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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시작이 게이트라곤 안 했잖아요-53화 (53/361)

53화

어차피 별 의미가 없는 행위일 것 을 알고 한 도발이었다. 그런데, 총 알이 허공을 뚫고 뒤편에 박힐 줄 알았는데 이번엔 달랐다.

사르륵-

레태흐태드의 형상이 무너지듯이 허물어지더니, 그 공간을 꿈반딧불 이가 채웠다. 수백, 수천 마리의 꿈반딧불이가 내 눈앞에 닥쳐왔다.

단도를 휘둘러보지만 크게 효과는 없었다. 벌써 두어 마리가 팔에 붙 어 오는 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한계인 몸뚱어리가 금방 쓰러지려 했다.

'쏟아지는 불꽃!'

탕, 허공을 향해 총을 쏘자 곧바로 총알비가 내 주변을 휩쓸었다. 꿈반 딧불이들은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 하고 파삭, 하고 가루가 됐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건가.'

원래 이게 맞는 포지션이긴 하다. 서로 죽일 듯이 물어뜯고 싸우는 게 게이트 보스와 헌터 사이 아니 겠는가.

꿈반딧불이를 작살내고 빠르게 주 변을 훑었으나 뒤이어 오는 공격은 없었다. 침묵만이 주변을 감돌았다.

"난 말이야."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탕, 총을 쏴보지만 그곳엔 이미 아무도 없었 다.

"이런 공간에선 거의 무적이나 다 름없거든."

다시 귓가에서 재잘거린다. 입김이 스치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고개 를 돌렸으나 이번에도 허탕이었다.

"꿈과 환상 속에서 사는 존재잖 아? 마녀는."

웃는 얼굴이 내 바로 앞에 있었다.

총을 겨누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환상일 테니.

"그러니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서하. 네가 미칠 때까지, 지칠 때까 지, 모든 걸 포기할 때까지."

아하, 그러셔.

이제야 좀 감이 잡혔다.

제아무리 마녀라 할지라도 이렇게 까지 압도적일 순 없다. 심지어 투 사체인 상태로.

하지만 딱 한 곳, 레태흐태드가 모 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곳이 있 다. 게다가 스스로 힌트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런 공간'에선 무적이라?

"여긴 꿈속이구나."

내 말에 드디어 레태흐태드의 미 소에 금이 갔다. 그 사이로 놀라움 이 슬며시 비쳤다.

꿈과 환상의 마녀인 레태흐태드, 당신이 '이런 공간'에서 무적이라면 그야 당연히.

여긴 꿈일 수밖에.

"눈치가 좋네. 그래서? 이 꿈에서 어떻게 깨어날 건데? 어디서부터 꿈인지 구분은 가니?"

알 리가. 어디서부터 꿈이었을까. 이 게이트에 입장한 순간부터? 까 만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것도 아니면, 사실 꿈반딧불이에게 둘러 싸였을 때 깨어나지 못했을지도 모 른다.

하지만 그런 건 전혀 관계없다. 꿈 에서 깨어나는 방법은 언제나 하나 니까.

"그건 몰라도 이건 알지. 이 다음

부터는 현실이라는 거."

탕!

총구가 내 머리를 겨눴고 망설임 은 없었다.

레태흐태드의 경악어린 얼굴을 배경으로, 총성이 울렸다.

충격과 함께 눈을 떴다.

꿈에서 깨어난 직후, 어딘가 몽롱 한 감각이 남아있었다. 직전까지 있 었던 일들이 조금씩 흐려진다. 다알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뚜렷하게 남는 건 없는. 모래알을 손아귀에 쥔 것 같은 느낌.

그 가운데서 시야에 들어오는 인 물이 있었다.

보라색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쏟아 내고, 고운 비단으로 지은 옷감이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편안한 차림 이었다. 잠옷 차림으로 착각할 정도 로. 그 여자, 레태흐태드가 눈앞에 있었다. 꿈속에서 본 것과 똑같이.

"놀랐어. 설마 자기 머릴 총으로 쏠 줄이야."

아마 본 적 없는 광경이었겠지.

"네가 아니라 다른 이였다면 어디 서부터 환상이었는지,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의심하느라 한참을 고민 했을 텐데……

전청운이 들어왔다면 그랬을 거다. 그 강직한 사내는 좀 단순한 구석 이 있으니까.

"그게 꿈이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 어?"

"꿈이었잖아."

"넌 항상 확신에 차 있구나."

꿈결을 그리는 것처럼 멍한 어투 였다. 이쪽이 더 본체에 가깝겠지.

"그런 건 좀 부러워."

"할 말은 다 했나?"

"정말 냉정하네."

생긋 웃어 보이는 얼굴에 미련은 없다.

후들거리는 팔로 노이트를 들어 겨눴다. 몇 번째 방아쇠를 당기는지 모를 지경이다.

레태흐태드도 피하는 기색은 없었 다. 활짝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건 넨다.

"다시 볼 거야, 우리."

탕!

