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여기가 보스 몬스터 서식지야."
낮에 사냥한 땅장군 고기를 구워 먹으며 언니가 확언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이게 그 녀석 사냥법이겠지. 가둬 놓고 사냥하는 거."
"그런 것 같습니다. 아직 어떤 몬
스터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하나 짐작 가는 몬스터는 있죠."
정상준이 무슨 말을 할지 우리 모 두 알았다.
"쉐입쉬프터."
Shapeshifter. 공식 명칭은 따로 있 지만 보통 그렇게 불렸다. 악명이 자자한 놈이었다.
"모습을 바꾸고 숨어들었다가 단 둘이 남으면 인간을 잡아먹는 몬스 터입니다."
"내 생각에도 그 자식 같아. 이렇 게 직접 돔을 세운다는 얘긴 들은 적 없지만. 다른 몬스터들이 있긴
한데 죄다 노말 등급이라 저런 능 력은 없을 거야."
"자기 서식지 안에 다른 몬스터가 돌아다니는 걸 묵인하는 몬스터는 흔치 않죠. 보스 몬스터 중에선 더 더욱."
"무엇보다…… 머리카락 더미를 봤죠."
쉐입쉬프터는 인간을 통째로 잡아 먹지만, 염색된 머리카락은 소화하 지 못해 도로 뱉어내는 습성이 있 었다.
"학생들 사이에 숨어있을 거예요."
누구로 변해서 숨어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잘 숨어드는 특성이 있을 뿐이지 공격력은 낮은 편이니 많이 위험하지는……
"그것도 장담할 수 없어요."
조연호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우리가 아는 쉐입쉬프터는 이런 돔을 세우는 타입이 아니었잖아요. 이건 더 진화된 개체거나, 쉐입쉬프 터들의 왕이라고 보는 게 맞아요."
"왕이라……
무리 생활을 하는 몬스터들 중에 는 '왕'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그들은 다른 개체들에 비해 독보적으로 뛰어나고 강력하다. 예를 들어 웨어 울프의 경우 평범한 웨어울프와 왕 은 거의 3등급이나 차이가 난다.
'일반 쉐입쉬프터의 등급은 D. 잡 기 까다롭지만 공격력이 낮아서 그 런 거였어. 만약 진짜 이게 왕이라 면……
A나 B등급이었다.
'벌써 3일째.'
온통 검은색 돔에 둘러싸인 터라, 대학교 내부는 어둡고 음침한 분위 기가 흘렀다. 표연원은 창문에 감싸 둔 신문지 틈새로 슬쩍 밖을 내다 보았다. 이내 거대한 몸체에 살벌한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는 몬스터를 발견하곤 황급히 시선을 돌렸 다…….
" 배고파.
누군가 중얼거렸다. 첫날 점심으로 준비됐던 도시락을 천천히 나눠 먹 었으나 그것도 오늘 완전히 동났다. 마실 물도 부족했다. 인당 한 병에 여분으로 준비된 생수병도 바닥을 드러낼락 말락 하고 있었다.
'이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이제 한계야.'
나가지 않고 오로지 내부에서 버 티는 것.
그게 그들이 선택한 생존의 길이 었다. 게이트에 대해 연구하는 학과 인 만큼 평소 게이트에 관심 많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개중엔 표연 원처럼 헌터가 가족인 학생도 있었 다.
여러 논의 끝에 몬스터에게 들키 지 않고 이 안에 틀어박혀 구조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결론지 었다. 그러나 버티는 데도 슬슬 한계가 보이고 있었다.
'혜원 누나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 게 행동했을까?'
늘 그의 우상이었으며, 어떤 일이 라도 헤쳐 나갔던 그녀가 떠올랐다. 제 소식을 듣고 지금쯤 부리나케 달려오고 있겠지. 하지만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는 건, 몇 가지 가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저 벽이 우리를 완전히 가두고 있 거나, 이 게이트의 규모가 연화도만 큼 크거나.'
어느 쪽이라 해도 희망적이지는 않다. 표연원은 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삼켜냈다.
"우리…… 나가 봐야 하는 거 아 냐?"
누군가 말을 꺼냈다.
"이대로 안에서 굶어 죽을 순 없 잖아……
"밖에 몬스터가 있는데 무슨 수로! 다 죽을지도 모르잖아. 그냥 좀 참 으면서 구조를 기다리는 게……
"헌터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죽 겠어!"
"나가도 죽는 건 똑같아!"
가뜩이나 굶주려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에서 의견 충돌이 계속되니 대 번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선배가 개 입해 중재하긴 했으나 그들도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3일 내내 소모적 인 논쟁이 이어진 탓이었다.
"다들 진정하자……. 우리끼리 싸 워서 좋을 게 없잖아. 소리 지르면 배만 고파."
