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화
그렇지. 역천도 중견길드다. 분명 중간에 설명회도 있었다. 혜원 언니 는 오지 않는다길래 가지 않았는데.
"일주일 만에 보네! 이놈의 연수원 은 왜 면회 제도도 없대? 그동안 잘 지냈어?"
"잘 지냈죠, 저야. 언니는요?"
"나도 잘 지냈지!"
혜원 언니가 등장하자 한충 목소 리들이 줄어들었다. 역천과 친해 보 이니, 역천보다 힘이 약한 길드들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른 헌터들을 회유하러 가는 것이 보였다. 덕분에 좀 살 것 같았다.
"역천의 길드장님 아니십니까. 오 랜만은 아니지만, 여기서 뵙는군 요."
김기택이 등장하자 그 남은 사람 들도 나가떨어졌다. 홍염에 대적할 수 있는 길드는 청사 정도뿐이니.
"이게 누구야. 양심도 없고 싸가지
도 없는 홍염의 김기택 씨 아냐?"
"말씀이 너무 심하십니다. 저희는 길드장님과 척을 질 생각이 없는데 말이죠."
"그건 네 생각이고. 홍염은 양심이 있으면 지지부진 법적 공방 끌 게 아니라 퍼센티지 적당히 떼서 나눠 줘야 할 거 아냐?"
둘이 으르렁거린다. 둘 사이에 불 꽃이 튀는 것처럼 아주 열기가 뜨 겁다.
'아직도 성배 얘기가 마무리가 안 된 것 같네.'
하긴. 무려 s급 성물 아닌가. 단
1%만으로도 그 값어치가 상상을 초월할 테니. 내 몫은 혜원 언니가 같이 따지고 있어서 나는 잘 알지 못하는 얘기였다.
'이 일도 한번 정리하긴 해야겠 어.'
보통 이렇게 중요한 아이템은 국 가 기관에서 도맡아 관리한다. 일명 국보관리국이다. 다만 이렇게 지분 이 있는 경우, 지분에 따라 국가에 서 이 국보를 빌릴 수 있는 범위가 달라진다. 기본적으로 지분이 있는 사람들 모두 국보관리국에 찾아가 성배에 접촉할 수 있지만 밖으로 가져가거나 성배의 일부인 성수를유출하는 권한 등은 별개의 문제였 다.
"설마 너희 서하한테 스카우트 제 의하러 온 건 아니겠지? 속 보인 다, 속 보여! 서하가 가진 지분까지 홍염 쪽으로 가져가려고?"
그런 생각이 없진 않는지 김기택 이 움찔했다.
"걱정 마시죠. 이미 한번 제안했다 가 거절당했으니."
"진짜? 잘했어, 서하야. 이런 놈들 하고 손잡으면 인생이 꼬인다니까."
둘 사이가 생각보다 더 나쁜 것 같다.
"차라리 청사가……. 아니, 그것도 좀……
혜원 언니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 을 지었다. 1, 2위를 다투는 길드가 홍염과 청사인데 둘 다 썩 탐탁지 않은 것 같다.
"청사도 이미 까인 지 오랩니다. 역천의 길드장님."
"그것도 잘했어! 어…… 근데 그럼 남은 게……
"안 그래도 언니한테 말하고 싶은 게 있었어요."
전부터 생각했던 것이다.
"길드교섭권을 사용할게요. 혜원 언니, 아니 표혜원 헌터. 역천의 길 드장으로서 저랑 한 가지 거래를 했으면 해요."
그 말에 내 앞에서는 드물게도 굳 은 얼굴을 했다.
생글생글 웃던 얼굴이 차갑게 굳 고 조잘조잘 떠들던 입도 닫혔다. 순식간에 냉담한 분위기가 흘렀다. 사람 표혜원이 아니라, '헌터' 표혜 원의 얼굴이다.
"난 공과 사 구분은 철저한 편인 데."
"알고 있어요. 저 역시 공적인 측
면에서 제안하고 싶은 거고요."
혜원 언니는 따라오려는 조연호를 저지하고 단둘이 방 안으로 들어갔 다. 길드 스카우터들과 연수생이 의 견을 조율하도록 제공하는 방이다. 넓진 않지만 이야기를 나눌 정도는 됐다.
"제안하고 싶다는 건 뭐야?"
말을 잘 골라야 했다. 괜한 오해를 사지 않으려면.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역천에 이름을 올리고 싶어요."