그게 마지막이었다.

[알림: 보스 몬스터 '레태흐태드' 가 죽었습니다!]

[알림: 게이트가 클리어되었습니 다.]

몹시 피곤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 렀을까?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 안에선 시간 감각이 엉망이니까.

[기여도를 측정합니다.]

[기여도가 34,108입니다.]

[축하드립니다. 기여도 1순위를 달 성하셨습니다!]

[기여도에 따라 아이템이 배분됩니 다.]

그리고 테오도르에겐 미안하게 됐 다.

'또 철야하겠네.'

3개월보다 훨씬 빨리 클리어됐으 니, 당분간 못 보려나.

* * *

"그래서 그 게이트가 일주일 만에 클리어됐는데 1등 기여도가 누군지 모른다더라."

혜원 언니가 어디선가 들은 얘기 라며 이야길 꺼냈다.

"공식 명칭은 '까만 집 게이트'라 는데... 공식 클리어팀이 들어가 기도 전에 끝나버렸으니, 그 게이트 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는 셈이 지."

"그래요? 신기한 일이네."

"간혹 있어. 컨셉인지 뭔지, 이렇 게 말없이 사라지는 헌터들."

모르는 척 반찬을 뒤적였다. 응, 그런 일이 있었구나영혼 없는 리액션을 취한다.

"그래도 연화도 게이트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비파동 게이트가 생긴 걸 보면, 게이트가 점점 발전하고 있는 것 같아. 가끔 은 그것들이 지능을 갖고 움직이는 것 같아서 소름 돋는다니까."

이 언니의 감도 소름 돋을 지경이 다. 어떻게 알았지?

게이트 연구원들이 바쁘게 밝혀내

고 있는 내용일 텐데. 자료를 넘겨 준 지 일주일 정도 지났으니 슬슬 톨룩어의 체계 정도는 잡았을 거다.

그럼 내용 분석도 시간문제일 거 고, 조만간 정부 내부에서 난리가 나겠지. 홍염과 청사 쪽에도 알려지 려나.

'그러고 보니…… 기증자 이름 적 으라고 했던가?'

원래는 청사를 통해서 자료를 보 내려 했는데, 그쪽에 연락을 넣을 시간도 없어서 얼떨결에 연구소로 가져가 대충 넘겨버렸다. 기증자 이 름이 안 적혔다고 그 신빙성을 의심받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그땐 워낙 급해서 다 듣지도 않고 나왔는데, 이름을 적으라고 한 것 같기도 하고.

'뭐…… 별일이야 있겠어?'

별일이 있었다.

"한서하 씨. 당신을 찾느라 고생 좀 했어요."

단발머리를 한 여자가 웃으며 말 했다. 검은색 똑단발에 치켜 올라간눈매가 매섭다. 고양이상에 사나운 인상이었다. 옷차림은 셔츠와 청바 지에 하얀 가운 하나를 팔에 걸치 고 있었다.

웃고 있는데 내용은 꽤 살벌했다. 힐끗, 여자가 손에 쥐고 온 파일에 담긴 것을 보니 대충 예상이 갔다.

'섞여 들어갔구나. 내가 해석한 페 이지가……

아무리 정신이 없었어도 그렇지. 이런 치명적인 실수를 하면 어떡한 단 말인가…….

"게이트 연구소에서 부소장을 맡 고 있는 백목련이라고 해요."

"한서하입니다. 헌터고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탁, 테이블 위로 자료를 내려놓는 다. 누가 봐도 내가 쓴 자필 해석 본이었다. 하필 섞여 들어가도 저 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냥 우연히 던전에서 구한 자료인 척하 려고 했는데 죄다 꼬여버렸다.

"이 해석, 당신이 한 거죠?"

"아닌데요."

할 수 있는 건 이제 발뺌뿐이다.

백목련이 눈썹을 살짝 일그러뜨렸 다. 어디서 모르는 척하냐고 꾸짖는것 같은 얼굴이었다. 진짠데.

"CCTV로 얼굴 다 찍혔어요. 기중 자 안 적고 가면 못 찾을 줄 알았 죠? 요즘 기술 좋거든요."

"그건 제가 그때 좀 바빠서..... 숨기려는 건 아니었어요."

"당신이 가져온 직후 이 자료들은 나한테 넘어왔어요. 그 사이에 이게 끼워져 있었고요."

다시 한번 테이블 위에 놓인 자료 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아하, 나 밖에 이걸 넣을 사람이 없으시다.

"솔직하게 대답해주세요. 이건 아 주 중대한 사안이라서요. 어쩌면 인

류 전체가 마주할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고 요."

" 그게......

백목련이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톨룩어를 연 구해서 혼자 끄적여 본 게 다라고, 그렇게 변명을 할까? 싶었지만…… 역시 이럴 땐 모르는 척하는 게 상 책인 것 같다.

"저도 정말 모르겠거든요. 그게 왜 거기 들어가 있는지."