"형……. 이대로 다 굶어 죽자는 말이에요? 움직일 힘이 있을 때 나 가서 식량이라도 구해야 해요."
"먹을 걸 어떻게 구하게."
"그야…… 헌터들은 원래 게이트 안에서 몬스터 고기를 구워서 먹기도 하고……
"그럼 네가 잡을 거야?"
" 네?"
"몬스터. 네가 잡을 거냐고."
그 말에 입을 꾹 다문다.
일반인에 갓 성인이 된 이들이 몬 스터를 때려잡는 것은, 신화에서나 가능한 일일 거다.
아니. 한 명 있었다. 그런 사람이. 무엇도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 속 에서 찬란하게 재능을 뽐내며 개화 한 사람이.
'서하 누나.'
표연원은 그녀가 떠올랐다. 그 재 능과 실력 하나로 공사 구분이 철 저한 제 누나로부터 특권을 따내고 여러 대형 길드의 러브콜을 거절했 다던. 아카데미 하나 제대로 다니지 않았으면서 연수원에 수석으로 들 어갔던.
'서하 누나가 여기에 있었다면 뭔 가 달라졌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예예. 저희가 발견했는데요, 이게 진입이 불가능하거든요, 지금. 안에 있는 학생들이 무사한지도 모르겠 고……. 네, 네. 쉐입쉬프터인 것 같긴 한데 그것보다 더 위일 수도 있고요. 안에 노말 등급 몬스터들만 돌아다니고 정작 중요한 놈은 안 보여서 요."
독립부대라 해도 무전기 정도는 보급받았다. 우리가 발견한 것을 보 고하니 게이트 밖에서도 골머리를 썩이는 것 같았다.
"일단 내부랑 뭔가 소통이라도 해 야, 남은 5번의 기회를 갖고 안에 효율적으로 뭐라도 배급해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혜원 언니가 그제야 용건을 꺼냈 다.
"무전기 두어 대만 더 지원 가능 합니까?"
-안 되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독 립부대는 원칙적으로 보급품 지급 이어려운…….
"압니다. 아는데요. 무전기라도 안 에 집어 던져야 안이랑 연락을 하 든 말든 하지 않겠어요?"
-그 무전기 하나하나가 다 세금이 에요. 요즘 마력석 값 비싼 거 아시잖아요. 무전기 하나면 4인 가구 가 반년은 먹고 사는데, 그걸 허투 루 쓸 수 있겠습니까?
"다 사람 구하자고 그러는 거 아 닙니까. 네?"
둘은 한참을 그렇게 실랑이했다. 정부 쪽 인사는 독립부대라 안 된 다, 무전기 값이 비싸서 안 된다, 원칙적으로 한 팀당 하나 이상 배 분해줄 수 없다 등등의 말을 늘어 놓다가, 혜원 언니가 끈질기게 간청 하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많이는 안 됩니다. 딱 한 개. 한 개만 더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조금만 더 주시지, 한 개로 누구 랑 연락을 한다고 그래요."
-그 이상은 절대 안 됩니다!
쯧. 작게 혀를 찼다. 이 이상은 어 려울 것 같았다. 하나라도 얻어낸 게 어딘가.
어차피 본 목적은 그게 아니니 상 관없었다. 좌표를 불러주고 통화가 끝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허공 에서 새 무전기가 떨어졌다. 혜원 언니가 기존의 무전기를 쥔 정상준 에게 말을 건넸다.
"무전기, 뜯어."
우드득!
현대문명의 집합체, 게이트 외부와 내부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매개체. 그 무전기가 완전히 박살났다. 부서 진 몸체 사이로 보라색 빛이 감도 는 마력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휴. 큰 것도 박아 넣었네. 이러니 까 비싸지."
성인 여성의 엄지손가락만 한 마 력석이었다. 잘 정제되어 있었고, 마력을 불어넣자 은은하게 빛나며 알갱이들이 넘실거리는 것이 마력 도 풍부해 보였다.
새 무전기를 받아내자마자 기존
것을 뜯어낸 건 다소 양심에 찔리 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전기가 없 으면 외부와 소통하지 못하고 고립 되니, 헌터보단 조난자에 가까워진 다. 그렇다고 기존 것으로 버티기엔 이 마력석이 너무도 절실했다.
"자. 서하야."
그 마력석이 내게 쥐어졌다.
" 해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한 손엔 마력석 을 쥐고 다른 한 손에 노이트를 쥔 다.
'관통하는 철화.'
웅웅, 총신이 거칠게 흔들리며 에 너지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노이트의 탄환은 기본 적으로 마력탄이다. 그 말인즉슨, 마력을 불어넣을수록 그 힘이 더욱 강대해진단 의미다.
