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어쌔신 길드답게 날렵한 몸놀림이 었다. 게다가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 었다곤 해도, 내 몸에 손대기 전까 지 기척도 느끼지 못하다니…….
'아직도 많이 부족해.'
정찰 전문 길드이니 어쩌면 당연 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어쌔신들의 은신 스킬은 고위 랭커들도 제대로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민서윤은 거리가 좀 벌어지자 날 내려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게이트 클리어 가 선언됐다.
[알림: 보스 몬스터 '붉은안개거 미'가 죽었습니다!]
[알림: 게이트가 클리어되었습니 다.]
보스 몬스터의 이름이 비로소 밝 혀졌다. 붉은 안개까지 이 녀석 서식지의 특징이었던 모양이다.
[기여도를 측정합니다.]
[기여도가 4,612입니다.]
[축하드립니다. 기여도 공동 1순위 를 달성하셨습니다!]
[기여도에 따라 아이템이 배분됩니 다.]
나와 혜원 언니가 공동 1등이었다. 거미를 상대로 단둘이서 시간을 끈 것이 높은 점수를 딴 모양이었다. 막타만 친 이형우는 2등을 한 모양이고.
게이트에서 빠져나와 현실과 마주 했다. 시야를 답답하게 하던 붉은 안개가 사라지자 한결 편안했다.
그러나 한숨 돌릴 시간도 없었다. 나머지 생존자들을 파악하는 게 급 선무였다. 고치를 뜯어내고 확인하 는 작업은 오랜 시간 지속됐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명철아! 흡, 흐윽……
하나하나, 열 때마다 희비가 교차 했다. 시신이 든 고치를 풀어내면 그보다 더한 비극이 없었다.
나 역시 고치 안에서 죽은 김태병 이 나올까 봐 조마조마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김 태병은 보이지 않았다.
끝끝내 마지막 고치를 열었을 때, 나는 짧게 깎은 머리카락에 강인한 인상을 주는 턱을 가진 남자를 발 견할 수 있었다. 상처가 살짝 나있 긴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 김태 병의 모습이었다.
'숨은?'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다행히 숨 결이 느껴졌다.
'살아있다.'
그 판단이 들자 절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휘청이는 나를 누군가 붙잡았다. 후, 피로한 몸이 다시 균형을 잡지 못하고 기대고 만다. 고맙다고 인사 하려는데 얼굴이 낯이 익었다.
날카로운 인상에, 이제는 금이 가 지 않은 멀쩡한 안경을 쓰고 있는 사내였다.
"……설민준?"
"기억하네."
처음 봤을 땐 책만 들여다봤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나이트워커의 옷을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제법 헌터의 태가 났다.
-우리 둘, 쌍둥이들 그리고 설민 준은 헌터 지망으로 바꿨어. 찬송이 는 가업을 잇는다는 것 같고. 사실 찬송이는 연락이 잘 안 되네.
연수원에서 다정 언니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헌터 지망으로 바꿨다더니, 나이트 워커에 들어가 있었단 말인가? 물 론 처음부터 민첩 특화에 고유 스 킬도 정찰이었으니 레인저나 어쌔 신으로 전직하면 괜찮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헌터처럼 성장해서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보네. 다행히 김태병도 멀쩡한 것 같고."
그 역시 나처럼 김태병이 실종되 었다는 소식을 듣고 참가한 것 같 았다. 둘이 그래도 꾸준히 연락한 모양이지.
나는 설민준에게서 떨어졌다. 의외 의 인물을 너무 뜻밖의 장소에서 만났다.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 니다. 생존자들의 신원 파악이 모두 끝났습니다."
이형우가 큰 소리로 외쳤다. 무어 라 말하려다 말고 그쪽을 바라봤다.
"투입 인원 총 30명. 귀환 인원 은…… 11명입니다."
절반도 안 되는 생환율이다. 그 안 에 김태병이 속해 있는 건 그야말 로…… 운이 좋았다.
간단하게 보고하는 이형우의 낯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11명의 목숨을 살린 건 모두 여 러분들 덕분입니다.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그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존
중의 의미로 우리도 묵례를 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이형우의 등 뒤로 노을이 지고, 역 광으로 그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만 해산하도록 하겠습니다."
