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반투명한 막이 내 몸을 감싼다. 그 대로 물 안으로 이동했다.
"안…… 돼! 너도……!"
이운우가 거절의 말을 내뱉었지만, 제대로 말도 꺼내지 못하는 주제에 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말을 무시하고 팔을 잡아끌었다.
"살았다……!"
"다행이야!"
내가 그를 뭍으로 데리고 나오자 주변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에 젖어 꽤나 무거운 녀석을 바 닥에 내려놓자 제대로 서지 못하고 쓰러졌다.
'……거리가 꽤 있어.'
현종인지, 현충인지 하는 사람의 고유 스킬이 괴력이라도 되는 모양 이다. 공간 간섭을 써야 할 정도로 멀리 내던져진 탓에, 가장 가까운 뭍으로 끌고 나오니 일행들과 제법 떨어져 있었다.
저쪽으로 가야 하는데, 여태 정신 을 못 차린 이운우가 무거운 짐이 었다.
'귀한 마법사님을 두고 갈 순 없으 니, 질질 끌어서라도 가야 해.'
이윽고 막이 사라졌다. 이젠 나도 대미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 리고 저들과 우리 사이에는 큰 웅 덩이가 있었다. 저걸 피하려면 한참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놈은 그걸 기다려주지 않 았다.
화르륵!
"조, 조심!"
"놈이 깨어났다!"
"다들 준비!"
저쪽 너머에서 화려한 불꽃이 튀 었다. 놈이 살아있었다.
이제는 호수라고 불러야 할 그곳 가운데, 놈의 실루엣이 보였다.
번개로 제법 화상을 입은 것 같지 만…… 아직 살아 있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사그라들었던 박쥐들도 그 녀석이 손짓하자 다시 수십 마 리가 허공을 뛰놀았다.
'뚫어내지 못했어!'
뼈아픈 실책이었다. 이운우가 있을 때도 실패했는데, 지금 그는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승산은…… 제로에 가깝다.
'성수는 있지만, 놈의 머리 위로 텔레포트해도 박쥐들이 대신 맞으 면 끝이다.'
무력화시키지 않으면 내 역할이 없다. 제아무리 강화된 성수라고 한 들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아까가 절호의 기회였는데!'
그 개자식이 이운우를 던지지만 않았으면! 그대로 정진문의 지시에 따라 성수를 흩뿌렸을 것이다. 그렇게만 했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악화 되진 않았을 텐데!
"버러지 같은 놈들!"
부상을 입은 것에 제법 화가 났는 지, 광범위한 불 마법을 여기저기 난사하고 있었다. 호수가 형성되지 않은 지형에 서 있었던 나머지 일 행들은 죄다 불꽃을 피하느라 정신 이 없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운우가 없는 이상, 남은 수는 단 한 가지다.
'……후퇴할 건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정진문을 응시
했다. 그도 알고 있을 거다. 후퇴 말곤 답이 없다. 그러나, 이대로 나 와 이운우를 두고 도망친다면 다음 기회는 더더욱 없다.
이운우를 포기하고 나머지 길드원 을 대피시킨 뒤 다음 지원을 기다 릴 것이냐, 그들의 목숨을 버려서라 도 이운우를 데려갈 것이냐. 그 기 로에 섰다.
"……후퇴한다!"
전자를 골랐나.
정진문의 외침에 다들 출입구 쪽 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안 돼! 언니가 아직 저기에……!"
"두고 갈 수 없어요!"
쌍둥이들이 울며 외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 어리광 섞인 말을 들어줄 리가 없다. 그들의 항 의는 묵살된 채, 그대로 끌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탱커들이 앞에서 버티는 동안 최 대한 빨리 탈출을 감행한다. 그 가 운데서 정진문이 우리 쪽을 향해 외쳤다.
"하루만 기다려 주십쇼!"
하루? 이곳에서?
죽어달란 소리를 잘도 돌려 한다.
"제 고유 스킬이 당신들을 지켜줄 겁니다!"
그 말과 동시에 나와 이운우가 있 는 곳을 감싼 빛무리가 생겨났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시계초침이 똑 딱똑딱 움직이고 있었다. 빛으로 된 시계라. 제법 고풍스럽다.
"기다려 주십쇼! 금방, 금방 돌아 오겠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쿠웅. 문이 닫혔고.
우리는 뱀파이어와 함께 고립됐다.
* * *
"버림받았구나. 인간들의 주특기 지."