내 말에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펴고는 언제 인상을 찌푸렸냐는 듯이 평온한 얼굴을 했다.

"……그러시단 말이죠."

" 네."

"……알겠습니다. 그럼 기증자 서 명만 해주세요. 출처가 명확하지 않 은 자료는 사용에 제한이 있어서 요."

"그 정도야 가능하죠."

백목련이 내민 서류에 내 이름과 헌터 등록증 번호를 적었다. 발견 장소에 푸른 갈대 게이트를 쓰고 있는데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 다.

" 역시."

펜을 쥐고 글자를 쓰다가 슬쩍 고 래를 들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백목 련의 얼굴이 미소 한 점 없이 무표 정했다. 그림자가 드리워 살벌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당신이었어요."

백목련이 자료의 한구석을 가리킨 다. 아.

내가 방금 적은 것과 똑 닮은 글 씨체였다.

허무하게 들켰다.

"다시 인사하죠. 반가워요, 한서하

씨. 우리 할 얘기가 좀 많은 것 같 은데요?"

등골을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백 목련이 살벌하게 눈을 치켜뜨고 있 었다.

* * *

"그러니까. 당신이 천재적인 언어 학자라서 이 생판 처음 보는 언어 를 이해하고 아무 자료도 없이 해 석까지 해냈다?"

이렇게 요약하니 내 변명이 아주

형편없었단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더 할 말은 없었다. 내가 회귀하기 전에 톨룩 놈들하고 싸운 전적이 좀 길어서 귀동냥으로 들은 것이 이렇게 됐다고 말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천재인 척하는 것도 찔리지만 별수 없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거짓말을 정말 못하네요."

단번에 간파해낸다. 무섭네.

백목련은 그 날카로운 눈빛으로 날 응시하더니 휴, 한숨을 내뱉었 다.

"뭘 숨기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말 해줄 생각이 없다는 건 알겠어요."

정답이다. 여기서 아무리 캐물어도 회귀 전에 대한 얘길 꺼내진 못할 테니. 만약 그 얘길 꺼내면 날 정 신병동에 보내려고 할 거다.

"……아무래도 좋아요. 오늘은 원 래 감사 인사를 하려고 온 거였으 니까."

"네?"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정작 백목련 은 못 들었냐는 듯한 얼굴로 다시 말해주고 있었다.

"감사 인사를 하러 왔다고요. 기중 자에 대한."

"아, 네. 별거 아닌걸요."

"별거 아니긴요. 그 자료 때문에 지금 온 학계가 난리인데. 게이트에 대한 전반적인 가설이 통째로 흔들 리고 있다고요."

그렇겠지. 톨룩의 존재가 밝혀지기 전까지 게이트에 대한 추측들은 모 두 가설에 불과했으니. 이 시기쯤에 제일 유력했던 가설이 아마 '게이 트는 다른 은하계의 행성과 연결되 어 있는 것이다'였나? 다차원, 평행 세계 이론도 성행했으니 아예 헛다리짚고 있는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용을 해석해봤으면 알겠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이 아주 위험해요."

"알고 있어요."

"그러니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 았으면 좋겠군요. 극비 사안이라서, 말하면 바로 감옥으로 끌려갈지도 몰라요."

"그거 무섭네요."

원래도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직 접 경고를 들으니 경각심이 좀 더 생겼다.

"마지막으로."

백목련이 눈을 치켜떴다. 눈동자 아래 흰자가 하얗게 보였다. 삼백 안. 거기다 왼쪽 눈가 밑에 눈물점 까지. 까칠한 미인의 요건을 고루 갖춘 사람이었다.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와요."

슥 내민 것은 명함이었다. 깔끔한 글씨체로 '국립 게이트 연구소 부 소장 백목련'이라 쓰여 있었다.

"모르는 척하고 들어줄 테니까. 정 보 출처도 굳이 묻지 않을게요. 그 게 어느 정도 유의미한 정보라면,

숨기지 말고 내게 말해요."

감이 예리한 사람이었다. 내가 뭔 가를 더 숨기고 있는 걸 눈치채고, 또 그것 때문에 다 말하지 못한 정 보가 있다는 추측도 했겠지. 그래서 이런 파격적인 제안을 한 거다. 직 통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까지 주면 서.

"연락, 기다릴게요."

또각, 또각. 검은색 하이힐이 매끈 한 자태를 뽐내며 유유히 멀어져갔 다.

독특한 색채의 사람이다.

'사무직을 본 게 오랜만이라 그런

가?'

온통 헌터들만 봐서 그런가. 내 주 변은 죄다 전투 직종이니까. 민간인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사람이 었다.

백목련이라. 회귀 전에 들은 적 있 긴 하다. 나랑 연이 깊진 않았지만, 톨룩에 대해서 오래 연구한 사람이 었지. 게이트 연구소에서 최연소 소 장 자리에 올라 한동안 떠들썩했었 다.

되도록 연락할 일이 없으면 좋겠 는데. 그 생각을 하면서 명함을 챙 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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