"역천에 들어오겠단 소리는 아닌
가 본데, 내 생각이 맞니?"
"네. 저는 길드의 필수 임무, 지정 게이트 클리어 같은 일을 할 수 없 어요. 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요."
내 말에 혜원 언니가 테이블을 손 가락으로 톡톡 쳤다. 생각에 잠기면 나오는 버릇이다.
"그러면 말 그대로 네 이름만 을 리고 싶다는 건데, 그게 너한테 어 떤 이득을 준다고 그래?"
"국가 단위 사업에 참여할 때 유 리하겠죠. 일개 헌터보다는 첫 시작 이 쉬울 거고요."
사실 이건 부차적인 이점이고 핵
심은 따로 있지만 말해줄 수는 없 었다.
"우리한테 오는 이득은?"
"성배의 지분, 더 높일 수 있게 도 울게요."
내가 예민한 부분을 건드렸는지 날 빤히 바라본다.
"어떻게?"
"성배의 설명에 이상한 부분이 하 나 있죠?"
"……특정 인물이 사용할 경우 더 욱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 맞아요."
"특정 인물, 그게 너라는 말을 하 고 싶은 거야?"
당연한 말이지만 아이템은 효율적 으로 쓰는 편이 이득이다. '특정 인 물'에게 더 효율적이라면, 그 인물 이나 그 인물이 속한 길드의 지분 이 더 높아지는 게 당연하다.
"정확히는 제 배역이었던 '리트'겠 지만요."
그 짧은 문장으로 설명은 충분했 다. 언니도 봤을 테니까. 내가 달리 아의 시신을 끌어안고 있었던 걸.
"……좋아. 네 제안을 이해했어. 우린 이름을 빌려주고, 넌 지분을
제공하고."
혜원 언니가 작게 웃었다.
"잘 부탁해. 한서하 헌터."
"잘 부탁해요. 길드장님."
내 이름 옆에 다시 '역천'이 붙은 날이었다.
[알림: 잠■이 해제■니 ■]
[칭호 '■■의 별'이 활성화됩니다]
[칭호 '역천의 별'이 활성화됩니다]
* * *
"네? 역천 말임까?"
수료식이 끝난 다음에야 김태병, 다정 언니와 연락이 닿았다. 둘은 내 선택에 다소 의문을 품는 것 같 지만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진 않 았다.
"저는 말했던 것처럼 '한결'로 갈 것 같슴다."
"으음……. 난 여러 곳에서 제의를 받았어……. 아직 결정을 좀 미뤄두 고 있지만."
태연한 김태병과 달리 다정 언니
는 영 고민이 많아 보였다.
"탱커 쪽으로 지망하고 있긴 한데, 내 적성에 영 안 맞는 것 같아."
커피잔 테두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다.
"여기까지 와서 좀 한심한 얘기 지? 아카데미 다닐 때는 내가 게이 트에서도 살아남았는데 뭐가 문제 야! 하고 생각했거든. 근데 시간이 좀 지나니까…… 탱커가 마냥 맞고 만 있는 직업은 아니잖아. 적당히 어그로도 끌어야 하고, 딜러랑 합도 잘 맞아야 하고. 근데 난 그런 전 투감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아."
타당한 고민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센스 좋은 탱커가 될 싹은 아니었 다.
애초에 탱커는 기피 직종이다.
흠씬 두들겨 맞아야 하고 쓰러지 면 뒤에 있는 동료들이 당한다는 생각에 심리적 부담감도 심하기 때 문이다. 무엇보다 선두에 서기 때문 에 사망률도 타 직종보다 높은 편 이다.
"그래서 제안해준 길드 쪽에도 양 해를 구하고 있어. 좀 더 오래 고 민해보고 싶거든. 계약 맺으면 최소 몇 년은 일해야 할 텐데 그만큼 할
수 있을까 싶어."
"이해함다. 저도 게이트에서 처음 방패를 들었을 때 쉽지 않았슴다."
김태병이 먼저 동의의 말을 꺼냈 다.
"전부터 얘기하고 싶었는데."
슬쩍 서두를 던졌다.
"게이트에 있을 때, 내 식칼이 곧 깨질 거 같다고 말한 적 있었지?"
"응? 그랬지. 원래는 셰프가 되고 싶어 해서…… 식칼 보는 덴 익숙 했거든."
"보통은 안 그래. 다정 언니, 탱커
가 어려울 것 같으면 혹시…… '대 장장이' 쪽은 생각해본 적 있어?"