뱀파이어가 우릴 비웃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릴 공격하려 들다 가, 정진문의 고유 스킬이 끄떡도 하지 않자 포기한 참이었다.
몇 가지 실험을 해보니 확실했다. 이 결계를 기점으로, 두 공간은 완 전히 단절됐다. 안에서 밖으로, 밖 에서 안으로. 그 어떤 영향력 행사 도 불가능하다.
"그 인간은 잘도 자는구나. 이 상 황에서."
이운우는 아직도 깨어나질 않고 있었다. 성수를 흘려 넣었으니 내상 은 치료됐을 텐데.
"너는 참 재미없는 인간이다. 반응 도 없고. 머리 색도 특이하지 않고. 그 총으로 네 머리를 쏘는 건 꽤나 볼만했다만……
혼자 중얼거리더니, 퍼뜩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그가 결계막에 얼굴 을 들이밀었다.
나를 샅샅이 훑어보고는 진득한 미소를 짓는다.
"너구나."
"날 알아?"
"알다마다. 네가 얼마나 유명인사 인데."
내가? 톨룩에서? 금시초문인걸.
하지만 한 가지 짚이는 점이 있다 면…….
뱀파이어는 언데드 계열 마족이다. 귀족처럼 잘 차려입은 것처럼, 인간 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며 자기들만 의 공동체를 꾸려 살아간다. 내가 아는 마족은 몇 없으니…….
"벨제부브에게 들었나?"
"잘도 그 입을 함부로 나불대는구 나, 인간! 벨제부브 '님'이라 불러 라!"
아주 극성이다. 뭐 벨제부브 팬클 럽 회장이라도 되시나?
"나는 그분의 충실한 심복으로, 아 주 오랜만에 그분의 흥미를 끄는 인간이 나타났단 얘긴 들었다. 그게 너 였군."
"아, 그러셔."
그다지 달가운 주제는 아니었다.
"후후후……. 이 벽만 깨지면 그냥 죽여 버릴 작정이었는데. 생각이 바
뀌었다."
놈이 망토자락을 휘날리며 허공을 날았다. 사방을 날아다니던 박쥐들 이 녀석을 향해 달려들고, 그대로 몸 안으로 흡수됐다.
"난 태생부터 고귀한 몸이라 너희 인간들과 오래 어울릴 마음은 없었 다만…… 그분의 뜻이 있다면 다르 지. 널 제외한 나머지 인간들을 네 눈앞에서 처절하게 죽여주마! 그게 그분께서도 원하시는 일일 테 니……
그 말을 남기고, 자신의 관으로 스 르륵 빨려 들어갔다. 놈이 들어가자마자 자동으로 관 뚜껑이 닫혔다. 귀신이라도 붙은 것처럼 신묘한 움 직임이 었다.
'……찝찝한 말을 하네.'
놈이 관 안으로 들어가자 온전히 나 홀로 남았다.
그놈이 원하는 일일 거라고? 그렇 겠지. 혜원 언니에게 하던 짓이 그 렇지 않았나. 이번 타깃은 나로 잡 았나 보지. 하지만 네 생각대로 쉽 사리 당해주진 않을 거다.
'넌 날 처음 보겠지만 난 널 경험 해본 적이 있거든.'
* * *
이운우가 눈을 떴을 때,
"으음...... 여긴......'?"
신음과 함께 말을 내뱉길래 나도 모르게 툭 대답했다.
"헌터 시험 때가 생각나네."
"……한서하?"
그가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핀다. 물웅덩이가 고인 주변과 우리를 둘 러싼 결계를 보더니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다.
"또 네게 신세를 졌어."
"별말씀을."
그래도 내게 묻지 않고 스스로 짐 작하는 걸 보니 경험치가 제법 쌓 인 태가 났다.
"정진문 씨 스킬이네. 얼마나 버틸 수 있대?"
"하루 정도."
"하루라……
꽤나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사실 내 생각도 그렇다.
나름 비장하게 퇴장하긴 했지만 한번 실패하고서 다시 들어올 수있을까. 돌아온다 해도 레이드에 성 공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청사 사람들이 이운우를 달가워하 지 않았으니까. 이 기회에 모른 척 할 수도 있어.'
정진문은 이운우를 동정한다고 말 했지만, 그 정도 값싼 동정으로 얼 마나 많은 것을 감수할 수 있을까?