혼들림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찝찝한 점이 있었다. 혜원 언니가 내게 오늘 수 고했다며 돌아가자고 했지만 생각 에 잠겨 제대로 반응할 수 없었다.
'분명 그 거미는…… 아껴 먹느라 배가 고프다고 했어.'
그래서 느닷없이 싸우는 도중에
고치 하나를 뜯어먹지 않았던가. 싸 울 때도 뭔가 위화감을 느꼈었다. 아무래도 산수가 이상하지 않은가.
'30명 중 10명을 잡아먹고 20명만 고치에 보관해 두었다면…… 아껴 먹었다고 말할 수 있나?'
물론 신종 몬스터이니 먹이 습성 은 좀 더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겠 지만. 으레 이렇게 먹이를 보관하는 방법을 갖고 있는 몬스터들은 한 번에 많이 못 먹는 특징을 가진 경 우가 많았다.
'게다가 제법 지능이 높아 보였어. 산수를 못할 수준은 아니야.'
뭔가 이상하다.
* * *
"생각보다 일찍 불렀네요."
백목련이 살짝 웃었다. 나도 할 말 이 없었다. 다시 볼 일 없으면 좋 겠다고 생각하면서 명함을 챙겼는 데,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이렇 게 연락할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언젠가 나를 부를 거라 생각하긴 했죠.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질 순 없는 노릇이니까."
내 행동이 예측범위 안이란 건 꽤 나 소름 돋는 일이다.
"그래서. 어떤 정보를 갖고 오셨 죠?"
아주 정보원 취급이다. 하지만 미 심쩍은 부분이 생겼고, 나는 정부의 데이터에 접근할 수 없으니 선택권 은 없다. 커피 한 모금 마시고 본 론을 꺼냈다.
"게이트에서 실종되는 헌터들이 얼마나 되죠?"
내 질문에 백목련은 잠시 생각을 하는 것처럼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게이트 안에서 사망 헌터와 실종 헌터는 구분하기 쉽지 않아요. 그래 서 통계적으로 '실종 헌터'만을 따 지는 건 유의미하지 못하죠. 보통은 묶어서 취급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요. 어차피 게이트 안에서 실종되면 죽은 거라 생각하거든요. 시체는 몬 스터가 먹어서 없는 걸 테고."
그게 일반론이다.
암묵적으로 '실종 헌터'는 '사망 헌터'와 동의어인 것이다.
만약 죽지 않았으면 게이트가 클 리어됨과 동시에 어떻게든 모습이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정말 '실종 헌터'만 구분할 방법 은 없는 건가요?"
"……어디서 정보가 샜나?"
" 네'?"
백목련이 쯧, 혀를 찼다.
"아무래도 보안에 더 신경 써야겠 네요. 어디서 주워들은 거죠?"
" 네?"
다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실종 헌터에 대한 데이터. 최근에 야 주목하기 시작한 분야인데…… 그걸 정말 우연히 알았다고요?"
"실험소에서 그런 연구를 진행하 는 줄은 몰랐는데요."
이번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천 재 언어학자설 이후로 나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치는지 백목련은 여전히 매서운 눈매를 하고 있었다. 노려봐도 진짜인데.
"흠……. 그럼 갑자기 실종 헌터에 대해서 물어본 이유는 뭔가요?"
"최근에 게이트에 다녀왔는데, 좀 이상한 걸 발견했거든요."
"어떤 점이요?"
"정확한 숫자를 말하긴 어렵지만,
10명도 안 되는 소규모 인원이 발 견되지 않았어요. 마치…… 사라진 것처럼요."
"이미 몬스터에게 먹힌 게 아닐까 요?"
"그럴지도 모르죠."
30명 중 20명은 발견됐다. 살아서, 혹은 시체로. 남은 10명 중 몇 명 이나 그 거미에게 먹혔고 몇 명이 나 사라진 걸까? 이 점은 나도 확 신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10명 다 그냥 거미에게 잡아먹혔는지도 몰 랐다.
'하지만 이게 이 게이트에서만 일
어난 게 아니라면. 어떠한 경향성을 띠고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의심이 아니게 된다.
