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챕터: 닿지 않는 곳에서
테오에게 왜 이제야 말했냐고 따 질 시간도 없었다.
당장 뛰쳐나가 집으로 향했다. 짐 을 챙기고 서두르면 어떻게든 그 안에 진입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집 안에 들어섰을 때, 기묘 하게도 서늘한 분위기가 흘렀다.
고요한 거실에서 TV 소리만 울렸 다.
-한국대학교를 중심으로 게이트가 열린 가운데 그 안에서 새내기배움 터를 진행하던 대학생들 수백 명이 휘말려…….
긴급 속보를 알리는 앵커의 목소 리가 차분했다.
그 화면을.
혜원 언니가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 언니......
내가 인기척을 내자 혜원 언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봤다. 멍한 눈동자에 그제야 의식이 서리 기 시작했다.
w..서하야.''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나는 그런 언니를 부축했지만, 언 니는 도무지 중심을 잡지 못했다. 한참을 그렇게 휘청거렸다.
"우리 연원이…… 게이트 한 번
들어간 적 없는 앤데."
음울한 목소리가 낮게 중얼거렸다.
표연원은 요즘 시대에 드물게도 국가공인 헌터적성시험도 응시하지 않은, 말 그대로 순수한 '일반인'이 었다.
어설프게나마 게이트에 들어간 적 이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표 연원은 정말로 이 모든 게 처음일 터였다.
"어떡하지? 걔가 잘못되면 난...... 난 정말……
목소리에 울음기가 배었다. 패닉 상태인 것 같았다. 허나 이대로 울고 있는다고 사태가 해결되지는 않 는다. 움직여야만 한다.
"언니. 정신 차려요."
손을 꼭 붙잡았다.
"가야 해요.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그거라고요."
게이트가 열리면 정부에선 대책 회의를 열었다. 이 안에서 어느 길 드가 정찰팀으로 들어가고, 어느 길 드가 클리어팀으로 들어갈지 정해진다.
우리가 도착했을 땐 여러 길드들 이 이미 모여 있었다.
"역천에서 오셨군요. 지금 한창 정 찰팀을 선발하던 참인데, 자원하실 생각이……
"독립부대로 참여하길 원합니다."
혜원 언니의 말에 정부 관계자가 잠시 침묵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진 아실 텐데 요."
"길드장님, 독립부대라뇨. 저는 듣 지 못했는데요!"
조연호가 옆에서 속삭였다. 조연호 는 아직 표연원이 그 안에 끌려 들 어간 줄 모르고 있었다. 눈치껏 그 를 뒤로 빼내니 그제야 심상치 않 은 걸 느꼈는지 침묵했다.
"독립부대를 희망합니다."
"독립부대는 무전기를 제외한 어 떤 보급품도 받지 못합니다. 클리어 후 아이템 정산에서도 제외될 테고 요. 그런데도 독립부대로 들어가겠 단 말씀이십니까?"
"예. 원합니다."
단호한 어투였다.
정찰팀은 정해진 구역만 움직일 수 있고, 클리어팀은 보스 몬스터 서식지로 직행해야 했다. 우리의 목 적은 둘 중 어느 것도 아니었으니.
아이템 정산권이나 보급 보장권 같은 권리가 없지만 아무런 의무도 지지 않는 '독립부대'가 최선의 선 택이었다. 본디 클리어팀으로 발탁 되지 못한 길드에게 두 번째 기회 를 주는 정책이었으나 지금은 거의 사장되다시피 했다.
그걸 오늘 우리가 입에 올렸다.
"……독립부대는 자격 확인 절차 가 필요 없습니다. 언제 게이트에
입장할 생각이십니까?"
클리어되지 않은 게이트는 한번 발을 들이밀면 보스 몬스터를 죽일 때까지 밖으로 나올 수 없다. 그렇 기 때문에 첫 입장은 신중히 결정 하는 것이 좋으나, 우리의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지금 당장."
[알림: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사용자를 확인합니다.]
[개체 '한서하(각성자)'를 확인했습 니다.]
[시스템에 접속합니다.]
