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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시작이 게이트라곤 안 했잖아요-50화 (50/361)

50화

성배를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결 계들이 하나둘 깨져나간다. 이윽고 높이 치솟았던 단상도 저절로 내려 오자, 성배가 내 눈높이에 맞게 섰 다. 박채은이 장갑을 끼고 조심스럽 게 유리 상자를 들어올렸다. 드디 어, 성배가 드러났다.

'게이트에선 성배를 바라보며 저녁

을 먹는 게 일상이었는데. 이렇게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구나.'

하늘 높이 치솟아 달처럼 빛났던 그때처럼.

"미리 요청하신 대로 24시간 동안 담가둔 단도들입니다."

성배 안에는 찰랑일 정도로 가득 담긴 성수와 평범한 단검 두 개가 있었다. 사전에 넣어둔 것으로, 모 두 국보관리국의 감시 하에 진행되 어 논란의 여지는 없었다.

단검을 꺼내 들어 정보를 확인했 다.

[아이템을 확인합니다.]

〈신성하고 무딘 단검〉

등급:F

공격력: 5~6 (일시적으로 특정 대 상에게 105~106의 공격력을 발휘 합니다.)

설명: 무딘 단검입니다. 베는 용도 로 쓰기엔 부적합합니다. 일시적으 로 '신성한' 칭호가 붙습니다.

평범한 설명이다.

"썩은 고기를 들여 주세요."

"허가합니다."

곧이어 부패된 고깃덩이들이 들어 왔다. 마족이나 언데드 계열 몬스터 를 가지고 실험하는 것이 제일 정 확하겠지만, 몬스터는 게이트 밖으 로 데리고 나올 수 없으니 임의로 실험할 수 있는 게 이 썩은 고기였 다.

기본적으로 신성력은 부패와 상반 된 속성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되돌 릴 순 없어도, 부패하는 것들을 찌 르면 그 살점이 회복되기는 했다.

"박채은 씨가 하나 쥐어 주세요. 홍염 분들 중 한 분이 나와도 상관

없고요."

"그렇다면 내가 해보고 싶은데."

윤강백이 먼저 나섰다. 거부할 이 유는 없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들고 찌르면 되는 건가?"

"네. 먼저 진행해주시죠."

고깃덩이에 단검이 박히자 느린 속도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고깃덩 이에 미약하게 남은 생명력이 어떻 게든 살점을 되살리고 있는 거다. 물론 그 효과는 살아있는 육신에 비하면 매우 약하다. 거의 없는 생명력을 끌어 모으는 것이니까.

살점이 회복되긴 하나 반쯤은 부 패한 상태 그대로였다. 썩은 내에 슬슬 무뎌질 지경이다.

"그럼 다음으로, 제가 사용해보 죠."

"만약 역천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것보다 더 회복력이 좋겠지. 말해 두지만 눈에 띄는 차이가 아니라면 그 효율성을 인정하기 어려워."

친절한 설명이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없었다.

성배를 가볍게 한번 쓰다듬었다. 이 아이템이, 누구의 영혼을 집어삼켰는데.

"직접 보고 말씀하시면 되겠네요."

푸욱!

두 번째 고깃덩이에 단검이 들어 갔다.

"오……

반응이 확연히 달랐다. 내 손길이 닿은 고기가 급속도로 원래 상태를 되찾고 있었다. 부패하고 탄력 없이 흘러내렸던 살점들이 원래대로 모 이고, 피가 고여 썩었던 곳은 불그 스름하게 핏기가 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갓 잡은 것처럼

보이는 고깃덩이가 눈앞에 놓여 있 었다.

'나도 이 정도로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는데.'

하긴. 김기택이 쥐었을 때는 손등 에 상처를 내는 게 고작이었던 검 이, 내가 쥐자 숨통을 끊을 정도로 강해지지 않았던가. 더 치명적인 부 위를 찌른 것도 있겠지만.

"이건…… 확실히 인정할 수밖에 없는걸."

생각보다 깔끔한 승복이었다.

"홍염 측, 역천에서 주장하는 내용 을 인정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인정합니다. 눈이 있으면 그럴 수 밖에."

하하, 웃는 얼굴에는 티끌만큼의 유감도 없었다. 신기할 정도로.

"귀한 인재를 빼앗겼네. 언제 서호 처럼 눈이 좋아진 거야?"

"원래 눈 좋았어."

"그 눈을 말하는 게 아닌 걸 알면 서."

설마 전서호를 말하는 건가?