백목련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인가 보네요. 이번엔."
당연하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최근에야 인식하기 시작 했는데…… 한서하 씨 말대로예요. 한 자리 숫자 정도로 아주 적은 수 라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 리고 사망 헌터와 실종 헌터를 분 류하려고 시도한 지 얼마 되지 않 아 얼마나 오래된 일인지도 아직 가늠하기 어렵지만……. 그런 시도
가 있다고 파악하고 있어요."
목소리를 낮춰 작게 속삭인다.
"'헌터 납치' 말이에요."
그야말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헌터를 납치한단 말인가? 헌터의 가족을 납치해 금품을 갈취하는 건 봤어도, 강화된 인간인 헌터를 납치하려는 간 큰 놈들은 없었다. 지금까지는.
"아직 정확한 실정을 파악하지도 못했고, 막연히 추측만 할 뿐이에 요. 앞으로 다른 게이트에서도 비슷 한 사례들이 생겨나는지 조사할 예 정이고요."
"얼마나 오래된 걸로 추측합니 까?"
"글쎄요. 처음부터 헌터를 여럿 빼 갔을 리는 없으니. 한두 명 빼간 정도는 우리도 파악할 수 없어서 명확히 측정하긴 어려워요. 다 만…… 그래요. 그때부터라고 할 수 있겠네요."
톡톡, 백목련이 손가락으로 테이블 을 두드렸다.
"연화도 게이트 이후부터."
나는, 어디까지 바꿔버린 걸까.
"그 이후부터 갑작스럽게 숫자가
늘었어요. 통계적으로 잡히기 시작 할 정도로요."
걷잡을 수 없이 흐르기 시작한 새 로운 전개가 나를 옥죄고 있었다.
연화도 게이트는 나의 개입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러니 그 이 후부터 시작됐다는 헌터 납치 역 시…… 나 때문에 발생한 사건일 수도 있겠지.
'회귀 전에 이런 사건이 있었던가? 내가 모르고 지나갔던 건 아닐까?'
알 수 없다. 정부 차원에서 조용히 처리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러모로 미심쩍은 부분
이 많지만…… 지금은 고양이 손이 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니 어쩔 수 없네요."
백목련이 거만하게 턱을 치켜 올 렸다.
"나랑 협력하죠."
뜻밖의 제안이었다. 이제까지 나눈 이야기를 생각하면 지금 제안하는 협력은 아마…….
"안타깝게도 난 헌터가 아니라 연 구자라서요. 게이트 안에서 벌어지 는 일들은 잘 몰라요. 통계 자료도 한계가 있고. 당신이 내 눈이 되어 줬으면 해요."
"......그건......
다소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나는 내가 어느 게이트에 갔는지 그다지 밝히고 싶지 않으니까.
"맨입으로 받기만 하겠단 건 아니 에요. 당신이 한 건 가져올 때마다, 나 역시 내가 연구한 결과들을 공 유하도록 하죠. 나는 정부의 데이터 에 손댈 수 있고, 당신은 게이트 안에서 벌어진 날것의 데이터를 얻 을 수 있으니 상부상조네요. 어때 요?"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 덕였다.
이 사건에 대해서 더 알아볼 필요 가 있었다. 정부 측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조사가 훨씬 빨라질 것 이다. 만약 원치 않은 내용이면 제 공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
"좋아요. 협력하도록 하죠."
"앞으로 잘 부탁해요, 한서하 씨."
우리는 손을 맞잡았다.
일반인은 모두 부드러운 손을 지 니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은 내 착각이었나 보다. 백목련의 중지에 는 펜을 잡아 생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치열한 삶의 흔적이었다.
-임천훈 국회의원이 '친헌터주의 를 표방하는 현 정책은 비헌터인 수많은 국민들을 외면하는 꼴'이라 며 현 정권을 비판했습니다. 반헌터 주의가 현대사회의 논쟁거리로 떠 오르고 있는 가운데, 해당 발언이 큰 호응을 얻고 있는데요.
