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안유수가 강아지 같은 눈망울을 하고서 안절부절못했다. 유라는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언니, 혹시 목 안 말라?', '내가 앞접시 갖다 줄 까?' 하며 부산을 떨고 있었다.
"괜찮다니까."
"그치만…… 언니를 거기에 두고 갔잖아……. 다시 돌아오지도 못했어차피 신입인 저 둘이 뭔갈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을 거다. 이 들은 이운우가 왜 앞장서서 싸우는 지도 모르던 애들 아닌가. 청사에 완전히 녹아들었다고 보긴 어려웠 다.
"여전히 사이가 좋슴다."
김태병이 돈까스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간단히 평했다. 자세한 사정 은 알지 못하고, 저 둘이 내게 큰 실수를 했다는 정도만 파악한 듯했 다.
"그래 보여요?"
"다시 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함다."
"허, 참!"
김태병이 가볍게 유라를 놀렸다. 나름 실내체육관에서 동고동락했다 고, 친근한 분위기였다.
"한서하 주변은 항상 사건사고가 넘치니까."
설민준도 한마디 거든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체육관 이 끝나고 나서도 수없이 많은 게 이트들을 클리어하고 다녔으니까. 이번 게이트는 나도 편하게 놀고먹 을 생각으로 갔다가 일이 꼬인 터 라 좀 억울했다.
"원래 능력 있는 사람은 그런 거 예요. 세상이 가만두질 않으니까〜."
"내가 볼 땐 한서하가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 같은데."
안유수가 얼토당토않은 합리화를 시전했지만 설민준은 들은 체도 하 지 않았다.
"난 민준이 말에 한 표〜."
이찬송이 깐족거리며 거들었다.
"그래서. 다들 오랜만이네. 잘들 지냈어?"
권성민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내가 그를 바라보자, 그도 나를 바
라봤다.
권성민이 이 자리에 나온 건 꽤나 의외였다. 저번에 그렇게 헤어졌으 니 다시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김태병이 자리를 주선하자 어떻게 나오긴 했다.
"저희야 뉴스에서 보실 테고."
"아맞아. 봤어. 그 청사 특집에 서."
"나름 유망주라서요."
쌍둥이들이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겸손할 줄 모르는 게 여전하다고 해야 할까. 참 한결같다.
"뉴스에 나오진 않지만, 길드 생활 잘 하고 있어."
"저도 그렇슴다! 이젠 좀 익숙해졌 슴다!"
설민준과 김태병이 말을 이었다. 이 둘은 그래도 소속 길드랑 몇 번 엮인 적이 있어 어떻게 지내는지 대충은 알았다. 김태병도 처음엔 징 그럽다고 난색을 표하더니 이젠 선 배들이 반찬 숟가락에 얹어주면 잘 만 받아먹는 것 같다.
"나도 그럭저럭 잘 지내."
내 근황도 짧게만 전했다. 음, 게 이트에 들어갔다가 반쯤 죽을 뻔하고 지금은 수상한 단체를 쫓다가 정부 압박이 들어왔지만. 그럭저럭 잘 지내는 편이지.
"나도 잘 지내는 편. 가업 때문에 바쁘긴 하지만."
"어떤 가업임까? 뭐, 회사라도 물 려받는 검까?"
이찬송의 말에 김태병이 의문을 표했다. 가업, 가업, 하는데 정확히 무슨 일인지 알려주질 않으니 호기 심이 증폭될 수밖에.
"그건 기업비밀〜."
"뭡니까! 치사함다. 우리 사이에도 비밀이 있슴까?"
"너 빼고 다 있을걸?"
이찬송의 말에 김태병이 진짜냐는 듯 주변을 살폈다. 음, 뭐. 어떤 단 체를 쫓는 것도 비밀이라면 비밀이 겠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자 김 태병이 충격받은 것처럼 입을 벌렸 다.
"저…… 저만 빼고 다들! 너무함 다!"
"비밀이라기보단…… 뭐, 사생활 같은 거지."
"사람이 너무 솔직하면 또 매력 없어〜. 그치, 안유수?"
"맞지, 맞지. 비밀도 좀 있어야지." 다들 이제 사회생활을 하니까 말 이다. 남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것 들 한둘쯤은 있기 마련이다.
'실내체육관 상황이 특이했던 거 지. 거기선 정말…… 다들, 있는 그 대로의 모습을 보여줬었는데.'