홍염의 길드장인 윤강백이 전서호 를 친근하게 '서호'라고 부르는 건 꽤 의외였다. 두 길드는 사이가 나쁜 편인 걸로 아는데. 이운우가 운 영하는 청사라 그랬던 걸까?

"한서하, 라고 했던가."

"네. 처음 뵙습니다."

윤강백이 옆에 있던 내게도 말을 걸어왔다.

"우리의 제안을 거절한 헌터는 꽤 오랜만이지! 신선한 일이었어. 듣자 하니 서호의 스카우트도 거절했다 며?"

다시 한번 하하하하, 호탕하게 웃 는다.

"네 선택에 후회가 없길 바라마."

"걱정 감사하지만, 후회할 일은 아 마 없을 겁니다."

고작해야 길드 이름 하나 바꿔 단 다고 해서 내 가치가 달라지는 것 은 아니니까.

내 이름 앞에 홍염이나 청사가 붙 는다 한들, 역천이 붙는다 한들. 내 가 위로 올라가는 건 똑같을 테니.

"자세한 내용 증명은 차후 추가적 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정확한 일 정은 사전에 설명드릴 것이며 불참 할 경우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는 점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박채은이 일들을 마무리 짓기 시

작했다.

"홍염과 역천, 양측 모두 합의된 사안이니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해당 내용을 반영한 지분 분배가 다시 논의될 예정이오니 일정 확인 후 재판 참석에 차질 없으시길 바 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성배는 다시 유리 상자에 둘러싸였다. 차근차근 결계 가 둘리는 것을 보니 감회가 남달 랐다.

'다음에 다시 보자.'

속으로 인사하며 뒤돌아섰다.

그날 저녁 수고했다며 같이 외식

하자는 혜원 언니를 따라 고기를 먹으러 갔다. 역천 사람들 사이에 껴서, 계속 내 접시에 쌓이는 고기 들을 받아먹기 바빴다.

"우리 복덩이! 서하를~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시끌벅적한 자리 사이에서 즐겁게 노는 혜원 언니와, 그런 혜원 언니 를 바라보며 노심초사하는 조연호 를 보니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위하여!"

나도 함께 잔을 올렸다. 챙,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지구의 인류는 비교적 무르고 약 해서 쉽게 죽으며 자연치유력 또한 형편없다."

테오도르가 내가 해석하는 내용을 따라 읽었다. 손가락만 한 녀석이 쪼그려 앉아있으니 요정이나 인형 같은 모습이었지만, 이젠 익숙해서 그런지 귀찮기만 했다.

"대기엔 마력이 부족하고 이 때문

인지 마법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마법을 대신해 '과학'이란 것이 발 달했는데……

" 테오."

"왜'?"

"조용히 좀 해."

영 신경에 거슬렸다. 안 그래도 잘 알지도 못하는 톨룩어 해석에 머리 가 지끈거리는데…….

"너 갖고 놀라고 마카롱도 갖다 줬잖아."

"다 먹었느니라!"

"그걸? 전부?"

내 물음에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자기 몸통만 한 걸 세 개나 갖다 줬는데 그걸 다 먹었다고? 저 몸뚱어리에 위장은 본체 정도 사이 즈인 건가?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자기도 찔렸는지 큰소리로 변명한다.

"그, 그렇게 보지 마라! 이런 형태 의 디저트는 처음이었단 말이다! 설탕을 얼마나 많이 넣었는지 그 달콤함이 극에 달하더구나. 금보다 도 귀한 음식일 테지."

"음, 뭐 그래."

그냥 편의점에서 사 왔는데.

"그럼 사진은? 지구의 동물 72마 리 사진집도 갖다 줬잖아."

"이미 다 봤다!"

아니 벌써?

"한 번 더 봐."

"한 번 보면 다 외우는데 왜 또 봐야 한단 말이냐?"

테오도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다 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기는 천재시다 이거지.

그래 내가 졌다. 어그로에 시선을 빼앗긴 순간부터 내가 이미 진 거 겠지. 펜을 놓고 놈을 바라봤다.

"넌 할 일 없어? 어째 하루 종일 여기 있는 거 같은데."

"할 일이야 이미 다 끝냈다. 나 말 고 다른 놈들은 효율이 아주 떨어 져서 말이야! 내가 1시간이면 끝내 는 걸 하루 이틀 내리 붙잡고 있으 니. 내가 시간이 남아돌 수밖에!"

이놈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 심정 도 알 만하다. 정말 너무 얄미운데 일은 끝장나게 잘해서 뭐라 할 말 은 없고 속만 태우고 있겠군.

