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한참을 걸은 뒤에야 이 드넓은 초 원에 뭔가 변화가 생겨났다. 낯익은 나무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 공간으 로 넘어오기 위한 매개체가 되었던 고목. 그 고귀한 자태가 그대로였 다.
- 쉬잇…… 조용히 해야 해.
- 이 뒤에 잠들어 계시거든.
빛무리들이 작게 속삭였다. 표연원 은 긴장한 얼굴로 거목의 둘레를 따라 걸었다.
"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왕'이다. 이 빛무리의 중심 되는 자, 이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주인이 었다.
얼핏 사슴과 닮았으나 뿔 대신 말 라비틀어진 나무줄기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고, 몸체는 인간의 10배는 될 정도로 거대했다. 절로 경외심이 들 만큼 비현실적인 존재 였으나 동시에 무척 쇠약해져 있었다.
'나무가…… 말라있어.'
머리 양쪽에 뿔처럼 돋아난 나무 줄기는 바짝 말라 있었고, 눈도 제 대로 뜨지 못한 채 숨만 색색 내쉬 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병들 고 약해진 것이 확실했다.
- 우리의 소중한 분은 오랜 시간 잠들어계셨어.
- 아주아주 오랜 시간.
- 우리는 형체가 없어서 도울 수 없었어!
- 이 안까지 들어올 수 있는 인간
도 지금까진 없었고.
빛무리가 거대한 고목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 이 생명수는 아주아주 드물게 열 매를 맺는데,- 지금 딱 한 개 달려있어.
- 그 열매를 이분께 드리면.
- 오랜 잠에서 깨어나.
- 네게 상을 주실지도 몰라!
표연원은 아득히 먼 허공을 바라 봤다.
'이 거대한 나무에…… 열매가 단 한 개, 있다고?'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어떻게 찾 아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저 위 까지 어떻게 올라간단 말인가.
표연원의 낯이 창백해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빛무리가 해맑게 목소리를 냈다.
-부탁해! 오로지 너만이 할 수 있 는 일이야!
-깨어나시면 그분께서 분명 네게 큰 상을 내리실 거야!
♦ ♦ ♦
결정의 순간이 다가왔다.
다들 굳은 얼굴을 하고서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학생들을 구할지, 표연원을 구할 지.'
그 갈등의 기로에서 말이다. 나머 지 학생들은 피로에 젖어 아직 잠 들어 있었다. 그 사이에서 강우중은 슬그머니 일어나 우리 옆자리에 앉 았다.
"다들 잘 생각해봤지?"
혜원 언니가 먼저 서두를 열었다.
"미리 말하지만, 어느 쪽을 택한다
해도 난 원망하지 않을게. 이미 시 간이 많이 흘러 그 애의 생사가 불 분명한 상태에서, 아직 살아있는 아 이들을 두고 떠나는 게 도의적으로 옳지 않다는 걸 나도 아니까."
피를 토해내는 심정일 것이다. 혜 원 언니는 지금 동생의 목숨을 걸 고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다들 후회하지 않을 선 택을 하도록...
"제가 갈게요."
혜원 언니의 말을 싹둑 끊어냈다. 다들 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린다.
"혜원 언니는 이곳에 남아줘요. 우
리의 대표자로 등록되어 있으니, 여 기 남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아요. 대신에…… 저 혼자 다녀올게요."
"무슨 소리야, 그게. 무전기는 하 나뿐이라 우린……. 잠깐."
그제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미쳤어, 한서하?"
조연호가 기겁을 했다.
"무전기 없이 가겠단 말이야?"
"서하 씨. 심정은 이해하지만 무모 합니다. 무전기 없는 헌터는 사실상 조난자에 가깝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요."
조연호에 이어 정상준도 날 말렸 다. 그래. 그럴 만하다.
'무전기 없는 헌터는 백업도 요청 할 수 없고, 귀한 정보를 얻어도 공유할 수 없지. 그야말로 개인 헌 터일 뿐이니까.'