익숙한 알림이 울리고, 필드형 게 이트 중에서도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열대우림 배경이 펼쳐졌 다. 본래 있던 콘크리트 덩어리 사 이로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독립부대는 소수정예로 활동하는 게 정석이다. 보급품을 제때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원은 간 단하게 4명이었다. 나와 혜원 언니,조연호 그리고 정상준.
정상준은 연화도 게이트 안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회귀 전에도 그는 스마일좀비……라는 이름으로 알려 진 탱커기도 했다.
"연원이가 저 안에 있다고요?!"
"쉿. 조용히 해."
조연호가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 쳤다. 그럴 만도 하지. 갑작스럽게 아는 동생이 게이트에 휘말렸다고 하면.
"……새내기배움터가 진행 중이었 다면 대학교 내부에 있었을 가능성 이 커요. 우선 그쪽으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정상준이 타당한 말을 했다. 부디 그곳에 얌전히 있어야 할 텐데 말 이다.
'게이트가 시작된 후 처음 장소에 서 크게 움직이지 않는다. 이게 기 본 안전 수칙이지만……
보통 몬스터가 뒤쫓아 오는 상황 에 처하면 그런 걸 고려할 여유가 없어지곤 하니까.
* * *
표연원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 치챈 건, 새내기배움터에서 막 수강 신청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을 때 였다.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 다.
하지만 주변 학생들은 새롭게 시 작될 학교생활에 들떠서, 악명이 자 자한 수강신청에 대해 배우느라 모 두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디서 들린 소리지? 그런 의문이 들 때. 그의 눈앞에 창이 떠올랐다.
[알림: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사용자를 확인합니다.]
[개체 '표연원'을 확인했습니다.]
[시스템에 접속합니다.]
웅성웅성.
그에게만 보이는 환영은 아닌 것 같았다. 주변 학생들이 '무슨 소리 야?' 하며 소란스럽게 떠들었다. 당 혹스러운 얼굴의 학생회 선배들이 잠시만 기다려달라며 자기들끼리 무어라 속삭이기 시작했다.
[시스템에 처음으로 접속하는 사용
자입니다.]
[개체 '표연원'을 수치화합니다.]
[상태창]
이름 : 표연원
칭호 : 역천의 보호 아래 선 자, 깨어나지 못한 자, 요리의 대가고유스킬 : 감응
체력 : 800
마력 : 500
근력 : 5
민첩 : 8
[각성자로 등록됩니다.]
표연원의 주변엔 온통 각성자투성 이였기 때문에 상태창이 뭘 의미하 는지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동 시에, 자신이 게이트 안에 불시에 들어왔다는 사실도 명확히 인지했 다.
'주위는 아까와 똑같아 보이지만, 분명 여긴 게이트 안이야.'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이야 기만 듣던 그곳 안에 있는 거다. 생과 사의 갈림길이 일분일초 만에 결정되고, 제아무리 날고 기던 헌터도 한순간의 방심으로 목숨을 잃는 잔악무도한 곳.
'게이트' 말이다.
"다들 조용하고! 일단 사태를 파악 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자!"
학생회 선배가 나서서 조용히 시 키자 다들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손윗사 람의 말은 평소보다 힘을 갖기 마 련이다. 비록 저들도 일개 학생에 불과하겠지만.
* * *
서걱-
땅장군의 사체가 바닥에 쿵, 떨어 졌다. 처음 시작할 땐 이 녀석 잡 는 데도 공을 들였지만 이제는 그 럴 필요도 없었다. 이놈은 그래도 덩치가 커서 먹을 부위가 많으니 오늘 끼니를 해결하는 덴 도움이 될 것이다.
게이트에 진입한 지 벌써 3일째였 다.
생각보다 게이트 안이 넓었다. 쉼 없이 이동했으나 이제야 대학교 근 처였다. 조금만 더 가면 한국대학교가 보일 터였다.
"어……? 저게 뭐죠?"
울창한 나무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더니, 빽빽한 밀림 구역을 벗어나 자 탁 트인 하늘이 드러났다. 그런 데 영 이상했다.
검은색 돔 같은 것이 보였다.
