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화
"천천히 진입할 거야. 연락이 끊긴 이유가 있을 거야. 보스 몬스터를 마주할 가능성이 높아."
혜원 언니가 작게 경고했다. 나 역 시 생각하고 있던 바였다.
소리 죽인 발걸음이 작게 울려 퍼 졌다. 여전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감각에 의지해 걸음을 옮겼다.
툭툭.
혜원 언니가 손으로 날 톡톡 치고 는 천장을 가리켰다. 천장?
이윽고 내 눈에도 들어왔다.
고치였다. 붉은색 실에 칭칭 감겨 서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사람들.
사람이 맞는 걸까? 처음 보았을 때는 종유석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실로 감겨 있었다. 죽었을까? 질식사한 걸까. 아니면 이미 죽은 걸 보관하기 위 해 걸어둔 걸까.
혜원 언니가 개중 하나를 도려내 바닥에 내려놨다.
촤악!
굳은 고치를 칼날로 겨우 갈랐다. 안에 들어있는 사람은 잠에 든 것 처럼 평온해 보였다.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대니 아직 숨 쉬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긴 거대한 냉장고였다. 아직 다 먹지 않은 먹이를 썩지 않 게 보관하기 위해 만든 곳. 그 말 은..
-쉬식, 쉬쉬쉭.
놈이 이곳에 돌아온다는 뜻이다!
나와 혜원 언니는 재빨리 벽 틈새 에 숨었다.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통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뒤덮인 색감에, 8개의 다리가 천장을 꽉 부여잡고 있었다. 거미 같은 모습이 지만 머리 부분은 사람처럼 생겼다.
다리들이 스치면서 쉭쉭, 쉬쉭, 기 이한 소리를 냈다.
숨소리도 죽이고 가만히 지켜보았 다. 여기서 들키면 우리도 저 꼴이 날 수 있었다.
-어디 보자……. 응?
우리가 아까 떼어놓은 고치를 보 고 주위를 맴돌며 중얼중얼 말을하기 시작했다. 보스 몬스터라 그런 가, 지능이 상당히 높아 보였다.
-이게 왜 떨어져있지……. 웅? 이 게 왜 떨어져있을까……웅? 웅?
소름이 쫙 끼쳤다.
-쥐새끼……쥐새끼가 숨어들었 어……응? 어디에? ……이상하 다……. 왜 하나만 풀어봤을까…… 응?
차근차근 논리적인 접근을 통해, 하나의 결과에 도달해낸다.
-아……. 이 근처에 숨었구나…… 응? 그런 거구나...
키득키득 작게 웃는 소리가 났다.
-나 온다고…… 급하게 숨었구 나……응? 그치?
손아귀에 땀이 고일 지경이었다. 언니와 나는 눈도 제대로 깜빡이지 못한 채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놈이 우리를 찾기 위해 그 거구를 이끌고 여기 저기 훑어보는 것이 느껴졌다.
어떡해야 하지? 이대로 숨어있으 면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나가서 싸워야 했다. 노이트를 쥐 자 혜원 언니도 내 뜻을 알았는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셋 하면 나가서..
-찾았다……웅?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바로 옆에 놈이 있었다. 미묘하게 인간을 닮은 얼굴이 들이밀어졌다.
-찾았다……찾았다, 찾았다, 찾았 다……!
거미 다리 하나가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려고 갖은 애를 쓴다. 벽이 무너질 일은 없겠으나, 이대로 계속 대치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틈이 깊지 않아서 놈의 다리가 내게 닿기 직전이었다.
탕!
-키에에엑! 아파.. 아파...
총으로 맞히자 다리를 황급히 빼 낸다. 덕분에 좀 살 것 같았다. 어 떡하지? 이 안은 사람 한 명은 몰 라도 둘이 숨기엔 비좁다. 나가야 한다면…… 공간 간섭이 있는 내가 나가는 게 맞았다.
언니랑 나 둘 다 딜러에 가깝다. 거리 유지에 실패하면 그대로 끝장 일 수 있었다. 아니면 남은 방법은 이대로 도망쳐 사람들이 몰린 곳까 지 가는 건데…… 안 된다. 더 많은 희생자가 생길 수도 있었다.
"언니. 제가 어그로를 끌게요."
"뭐? 안 돼. 너무 위험해. 내가 나 가서……
"제가 나아요! 저놈은 천장을 기어 다니니까, 언니 스킬은 금방 붙잡힐 거예요."