그런 개인 헌터는 활용도가 매우 떨어질 뿐만 아니라, 만약의 사태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보통 독립부대라 할지라도 중요한 정보는 공유하기 마련.'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무전기
가 지급된 것이다. 게이트에서 '고 립'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만큼 무 척 조심해야 하는 문제였다.
"쉐입쉬프터의 공격력 자체는 대 단하지 않으니 제가 혼자서도 감당 할 수 있어요."
"쉐입쉬프터를 잡으려면 여러 명 이서 교대로 대상자들을 감시해야 해. 만약 그쪽에도 몬스터가 숨어들 어가 있으면 네가 어떻게 그 학생 들을 다 감시할 건데?"
"이쪽 상황이 마무리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아요. 보아 하니 처음 진입 이후에 누굴 잡아
먹진 못했으니, 길게 버텨봐야 2~3 일이겠죠."
"그때까진 네가 버틸 수 있다…… 그런 말이구나."
나도 무작정 가겠다는 건 아니다. 여러 가지 계산 끝에, 내가 조금만 위험을 감수하면 실행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에 이야기를 꺼낸 것이 다.
"하지만 한 가지 변수가 있어."
그러나 역시 베테랑 헌터인 혜원 언니를 어물쩍 속여 넘길 순 없는 모양이다.
"다들 알잖아. 이 안엔 쉐입쉬프터
들의 '왕'이 있다는 걸."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긴 했다. 애초에 검은색 돔이 생긴 이 유를 우린 몬스터들의 왕이 만든 것으로 유추하지 않았던가.
'쉐입쉬프터들의 왕은 아직까지 발 견된 적이 없어. 그러니 공격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아직 미지수지.'
재수 없게도 표연원 쪽에 있는 몬 스터가 그 '왕'이라면…… 내 생사 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지켜야 하는 학생들은 한가득이고 최소 A나 B 등급은 될 보스 몬스 터와 조우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과를 낙관하기 는 힘들었다.
"……괜찮을 거예요."
하지만 애써 그렇게 말하며 웃었 다. 그러길 바라는 수밖에.
"하지만……
"아뇨. 저는 이미 마음을 굳혔어 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후회할 테니까요."
혜원 언니와 시선을 마주했다. 사 정없이 흔들리는 동공이 언니의 심 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헌터의 눈빛으로 돌아온다.
"……좋아. 그렇다 해도 너 혼자서 는 안 돼. 새터 때문에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모여 있을 텐데 혼 자 감시하는 건 불가능해."
혜원 언니는 주변을 가볍게 홅더 니 이내 한 사람에게 입을 열었다.
"연호야. 네가 같이 가는 게 좋겠 다."
조연호는 예상했다는 것처럼 태연 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쉐입쉬프터들의 왕이 어디 있을
진 확실하지 않아. 이곳에 있을 수 도 있고, 연원이 쪽에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르지."
혜원 언니가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무전기를 갖고 여기 남기로 한 이상…… 이곳이 본진이 될 수 밖에 없어. 최소한 2명, 그러니까 나랑 상준이는 남아야 해. 그렇지만 연호는 힐러니까 만약 도착했을 때 학생들이 다쳤으면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번갈아 교대 근무를 설 수 있 을 거야."
그 정도면 타당했기에 고개를 끄
덕였다. 이곳을 처음 발견했을 때 환자가 있었던 것처럼 저쪽도 생존 자들 사이의 분열로 응급환자가 생 겨날지도 모른다.
'조연호를 데려가면 만약의 사태에 대처할 수 있겠지.'
결정을 내린 이상 머뭇거릴 새는 없었다. 학생들이 깨어나기 전에 나 와 조연호는 일찌감치 건물 밖으로 나왔다.
서둘러 표연원에게 가야 했다.
* * *
"허억.…"허억......
표연원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단정하게 차려입었던 옷은 흐트러 지고 온통 흙투성이였다. 얼굴이며 손이며 찰과상으로 가득했고 이마 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러나 표정은 밝기만 했다. 손아 귀에 쥔 열매 덕분이었다.