특히나 청사는 이 뱀파이어와 아 주 상성이 나빴다. 원거리 딜러를 주로 하는 파티에게, 원거리 공격을 무력화하는 보스 몬스터라니. 이보 다 더 나쁠 수가 없다. 그걸 정진 문도 모르지 않을 터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게이트 안 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
청사 내부에서 자기들끼리 말을 맞추면 나와 이운우는 보스 레이드 중 사망한 것으로 처리할 수 있단 소리다.
어차피 게이트 안에서 다른 사람 의 도움을 기다리며 가만히 있는 건 멍청한 짓이다. 그것만큼 어리석 은 짓이 없다. 내 목숨은 내게만 소중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해둔 게 있어."
그가 쿨쿨 자는 동안 준비한 게 있었다.
우리 둘이서만.
단둘이서 이 보스 몬스터를 레이 드할 방법, 그 필승법을 말이다.
* * *
똑딱, 똑딱.
시계 초침이 바쁘게 흘러…… 0을 가리키는 시점이 왔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정진문이 나타 나는 일은 없었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우릴 둘러싸고 있던 빛의 장막이 깨져나갔다. 빛의 조각들이 흩어져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 아름다운 장 면이지만, 감탄할 새는 없었다.
"드디어 끝났구나."
놈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 이다.
퍼드득! 박쥐들이 날아들었다. 나 와 이운우 둘 다 따지자면 원거리 딜러기 때문에 우리와 저 녀석의 상성도 얼핏 나빠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만도 않다.
'나는 근거리 딜러 역할도 수행할
수 있고, 이운우는 광역딜에 가깝 다!'
온전한 원거리 딜러는 아니기 때 문에, 이런 플레이가 가능한 것이었 다.
슈욱!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허공에 두 둥실, 부유하는 감각이 들었다. 물 론 순전히 내 감각이고, 나는 허공 에 잠시 머무르다 추락할 뿐이지만.
"어리석은 짓을 하는구나!"
놈을 향해 직행으로 떨어진다.
화르륵, 불길이 놈의 손아귀에 맺
히지만. 우리가 더 빨랐다.
파지직!
"으윽……! 이…… 무슨! 자살행위 를!"
이운우의 낙뢰가 놈에게 내리꽂힌 다. 마법은 강제로 중단되고, 박쥐 들을 건너 내게도 번개가 그 영향 을 미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늑한 바람!'
내게 그 대미지는 닿지 않았다.
무게로 마비된 박쥐들을 뚫어내자, 드디어 놈의 정수리가 보였다.
훌륭한 연계였다. 이운우와는 여러
번 합을 맞춰봐서 그렇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스킬 합이 잘 맞았다.
'아군까지 공격하기 때문에 제 실 력을 발휘 못 하는 이운우에게, 대 미지를 무시하는 내 스킬은 최고의 조합이지!'
그 결과가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무방비한 녀석의 머리 위가!
' 받아라……
허리춤에서 성수를 꺼내들었다. 이 대로 뿌리기만 하면!
퍼드득!
"끝났다고 생각했나?"
놈의 목소리가 작게 속살거렸다. 소름이 돋았다.
박쥐가, 놈의 발밑 그림자에서 쏟 아지듯이 튀어나왔다. 성수를 꺼내 기도 전에 내 면전을 향해 날아오 르는 그것들 때문에. 팔을 교차하고 얼굴을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실패다!
팟!
"쥐새끼처럼 재빠르구나. 도망치는 실력만큼은 일품이라고 해두마."
공간 간섭으로 빠져나가자 놈이 나른한 목소리로 비꼰다. 처음부터성공할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하루 6번이 최대인 특수 탄환을 사용해서 실패한 것은 꽤나 뼈아프다.
"플랜B? C?"
"C 로."
이운우의 물음에 재빨리 판단을 내렸다.
그도 다른 말 덧붙이지 않고 수긍 한다.
"장비는?"
"완벽해."
그렇다면 됐다.
"그럼 바로……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콰득!
박쥐들이 모여 커다란 손의 모형 을 만들어냈다.
곧바로 날아와 이운우를 낚아챈다.
손을 뻗었으나 로브 자락 끄트머 리만 스쳤다.
"아……
미약한 탄성만이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계속해서 원거리를 유지하던 놈이
기에, 이렇게 가까이 접근할 줄은 몰랐다!
후회는 언제나 뒤늦을 뿐이다.
"이운우!"
"윽……. 오지 마!"
뱀파이어가 보란 듯이 이운우의 목덜미를 잡아들었다. 놈이 번뜩이 는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