"그래도 너랑 있으면 심심하지 않 아서 좋다! 신기한 것들도 많고. 지 구인이 톨룩어를 공부하는 걸 내가

또 어디서 보겠어?"

그렇긴 하다. 나 말고 지구에 톨룩 어를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나도 사실 제대로 아는 건 아니다. 전쟁 통에 어깨 너머로 배웠고, 급 박하게 협상 같은 걸 할 때 써먹는 정도 실력이라서…….

'이건 얼마입니까, 는 못해도 널 죽여버리겠어, 는 말할 수 있는…… 그런 이상한 수준의 톨룩어지만.'

그래도 안다는 게 어딘가.

불친절하긴 해도 테오도르에게 슬 쩍 물어보면 해석을 알려주기도 하 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네가 톨룩어는 어떻 게 아는 거지? 이 게이트 안은 한 가지 언어가 통용되는 곳이라 전부 지구어로 해석되어 들릴 텐데……

테오도르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톨룩에 관심이 많아서."

반쯤은 맞는 말이다. 테오도르가 지구를 향해 발산하는 그런 종류의 관심이 아니라 다소 분노와 중오에 치중된 관심이지만.

"이계는 매력적인 곳이니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지! 너는 미학을 아는 지구인이구나!"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그럼 너도 톨룩에 대해서 얘기해 줘."

"톨룩에 대해서?"

속 보이는 질문이지만 할 수 있을 때 하는 게 낫다.

"너는 게이트를 총괄하는 곳에서 일한다 했잖아. 얘길 들어보면 게이 트를 만들라고 명령을 내리는 상부 가 또 있는 것 같고."

"그렇지. 상하관계라 하긴 어렵지 만."

"왜?"

"그야 내가 신분이…… 뭐, 아니 다. 내게 일은 그저 여흥에 불과한 것이라서 그렇다!"

신분이 뭐? 뒷말을 하려다 마는 것이 아주 찝찝했다.

'톨룩이 신분제 사회라는 건 알고 있어.'

물론 서로 인사를 나눌 사이는 아 니라 이들이 정확히 어떤 신분의 고하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렴풋 이 고위층의 계층화는 인식하고 있 었다.

테오도르가 개중에서 상당히 높은 신분 출신으로 추정된다는 가정은거의 기정사실처럼 퍼진 이야기였 다. 사실 황족은 아니냐는 소문이 돌 정도였으니. 노코멘트하는 테오 도르를 대신해 학자들은 그가 후작 에서 공작 정도의 귀족 남자였으리 라 추측해서 떠들어댔다.

"……그래서. 그 상부는 좀 어떤 데?"

아까보다 노골적인 캐묻기였다.

그래. 나는 연합군의 간부들에 대 해서 묻는 거다.

'벨제부브에게 간부들의 병역 비리 를 알려주고 시간이 꽤 지났어. 그 약점을 휘둘러 연합군이 좀 흔들렸

을까?'

테오도르는 내 의중을 가늠하는 것처럼 날 빤히 바라봤다.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봤다. 잠시 침묵하 던 그는 이내 해맑게 생긋 웃었다.

"알면서도 넘어가줄 수밖에 없겠 군. 내 하나뿐인 지구인 친구를 잃 을 순 없으니까 말이야!"

아무리 봐도 날 친구보단 관찰대 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입 밖 으로 그걸 내뱉진 않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수라장, 이라고 할 수 있겠지!"

"아수라장이라고?"

"그래! 우리의 상부, 그러니까 연 합군도 제대로 체계를 갖춘 진 얼 마 되지 않았으니까."

"얼마 안 됐다고……?"

게이트가 출현한 것은 100년도 넘 은 일이다. 그런데 연합군은 최근에 야 갖춰졌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 우리 쪽은 인간과 이종족 사이에 아주 깊은 감정의 골이 있 어서…… 처음에는 연합군이 아니 라 그저 인간들끼리 만든 저항군이 었다. 당장 살아날 길을 찾다 보니 이제서야 모든 종족들이 참여하고

'연합군'의 이름을 달게 됐지만."

그런 비하인드가 있었단 말인가?

'이건…… 생각보다 좋은 정보인 데.'

연합군의 인간들이 이종족과 사이 가 좋지 않다는 건 익히 아는 내용 이었다만. 이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 고? 그냥 종족 간에 이득 다툼을 하느라 사이가 갈라진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었던 거다.

'처음부터 깨진 접시를 이어 붙인 게 연합군이었던 거야.'

이미 깨진 접시를 다시 깨부수는 건 아주 약간의 의혹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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