새삼스럽게도, 그들이 '생존'을 위 해서가 아니라 '사회생활'을 위해 한 꺼풀 뒤집어쓴 것을 보니 감회 가 새로웠다. 김태병은 그다지 변하 지 않았지만. 안 씨 쌍둥이들은 자 신들을 더 화려하게 포장할 수 있 게 됐고, 설민준은 자신의 진심을드러내 보이지 않게 됐으며 이찬송 은 그 특유의 '사람을 불편하게 만 드는 분위기'를 지워냈다.
마지막으로 권성민은.
"성민이 형은? 뭐, 정치 쪽으로 나 간다고는 들었는데."
"응. 맞아. 그렇다고 뭐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모시는 분이 있어."
그도 사회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 다.
-마력석을 이용한 마력발전기가 현대 사회의 주 에너지공급원인 가운데, 마력석이 헌터들의 독점 전유 물인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열변을 토하던 임천훈 국회의원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고, 그 뒤로 수행비서처럼 서 있던 권성민 이 떠올랐다.
"우와, TV에서나 봤던 것 같은데! 그럼 오빠가 나중에 국회의원 되는 거야?"
"확실하진 않지만,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중이지."
"왜 헌터가 아니라 그쪽으로 갔어 요?"
설민준이 타당한 의문을 표했다. 본래 직업이 있던 고해윤과 내 권 유로 대장장이 수련을 떠난 송다정, 마지막으로 가업이 있는 이찬송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죄다 헌터 로 진로를 틀었기 때문이다.
'권성민도 헌터가 될 자질이 부족 하진 않았어. 어딜 갔어도 한 사람 몫을 해냈을 거야.'
그 본인도 헌터에 아예 관심이 없 는 것 같진 않았는데. 갑자기 정치 로 노선을 바꾼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건.…"
그가 잠시 뜸을 들였다.
"……내겐 이쪽이 더 맞을 것 같 아서."
"하긴! 성민이 형 최우도 쌤 아래 서 엄청 일했잖아."
"그러고 보니 우도 쌤 이번에 헌 터관리국 들어가셨다던데."
헌터 연수원에서 최우도가 공부를 시작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기어코 해낸 모양이었다. 하긴, 그 사람도 마냥 평범한 노인으로 살 재목은 아니긴 했다.
"다정 누나는 연락되는 사람 없
어?"
"없을 검다. 저도 연락 안 됨다."
"대체 무슨 수련을 하길래 아직까 지도 연락이 안 되는 거람?"
지옥의 수련일걸……이라는 말은 굳이 내뱉지 않았다. 이야기를 풀었 던 대장장이도 제 스승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고 했으니. 그 고강도 수련을 하고 있다면, 연 락이고 자시고 당장 목숨부터 부지 하느라 바쁠지도 모른다.
"종종 이렇게 모이자. 오랜만에 얼 굴 보니까 좋네."
"맞슴다! 다들 잘 지내는 것 같슴
다."
"나도 아직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중에 한자리 올라가면 너희 잊지 않을게."
권성민이 먼 미래를 기약하는 말 을 했다. 어쩐지 찝찝함이 마음에 남았다.
* * *
째깍, 째깍. 시계가 00시 00분을 가리킨다.
팡! 파방!
"성인 된 걸 축하해!"
"연원이 이제 어른 다 됐네!"
혜원 언니가 씩운 고깔모자를 머 리에 얹고 표연원이 멋쩍게 웃었다. 어깨에는 방금 터뜨린 폭죽 잔재가 내려앉아 있었다.
"고마워, 누나. 서하 누나도."
"우리 막둥이 어느새 스무 살이나 먹었나 몰라."
혜원 언니는 감회가 새롭다는 듯 이 보고 있었다. 곧장 감격 어린 표정으로 표연원을 꼭 끌어안는다. 표연원이 낯간지럽다며 그러지 말라고 발버둥 쳤으나, 현직 헌터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내 포기하고 축 늘어졌다.
"대학도 대충 정해진 거지?"
"네. 한국대학교 예비 1번 받았거 든요."
"잘됐다. 재밌겠네."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꼽히는 대학 을 들어간다니, 대단할 따름이다. 나도 본래는 진학 예정인 대학교가 있었지만…… 회귀 전이나 지금이 나 대학 문턱도 못 밟아봤으니. 나 름 대학 생활에 로망이 있기도 했 다.