'위치상으론 저기가 대학교일 텐 데……?'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고, 우 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뛰쳐나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돔을 자
세히 볼 수 있었다. 반으로 잘린 구체 모양이었는데, 안이 전혀 보이 지 않았다.
"안으로 진입이 불가능합니다!"
정상준이 크게 외쳤다. 그가 방패 를 앞에 두고 몇 번 몸을 부딪쳐봤 지만 끄떡도 안 했다.
탕!
총도 겨눠봤지만 똑같았다. 아니, 탄환이 튕겨 나오는 게 아니라 마 치 흡수하는 것처럼 쏙 빨려 들어 갔다. 검은색 돔에는 짙은 보라색 무늬가 뒤섞여 있었는데, 총을 겨눈 부분만 마치 회오리치는 것처럼 변했다.
"충격을 흡수하나 봐요."
"흡수라고?"
혜원 언니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단순히 튕겨내는 데 그친다면 더 강한 충격을 주어 깨뜨릴 수 있지 만, 힘을 흡수해버린다면 이야기가 많이 복잡해진다.
언니는 공중에 떠 높이 올라갔다 내려오며 말했다.
"대학교 전체를 둘러싸고 있어. 빈 틈이 안 보여! 이 안으로 들어갈방법이...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거대한 검은색 돔을 올려 다보며 고민에 빠졌다. 그저 기다리 는 수밖에 없는 걸까?
철컥. 특수탄환을 장전했다. 뭐라 도 해봐야 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 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우웅!
빛의 무리가 노이트로 쏟아지고, 총신이 흔들리며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가 모여들었다.
혜원 언니가 놀라 무어라 말하기 도 전에, 탕!
'관통하는 철화.'
이 특수탄환의 설명은 이랬다.
'응축된 힘으로 상대를 관통해냅니 다.'
그렇다면, 이 벽도 관통해낼 수 있 을지도 몰랐다!
푹!
"됐……! 아!"
총알이 돔의 벽을 뚫는 순간, 총알 이 박힌 부위를 중심으로 주변이 잠시 걷혀 안이 보였지만 잠시뿐이었다. 그 직후 돔의 벽은 빠르게 복구되어 다시 검은색만 보였다.
다만, 그 잠깐이나마 안을 엿볼 수 있었는데.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 까요?"
바닥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내부 상황이 심상치 않은 건 분명 했다. 싸늘한 정적이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다.
"서하야. 다시 쏠 수 있어?"
"5분 뒤에 가능해요. 연속으로 쏠
순 없고요."
"방금…… 내가 제대로 본 거 맞 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몬스터의 피라고 믿고 싶었다. 바 닥에 찍힌 피로 물든 손자국을 애 써 모른 체하고 말이다.
"방금 들은 얘깁니다."
조연호가 무전기를 듣고 소식을 알렸다.
"이 안에 헌터 지망생 5명과 현직 헌터 2명이 함께 있다고 합니다."
"헌터 지망생이라 하면?"
"사설 아카데미 수료 후 헌터 시 험 준비 중이었다고 합니다."
"현직 헌터 2명은 누군데."
"레인저 박영찬, 탱커 고하진. 박 영찬은 나이트워커 소속 신입이고 고하진은 무소속이요."
그래도 아예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건 아니란 소리였다. 게이트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나이트워커 소속 레인저라면 꽤 쓸 만한 헌터일 거다. 다만 탱커인 고하진과 함께하지 않으면, 단일 레 인저로 얼마나 그 효율을 뽑을 수있을지는 미지수지만.
"그래……. 연원이도 나한테 얘기 많이 들어서 기본적인 사항은 다 알 거야. 그러니 제발…… 저 안에 서 살아남길 기도해야지."
언니가 애써 희망찬 말을 했으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우선 한 바퀴 둘러보면서 시간이 찰 때마다 총을 쏴보죠. 내부 상태 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래. 그러자."
탕, 탕!
하루 최대 6발인 총알을 모두 소
진한 다음에야 우린 쉴 수 있었다. 한 바퀴 돌면서 간헐적으로 안을 훔쳐본 결과 우리는 몇 가지 결론 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기가 보스 몬스터 서식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