연호를 향해 물었다.
"형……. 누나는요? 혜원 누나 는…… 어디 있어요?"
"걱정 마. 금방 을 테니까. 지금은 우리뿐이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일단 네 치료부터 하자. 다행히 다 친 지 얼마 안 된 것 같으니 금 방……!"
조연호가 막 힐링 스킬을 쓰려는 찰나, 표연원이 그 손을 붙잡았다.
"저보단…… 저분을 먼저……. 읍, 큽! 하아……하……. 저분을 먼저 치료해줘요……
표연원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역 시나 피 칠갑을 한 누군가가 바닥 에 쓰러져있었다. 누구의 짓인지 뻔 했기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조연호는 머뭇거리다가 그곳으로 향했다.
"역천에서 오셨습니까?"
누군가 다가와 물었다. 고개를 들 어 쳐다보니 전에 본 적 있는 얼굴 이었다.
- 이 안에 헌터 지망생 5명과 현직 헌터 2명이 함께 있다고 합니다.
- 헌터 지망생이라 하면?
- 사설 아카데미 수료 후 헌터 시 험 준비 중이었다고 합니다.
- 현직 헌터 2명은 누군데.
- 레인저 박영찬, 탱커 고하진. 박 영찬은 나이트워커 소속 신입이고고하진은 무소속이요.
'박영찬!'
레인저 박영찬. 나이트워커 소속의 헌터 였다.
"이제라도 오셔서 다행입니다. 저 는 나이트워커 소속의 박영찬입니 다. 여기 확인해보시면 알겁니다."
그가 내미는 헌터 자격증을 한번 훑어보고는 돌려줬다. 어차피 중요 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아시겠지만 이곳에 있는 몬스터 는 쉐입쉬프터로 추정됩니다. 이 안
에도 한 마리 들어와 있는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거친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가피했다, 라……
"네.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당한 어조였다.
"최후의 방법이긴 하나, 게이트가 장기간 클리어되지 못할 때…… 은 근히 권장하는 방법들 중 하나란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가 작게 속삭인다. 잔혹하게도 그랬다. 빠른 게이트 클리어가 최선 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구조를 기다리는 편이 더 나았을 겁니다."
"그런 방법도 있었겠죠. 우연히도 희생된 분과 아는 사이라서 그런 생각이 들겠지만…… 당신도 게이 트에서 누군갈 희생시킨 적이 있을 것 아닙니까."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회귀한 후 엔 최대한 그런 선택을 피해왔으나, 회귀 전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으니 까.
누군가의 목숨을 희생시켜야만 나 머지 열 명이 생존할 수 있다면, 누구를 구해야 하는가? 그런 철학적인 질문을 생각할 새도 없었다.
"……저희가 이곳에 왔으니, 다른 방법으로 전환하죠. 혼자서 모두를 감시하기 어려워 이런 방법을 택한 것은…… 제가 뭐라 판단할 순 없 겠죠. 하지만 지금부터는 저희의 지 시에 따라주셨으면 합니다. 정식으 로 파견된 헌터팀은 저희니까요."
"물론입니다. 다만 한 가지…… 마 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박영찬이 비뚜름하게 웃었다.
"당신들이 몬스터가 아니라고 어 떻게 확신합니까?"
"무슨 소릴……
"그렇잖아요. 헌터인 척하고 저흴 전부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면 어떡 해요. 네?"
"저희가 의심되시면, 저희가 당신 들을 감시할 때 당신들도 저희를 감시하세요. 전문 헌터가 아니더라 도 눈이 이렇게 많으니, 어렵지 않 을 겁니다."
차분하게 대응하자 박영찬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알겠다며 등을 돌 렸다. 꺼림칙한 분위기가 흘렀다.
"서하 누나."
" 왜'?"
"제가 하는 말이 터무니없게 들릴 지도 몰라요."
"뭔데 그래?"
시선을 학생들에게서 떼지 않으며 말했다. 감시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잠시라도 눈을 떼선 안 된다.
"저, 그 몬스터가 누군지 알아요."
뭐?
그건 꽤나…… 위험한 발언이었다.
"어떻게?"
"자세한 이야기는 길지만…… 제 머릿속에 자꾸만 어떤 목소리가 들 려요."
힐끗 그를 바라봤다. 표연원은 어 딘가 꿈속에 빠진 것처럼 멍한 얼 굴을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믿기 전에 한 가지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연원아. 네가 쓰는 칫솔은 무슨 색이지?"
"네? 갑자기 그건 왜요?"
"얼른 대답해."
"어……. 녹색이요."
"언제부터 였지?"
"오래됐어요. 칫솔 안 섞이게 저는 녹색, 누나는 노란색을 썼거든요……
그거면 됐다.
이 표연원은 진짜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지만 만약 쉐입쉬프터가, 이미 표연원을 잡아먹고 그 행세를 하고 있었던 거라면. 우리에게 잘못된 정보를 줄 가능성도 있으니 간단한 확인 절차 가 필요했다.
'회귀 전 표연원은 레인저였어. 그 런데 목소리가 들린다고?'
그야, '각성'은 환경과 각성자 본 인의 기질을 많이 타곤 했다.
지금의 표연원은 회귀 전의 표연 원과 다른 심정으로 각성했을 테니, 고유 스킬이 달라졌다 해도 그럴듯 했다.
"네 고유 스킬이 뭔데?"
"'감웅'이라고 적혀있어요."
"감응? ……처음 듣는데."
회귀 전과 지금을 통틀어 정말로 처음 듣는 고유 스킬이었다. 감웅이 라고? 무엇과 감응한단 말인가? 차 라리 텔레파시나 사이코키네시스 같은 이름이면 더 명확했을 텐데.
"그럼 그 목소리가 너한테 뭐라고
말하고 있어?"
"저한테... 경고하고 있어요."
"무슨 경고?"
"어서 도망치라고요."
무슨 의미지? 한정적인 정보 탓에 제대로 된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려 웠다.
"이 목소리가 저한테 알려줘요. 몬 스터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겠어? 단순한 환청 이 아니란 걸."
"……네. 확실해요."
표연원이 낮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답했다.
"그분께서 아시면 노하실 거라고? 그러려나……. 아냐, 괜찮아. 그것 보다 확실한 거지? 웅. 의심하는 게 아니라……
허공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표연원 의 환청이 아니라면. 대화가 통할 정도로 상당한 지능과 인격까지 지 닌 것 같다.
'혹시…… 정령?'
미약하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 뿐이다. 정령은 마법처럼 적성이 없 으면 아예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존재다. 때문에 그들과 계약하고 그힘을 빌리는 정령술사의 존재도 상 당히 오랜 시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표연원이…… 정령과 계약을 했다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