"서하야, 얘 전공 뭔지 알아? 내가 강요한 건 아닌데 글쎄...
"게이트 시스템 과학부예요."
혜원 언니의 말을 끊어내며 표연 원이 불쑥 말을 꺼냈다.
"거기라면…… 국립 게이트 연구 소랑 협약 맺은 데잖아."
"맞아요. 게이트 연구원이 되려고 요."
국가에서 뛰어난 게이트 연구원을 육성해내기 위해 설치한 학과로, 반 쯤 취업이 보장된 과라 경쟁이 치 열하다고 들었는데. 거길 들어갔단말이야? 표연원이 원래 게이트 연 구에 관심이 있었던가?
그런데 게이트 연구소라면…….
검은 머리를 단발로 쳐내고 날카 로운 눈매를 한 여자가 퍼뜩 떠올 랐다. 고양이 같은 분위기의 여자, 백목련 말이다. 부소장인 그녀 밑으 로 들어가려나, 그럼.
"언제부터 그런 생각했대? 이 누 나한테 말도 않고."
"그냥……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 누나한테 게이트에 대한 얘길 많이 들었고, 누나가 게이트 들어가면 걱 정되는 만큼 많이 찾아봤고. 그러다
보니까 게이트 공부하는 게 재밌더 라고."
그렇게 말하며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진심으로 자신의 적성을 찾 은 것 같아 기뻤다.
"너희 신입생 환영회는 한대? 엠 티는? 안 가?"
"아직 예비가 안 돌아서…… 자세 히는 모르겠어. 합격자들도 정확히 다 나온 게 아니고, 정시도 남았으 니까."
"그래도 있겠지? 엠티 가겠지?"
혜원 언니는 표연원보다 더 신나 보였다. 하긴, 신입생 환영회며 엠티며 하는 것들이 바로 젊음의 상 징 아니던가. 나 역시도 조금 궁금 했다.
"가서 여자친구 만들어 와! 알지? 원래 그런 데서 커플 제일 많이 생 기는 거!"
"에이, 됐어. 그러려고 가는 거 아 니야. 그냥 동기 될 애들이 궁금해 서 가는 거지……
"다들 말은 그렇게 하더라."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는 표연원을 놀리는 게 재미있는지 혜원 언니가 연신 짓궂은 말을 던졌다.
"자, 그럼! 우리 막내 성인 된 기
념으로 짠 할까?"
"오늘은 적당히 마셔, 누나. 내 핑 계로 취할 때까지 마시지 말고."
"걱정 마, 걱정 마. 이 누나 술을 궤짝으로 먹어도 안 취하니까."
그 말에 표연원이 낮게 한숨을 내 쉬었고 나는 작게 웃었다.
그렇게 1월 1일이 지나가고 있었 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표연원의 합격
발표가 났고, 우리는 다시 한번 축 하하며 저녁을 먹었다.
2월이 되자 새내기배움터, 일명 새 터 일정이 올라왔다. 표연원보다도 나와 혜원 언니가 더 부산을 떨었 던 것 같다. 우리는 그날 표연원이 무슨 옷을 입고 가야 하는지 오랜 시간 토론할 정도였다.
'진짜 동생이 대학 가면 이런 느낌 일까?'
나는 동생이 있어 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그러지 않을 까 싶었다. 비록 나는 한서하지만, 그때만큼은 표 씨 남매와 한 가족이었다.
그 따스함에, 내게 또 한 번의 기 회가 주어진 것에 다시 감사했다. 너무도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새터 당일.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표연원을 배웅하고, 다녀와서 재밌 는 이야기를 들려주길 기대했다. 아 마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 을 것이다.
나는 회귀 전이나 이번이나 대학 을 가본 적이 없어 조금 더 기대했 을지도 모른다.
그날, 테오에게서 그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그러고 보니 이따 게이트가 열리 겠구나."
태연한 얼굴로 테오가 불쑥 폭탄 을 던졌다. 우리는 게이트가 하나 열리면 당장 헌터가 소집되고 대책 회의로 분주해지는데.
"무슨 게이트?"
어쩐지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어 딘가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한국대학교 게이트 말이다."
이런 건 도무지 빗나가질 않았다.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끔찍한 생
각이 들었다.
'연원이가…… 그 안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