공중 부양은 벽을 타고 움직일 수 있는 존재가 있으면 그 활용도가 극히 제한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엔 공중부양보다 그냥 뛰어 다니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내 말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는 걸 알았는지, 언니도 낯을 굳히고 알겠다고 답했다.
-아파…… 배고파……. 아껴먹느 라……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 응? 왜 나 아프게 해?
놈이 좀 정신을 차렸는지 다시 들 어오려 하고 있었다. 그사이에 빠르 게 언니와 자리를 바꿨다.
조용히 숨어있는 척하다가, 눈치를 봐서…….
탓!
천장으로 몸을 날려 고치 위에 착 지 했다.
놈은 아직 혜원 언니에게 정신이
팔려있었다. 탕! 가볍게 견제 사격 을 하자 얼굴이 홱 돌아 나를 응시 했다.
-배고파…… 배고파……. 웅? 한 입만…… 먹게 해줘……응?
인간과 닮은 얼굴에서 침이 질질 흘렀다. 침이 녹색이다. 누가 봐도 독성분이 넉넉하게 들어있을 것같 이 생겼다. 물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겠다.
놈이 빠른 속도로 내 쪽을 향해 기어왔다. 사사사삭, 8개의 다리가 바삐 움직이며 소리를 냈다. 탕, 탕! 총을 쏘면서 고치들 사이를 점프해 움직였다. 움직이면서 시야에 들어오는 고치들이 몇 개인지 세어 본다.
'20개. 투입된 인원은 30명이라 했 는데……
생각을 더 이어가기도 전에, 사악!
놈이 실을 뿜어냈다. 내 팔뚝에 칭 칭 감기더니 제 쪽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서둘러 노이트 대신 단검 을 쥐고 베어내려 했지만 쉽게 잘 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공간 간섭'
스킬을 발동하고, 도리어 거리를 좁혀 놈의 등 뒤에 착지했다. 워낙거구인지라 충분히 발판으로 삼을 수 있었다.
- 키에에에엑!
놈이 잔뜩 흥분해서 괴성을 지른 다. 다리로 어떻게든 날 붙잡으려 하지만, 그 관절로 등 뒤까지 다리 가 닿을 리가 없다. 결국엔 온몸을 흔들며 날 떨구려고 날뛰었다.
콰직!
도리어 단검을 박아 넣고 버텼다.
"혜원 언니!"
"오케이!"
혜원 언니에게 신호하자, 틈새에서
튀어나오며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촤악! 혼란에 빠진 놈의 다리 하나 를 베어내는 데 성공했다.
-아파아아아!
그러나 아직 7개의 다리가 더 남 아있었다. 놈은 타깃을 혜원 언니로 돌려 실을 내뿜으려는 것처럼 자세 를 취한다. 어림도 없지.
탕!
등에서 점프하며 허공을 빙글 돌 았다. 놈의 머리 위에서 거꾸로 눈 이 마주친다. 팔에 감긴 실타래를 끌어당기자 놈의 얼굴이 팽팽하게 고정된다.
낌새를 눈치챘는지 실타래가 순식 간에 끊어졌다. 자유자재로 끊어낼 수 있는가 보지? 하지만 때는 늦었 다. 탕!
총알이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놈 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완전히 피하진 못했다. 얼굴의 절반이 짓뭉 개졌다.
-키에에에엑! 아……. 아파...... 아 파! 아파! 배고파! 아파!
나는 다시 스킬을 이용해 천장에 달리 고치로 이동했다. 그런데 놈이 나나 혜원 언니를 잡으려고 들지 않고, 천장에 달린 고치 하나를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죽어있어.'
그 안에 든 것은 누가 봐도 시신 이었다. 피부에 핏기가 없고 시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굳은 관절은 죽 은 사람 특유의 뻣뻣함이 역력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섞여 있는 건가?'
콰직, 콰드득!
'그렇다면 생존자는 더 줄어든다. 20명 미만……
절망적인 생존율이었다.
놈은 머리를 처박고 시체를 파먹
기 시작했다. 배고프다고 염불을 외 더니, 기어코 식사를 하셔야겠다 이 건가? 고치 위에 앉아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구역질이 날 것 같았 다.
"여기는 역천, 여기는 역천! 훕…… 보스 몬스터와 교전 중! 생존자도 여기에 있습니다!"
- 어딥니까!