"어?"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것처럼 눈 을 크게 뜨고 깜빡거린다.
"대장장이?"
"물론 이쪽도 만만치 않게 힘든 일일 거야. 탱커만큼은 아니어도 불 과 철을 가까이하는 직업이니 위험 할 거고."
"대장장이는 특수 직업군이잖아. 재능 있는 사람들만 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무슨 재주로 그걸 해……. 얘기는 고맙지만,"
"재능 있다니까? 그 관찰력. 충분 히 그만한 가치가 있어."
부러 단호하게 얘길 이었다. 생각 보다 더 확신이 없는 눈치였다. 내 기나긴 헌터 생활 동안 그 누구도 칼이 언제 부러질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말했다시피 그건 재능의 영 역이니까. 사전에 칼이 부러질 줄 알았으면 미리 대비해서 불의의 사 고를 막았겠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다정 언니의 눈동자가 얕게 흔들 린다.
"탱커가 싫으면 어차피 다른 길을 찾아야 할 거 아냐. 내가 아는 뛰 어난 대장장이가 있어. 제자를 받는 분은 아니지만……, 약간의 팁은 있 지."
꽤나 유명한 이야기였다. 쇠고집 대장장이를 꺾고 그의 제자로 들어 간 대장장이의 스토리. 결국 그 제 자도 이름을 날리는 대장장이가 되 어 이 후일담을 우스갯소리로 했다 지.
그 이야기를 이용하면 다정 언니 도 그 사람과 비슷한 방법으로 제 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정말?"
"응. 하지만 그다음은 온전히 언니 의 손에 달려있어. 내치는 것도 칼 같은 분이시거든."
내 말에 다정 언니는 고민스러운 표정을 하다가 이내 입술을 꾹 물 었다. 결심이 선 얼굴로 날 바라본 다.
"나, 해볼게. 지금까지 서하 말 들 어서 나쁜 거 하나도 없었고. 확실 히 탱커랑 대장장이는 스탯상 겹치 는 부분도 있으니까. 내가 선택하기 에 가장 효율적인 대안인 것 같아. 나도 서하한테 항상 도움만 받아서
미안했는데…… 이번에 정말 열심 히 해볼게."
그리고는 살짝 웃어 보였다. 머지 않았다. 송다정도 자신의 눈부신 값 어치를 알게 될 날이.
* * *
다녀올 곳이 있었다.
홍염과 성배 관련하여 처리할 일 들이 남아있긴 했지만, 법정 공방까 지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았 다. 내가 역천으로 들어오면서 두길드 간의 비율에 다시 조정이 필 요하게 된 것이다.
"어디 가요?"
짐을 챙기고 있는데 뒤에서 표연 원이 물었다. 아마 던전에서 일주일 도 넘게 있을 테니 챙길 게 많았 다.
"던전에 가려고."
"던전을요?"
"응. 일단은 초보 헌터잖아."
물론 무늬만 초보지만. 표연원도 몇 가지 언질을 받았을 거다. 내가 역천에 들어왔지만 유령회원이라는것 정도? 성배 얘기까지 했으려나 모르겠네.
"누나가 던전을 갈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해야 할 일이 있다 면서 길드 임무도 하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지금은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야."
표연원은 도무지 모르겠다는 얼굴 이었지만 나는 누구보다 선명하게 알았다.
목적지는 '푸른 갈대 던전'.
클리어된 지 오래인 영구 게이트 로 수천, 수만 명의 헌터들이 들어갔다 나온 곳이다. 최근에는 그 공 략법이 너무 자세히 연구되어 찾는 헌터가 뜸하다. 아주 초보자 아니면 부산물 취득을 목적으로 하는 최하 위층 헌터들뿐이다.
본디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라고,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던전 에서 그런 게 나올 줄 누가 알았겠 는가.
또 다른 '테오의 안배'가 숨겨진 곳이었다. 제법 큰 게. 대신 그만큼 꽁꽁 숨겨져 있어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회귀 전에는 운 좋은 초보 헌터가 발견했다. 거기서 얻은 자료를 정부에 팔아넘겨 벼락부자가 되기도 했 다.
"천천히 다녀와요. 주제넘을지도 모르겠지만…… 누나는 항상 바빠 보여서요. 뭣 때문인진 몰라도."
몇 년 뒤면 세상이 전쟁 통이 될 거라 서두른다고 하면, 넌 믿을까? 실없는 생각이었다.
"다녀올게."
쓸데없는 말들은 삼켜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