저녁을 먹으며 뉴스를 보는데, 제
법 흥미로운 주제가 나왔다. 이어서 TV 화면은 임천훈 의원이 나와 의 견을 표명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정 치계의 거물인 그가 기자들의 질문 세례를 받으며 선별적으로 답변하 고 있었다.
-마력석을 이용한 마력발전기가 현대 사회의 주 에너지공급원인 가 운데, 마력석이 헌터들의 독점 전유 물인 것부터 시작하여…… 현 정권 이 친헌터주의 정책으로 당장의 문 제를 막는 데 급급한 미봉책을 남 발하고 있습니다. 헌터는 부정할 수 없는 기득권충으로 비헌터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그런데. 열변을 토하는 임천훈 의 원 뒤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검은 머리에 단정한 얼굴. 순하게 내려간 눈매에 서글서글한 인상이 눈에 띄는 사내였다.
'권성민?'
그가 왜 임천훈과 함께 있단 말인 가?
'물론 정치 쪽으로 나간다곤 들었 지만……
이렇게 TV에서 볼 줄은 몰랐다.
그는 임천훈의 수행원처럼 뒤에서 따라가고 있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현 정권의 친헌 터주의를 비판하면서 뒤에 데리고 다니는 건 각성자라……. 물론 모든 각성자가 헌터인 것은 아니지만, 권 성민은 일반인보단 헌터에 가까운 각성자일 텐데.
-이러한 실정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해…… 강력하게 호 소하는 바입니다! 비헌터인 다른 국민들의 이권을 무시하고 기득권 만 챙기는 듯한 현 정권의 반성을촉구하며
임천훈이 뭐라 뭐라 하는 말은 제 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그 뒤에서 침착한 얼굴을 하고 서 있는 권성 민만 보였다.
그는 깔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 는데 그게 무척 새로웠다. 각성자라 는 게 겉으로 티가 나는 건 아니지 만. 그는 유난히 일반인처럼 보였 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비헌터'처 럼.
"왜 이런 걸 보고 있어?"
"아……. 그냥 보이길래요."
혜원 언니가 저런 건 신경 쓰지 말라며 말을 얹었다.
"다 정치적인 수작이지. 정작 저 사람들 중에서 진짜로 비헌터의 권 리를 위해서 나서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하여튼. 만만한 게 헌터지. 지금이야 시스템이 갖춰졌으니 좀 살 만하겠지만 몇 세대 전만 해도 사망하는 헌터들이 생존하는 헌터 들보다 많았는데……
투덜투덜 중얼거리는 어조에 감정 이 실려 있었다. 2.5세대 헌터인 언 니는 나보다 더 정돈되지 않은 사 회의 모습을 많이 봐왔을 것이다.
"1세대 때 아무도 헌터 안 하려는 거 다 같이 죽을 순 없으니까 온갖 혜택 준다고 감언이설로 꾀더 니…… 이제 와서 말 싹 바꾸는 거 봐!"
그야…… 헌터가 부산물팔이로 잘 먹고 잘사는 건 사실이지만. 16살 이 되면 국가의 지원으로 헌터 적 성검사를 받을 수 있는 요즘, '각성 자'가 아닌 정말 순수 '일반인'은 그 비중이 높지 않다. 대부분 혹시 나 하는 마음으로 복권을 긁어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좋아 보이면 자기들이 하 면 될 텐데. 죽기는 싫고 돈은 많
이 벌고 싶다, 뭐 그런 거야?"
한편 TV 안에서는 임천훈 의원이 기득권층인 헌터를 지탄하는 발언 이 거세지고 있었다. 옆에서 그런 임천훈 의원을 욕하는 혜원 언니의 언성도 함께 높아지고 있었고.
그 가운데서도 나는 권성민에게 주목했다.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함께 동고동락했던 동료들이 헌터 를 꿈꾸고, 실제로 헌터가 됐다는 사실을 당신도 알 텐데. 반헌터주의 를 외치는 정치계 거물 뒤에 서서 침착한 얼굴로.
그 멀끔한 차림새를 하고서, 속으 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 맞다. 정작 본론을 까먹고 있 었네."
"왜요?"
혜원 언니가 TV를 끄며 말을 이 었다.
"청사에서 연락이 왔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