"아까 말한 곳!"
-길이 달라져서 가는 데 시간이 다소 걸릴 것 같습니다. 버틸 수 있습니까?
혜원 언니가 그사이에 무전에 대
고 상황을 보고했다. 이형우가 버틸 수 있냐고 물었다. 버틸 수 있냐 고? 내가 올라타 있는 고치 안에도 사람이 들어있을 것을 생각하니 어 쩐지 속이 메스꺼웠다.
그래도 별수 없다. 버티는 수밖에.
탕!
식사 시간을 보장해줄 필요는 없 다. 놈이 먹이를 먹는 틈은 동시에 가장 방심한 때이기도 하니까. 멈춰 있는 사이에 총알을 잘 겨눠 쏘았 다.
-히히…… 다 봤어……응?
하지만 피해낸다. 거구인 주제에
제법 빠르다.
다만 놈이 생각하지 못한 건, 우리 가 둘이라는 거다. 내 역할은 어그 로고!
내 공격을 피하느라 시간을 허비 한 놈은 이어지는 공격을 피하진 못했다.
촤악!
-키에에에에엑! 아, 아, 아파아!
혜원 언니의 검에 다리 하나가 또 잘렸다. 앞쪽과 뒤쪽 다리가 하나씩 잘리니, 제대로 균형을 잡기 어려운 지 뒤뚱거렸다. 기동성은 이제 우리 가 우위다.
그 말인즉, 딜러인 우리가 날뛰기 딱 좋은 상황이라는 거다!
'수적으로 열세라서 그렇지 애초에 이 던전은 클리어 등급이 높은 편 이 아니니까!'
혜원 언니와 짧게 시선을 교환한 뒤, 우리는 놈에게 집중 공격을 가 하기 시작했다. 딜러 둘이서 보스 레이드라. 조합이 최악이지만 어떻 게든 해내고 있었다.
슉!
놈이 실을 뿜어 혜원 언니를 붙잡 았다.
"혜원 언니!"
"윽……. 안 끊겨!"
직접 뿜는 실타래는 성분이 다른 지, 고치들과 달리 칼로 쑤셔도 뚫 리지가 않았다. 혜원 언니가 레이피 어로 썰어 내려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히히..히히 히!
놈이 소름끼치는 소릴 냈다. 실을 잡아당기면서 서서히 언니를 자신 쪽으로 끌고 온다. 낚시라도 하는 것처럼 힘 조절을 능숙하게 해내고 있었다.
"이래도 네가 안 끊고 버틸 수 있 을까?"
뒤편에 서서 놈의 다리 한쪽을 또 겨눴다. 탕, 놈의 살점과 핏물이 흩 날렸다. 이제 다리는 다섯 개 남았 다. 맨 뒤편 다리는 두 개 다 잘려 꼬리부분이 바닥에 끌리는 수준이 었다.
"으윽!"
그런데도 대체 무슨 집착인지 혜 원 언니를 놓지 않고 있었다.
"놔……놔! 아악!"
"잠시만 기다려요! 아예 죽여 버리
면……
차라리 등 뒤에 올라타서 총을 쓰 려 했다. 머리를 으깨버리면 되겠 지, 그런 생각으로.
그런데, 마나를 끌어올리려니 내장 을 헤집는 것 같은 고통이 뒤따랐 다.
'마나가 부족해!'
절망할 시간도 없었다. 직접 뛰어 가야 했다.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멀었다. 다리 근육 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통증이 울 렸다. 학대받은 장딴지가 성내듯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래도 달려야했다.
" 잠깐……
조금만, 더!
그 순간. 손을 뻗어 혜원 언니에게 닿기 직전, 뭔가가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게 뭔지 인식하기도 전에 내 몸 이 붕 뜨는 게 느껴졌다.
다시 눈을 깜빡했을 때, 나는 누군 가 내 허리춤을 껴안고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음을 인식했다.
"혜원 언니!"
잠깐 아래를 바라봤던 시선을 정
면으로 돌리자, 다행히 멀쩡한 혜원 언니가 보였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 을 뻔했다.
혜원 언니를 구하고 거미와 검을 맞대는 검사가 보였다. 거리가 멀지 만 분명 이형우였다.
다행이다. 살았다.
"괜찮니?"
"네, 괜찮습니다."
그제서야 날 들고 있는 사람이 누 구인지 알았다. 나이트워커의 길드 장, 민서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