사르륵. 보라색 마력석 안의 알갱 이들이 안에서 가볍게 흩날린다.
그대로, 마력석에서 마력을 빨아들 인다!
'으윽!'
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강대 한 마력이 느껴졌다. 마력 통로가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지끈지끈통증을 알렸으나 멈출 순 없었다. 몸 안에서 한 바퀴 돌리며 주도권 을 빼앗은 뒤 노이트에게 직행했다.
우우우웅!
하얀색으로 빛나던 것이 서서히 보라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온전 히 나의 것으로 흡수하지 못한 탓 이었다. 마력석의 순수한 마력이 흘 러들어가자, 노이트는 나 혼자 버티 기 어려울 정도로 흔들리기 시작했 다.
"다들 붙어! 팔 잡고!"
"넵!"
" 알겠어요!"
여럿이 달라붙어 내 팔을 지탱하 는 것이 느껴졌다. 덕분에 마력석을 흡수하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노이트를 쥔 팔이 마치 경련이라도 일으키듯 거칠게 떨려왔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노이트를 놓칠 것 같았다. 손아귀가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이대로 쏠 순 없었다.
'조금만 더!'
응축하면 할수록, 꿰뚫는 힘은 더 욱 강해진다.
'조금만, 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탄환에 녹여
낸 다음.
파앙!
"으악!"
"어윽, 허리야……!"
발사의 반동으로 다 같이 바닥을 굴렀다. 덕분에 온통 흙투성이에 엉 망진창이었으나 우리가 원하던 광 경을 볼 수 있었다.
"됐다! 닫히기 전에 얼른 들어가!"
"짐, 짐 챙겨요!"
"몸만이라도 들어가야 해!"
단순히 철화 한 발만 쐈을 때는 손바닥만 한 구멍만 뚫렸는데, 마력석 하나를 죄다 때려 넣으니 성인 둘은 너끈히 통과할 구멍이 생겼다.
끄트머리부터 야금야금 닫히려는 것을 보니 서둘러야 했다. 미리 챙 겨둔 짐들을 들고 몸을 던졌다.
"세이프!"
"좋았어. 들어왔다!"
다행히 넷 모두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다.
"한서하. 팔은 괜찮아?"
"반동 때문에 빠진 것 같아."
"치료해줄게. 기다려봐."
한쪽 팔이 탈구된 듯 계속 불편했
는데 다행이었다. 조연호가 손에서 작은 빛을 내뿜자 팔이 급속도로 편안해졌다.
"다들 잘 들어. 이 안은 쉐입쉬프 터의 홈그라운드야. 이 녀석이 사람 들 사이에 교묘하게 숨어드는 건 알지? 미리 정한 암구호 잊지 말 고! 새로운 학생들 만나면 잘 기억 해둬."
"알겠어요."
"넵!"
"네. 걱정 마세요."
간단히 재정비를 한 다음 순간, 우 리는 한쪽 구석에서 울리는 비명을들렸다.
"아아아악! 오, 오지 마서 오지 마!"
잔뜩 겁에 질려 울먹이는 목소리 였다. 학생인가?
"누가 갈래?"
"제가 갈게요."
혜원 언니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나섰다. 눈을 감았다 뜨자 인근 지 형지물이 죄다 한눈에 들어왔다. 비 명을 지른 학생이 어디에 있는지도, 그 앞에 선 몬스터가 터럭벌레인 것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다음 순간 눈을 떴을 때, 나는 허 공을 날고 있었다. 터럭벌레가 심상 치 않음을 느끼고 도망치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탕!
총알 한 방에 터럭벌레의 머리가 으깨졌다.
탁. 발이 땅에 닿자 뒤돌아보며 물 었다.
"괜찮습니까?"
험한 일을 겪었는지 옷차림이 잔 뜩 흐트러진 남학생이었다. 몬스터 에게 쫓겨 홀로 일행에서 떨어진걸까? 그것도 아니면…….
'쉐입쉬프터일 가능성도 있다.'
날 멍하니 바라보던 학생은 이내 긴장이 풀렸는지 바닥에 털썩 주저 앉으며 숨을 골랐다. 허억, 허억. 거친 숨소리가 방금 지나간 절체절 명의 위기를 표현하고 있었다.
"허, 헌터세요?"
"네. 헌터입니다. 다른 일행들은 어디 있습니까?"
"살았다……! 살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학생은 한동안 그 자리에 웅크려
앉아 눈물을 흘렸다. 방금까지 몬스 터에 쫓기던 걸 구해줬다곤 하지 만…… 생각보다 반응이 과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나는 멋들어지게 늘어선 대학교 건물들을 힐끗 바라봤다. 저 안에 몇 명의 학생들이 살아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