-드디어 구했어!
-이제 곧 그분께서 깨어나실 거 야!
빛무리들도 기쁜 목소리를 냈다.
요란하게 춤을 추며 표연원의 주변 을 빙빙 돌았다.
'이걸…… 그냥 입 안에 흘려 넣어 주면 되는 건가?'
등근 모양의 열매는 껍질에 감싸 여 있었는데, 무척 말랑한 것이 꽉 쥐면 과즙을 짜낼 수 있을 것 같았 다.
표연원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 겼다. 나무 아래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거대한 사슴에게로.
주륵-
표연원은 사슴의 입가에 과즙을 흘려 넣었다. 처음엔 아무런 변화도없었다.
"깨어나지 않는데?"
-아니야! 보이지 않아?
-조금씩 싹이 돋아나고 있잖아!
그 소릴 듣고 고개를 들자,
"와아……
절로 감탄이 새어나왔다. 그 말대 로였다.
싹이 트고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가지들이 얽혀 빚어진 뿔이, 끄트머 리부터 은은하게 빛을 내면서 새로 운 잎을 틔우고 있었다.
- 깨어나신다!
- 깨어나실 거야!
빛무리들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천 천히 시작됐던 생명의 기운은 이윽 고 빨리 내달려 한달음에 뿔 밑바 닥까지 닿았다.
가지가 뻗어나가고 잎사귀가 싹튼 다. 형광 연두색의 은은한 기운이 퍼지면서 눈이 부시게 빛났다.
그야말로 찬란한 부활이었다.
마침내 그가 눈을 떴을 때, 그 시 리도록 빛나는 진녹색 눈동자가 표 연원을 똑바로 응시했다.
압도적인 무언가가 표연원을 압도
했다.
- 네게 신세를 졌구나.
웅장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빛무리들이 의사를 전달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 이제 막 깨어나 내겐 아직 시간 이 더 필요하지만…… 은인을 모르 는 체할 순 없지. 원하는 것이 있 다면 말해보거라. 내 권한 아래 있 는 모든 것들이 네가 바라는 대로 될 터이니.
표연원은 잠시 말을 골랐다. 사실 무엇을 부탁할지 명확히 생각해 본 적은 없으나, 지금 그를 사로잡고있는 강렬한 충동이 있었다.
-말해보거라. 무엇을 원하느냐?
"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당신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요."
-재밌는 소릴 하는구나. 방금 내 게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거늘.
"아! 그, 그렇겠죠. 제가, 그만 실 언을……
-하나…… 그것이 네 선택이라면.
거대한 사슴이 몸체를 수그리고 표연원에게 시선을 맞췄다.
-갖은 부귀영화보다도 귀한 것을 택했구나.
오만한 말과 함께, 그가 작게 웃은 것도 같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따라하거라. 나의 이름을 걸고, 나의 육신을 걸고, 나의 영혼을 바 치노니.
"나, 나의 이름을 걸고. 나의 육신 을 걸고. 나의 영혼을 바치노니."
그 말이 끝나자, 그가 서서히 다가 와 이마를 표연원에게 가만히 맞댔 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표연원은 어 찌 된 영문인지 알지 못해 주변을 살폈다.
그는 알아채지 못했으나, 연두색으 로 새겨진 문양이 자연스럽게 이마 에 스며들었다. 이윽고 제게 딱 맞 는 자리를 찾아 그 모습을 드러내 니.
표연원의 손등을 덮고 손가락까지 뻗은 기하학적인 문양이었다.
빛무리들이 말없이 표연원의 주변
을 두둥실 떠다녔다. 자신들의 주인 이 새로운 짝을 찾았음에 경배를 표하며.
-나를 부르고 싶을 땐 내 이름을 외치면 된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으나, 표연원 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 었다.
드라이어드 (Dryad).
숲의 정령, 나무의 님프. 바로 그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