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화
-토너먼트 시작 전에, 모처럼 특 별 대련이 있겠습니다! 관람하실 분들은 자리에 착석해주시고…….
"이날만 기다렸다."
김주일은 오늘도 쌍검을 들고 있 었다. 던전에서 검 하나만 쓰는 쪽 으로 바꾼 줄 알았는데, 겉멋은 포 기하지 못한 모양이지.
"흐흐……. 널 이기고, 청사가 내 진가를 알아보면 그들도 후회하겠 지……
음. 헛소리다.
-그럼 카운팅 시작합니다! 5! 4! 3!
노이트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 다.
-2!
내가 지금까지 김주일을 무시했던 건.
-1!
그가 아무리 떠들어봤자 실력이
전부인 이 헌터의 세계에서는 아무 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었다.
- 시작!
촤아악!
시작, 소리가 울리자마자 그가 내 게 달려들었다. 원거리 딜러에 속하 는 나와 거리를 두지 않는 쪽이 낫 다고 생각했겠지.
' 안타깝게도.'
나는 근거리도 커버 가능한데!
챙!
휘두르는 칼날을 총신으로 막아냈 다. 이렇게 나올 줄 몰랐는지 그가살짝 눈살을 찌푸린다.
"난, 쌍검이거든!"
가로막힌 검 말고 반대쪽 칼을 휘 두른다. 내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오 는 기세가 매섭다.
슈욱-
총과 칼이 부딪힌 지점을 중점으 로 삼아 가볍게 발돋움을 했다. 부 웅, 몸이 거꾸로 뒤집히면서 당황으 로 물드는 김주일의 얼굴이 거꾸로 보이고.
철컥.
순식간의 그의 등 뒤를 점했다. 뒤
통수에 총을 겨눈다.
이대로 끝낼 수도 있겠지만…… 그럼 재미없지.
"허억!"
그의 목숨 대신 왼손에 들고 있던 검 한 자루를 빼앗아들었다.
"무슨 짓을!"
"검 하나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 하면서 두 개나 들고 있으니, 검이 아깝잖아."
"뭐……!"
비록 나는 검사는 아니지만. 날붙 이를 휘두르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챙! 챠르륵!
검이 부산히 맞붙었다. 김주일이 거세게 몰아붙였으나 상대하기 어 렵진 않았다.
"왜, 왜……! 왜, 총을 안 쓰는 건 데!"
총을 쥔 손은 하릴없이 놀고 있었 다. 이대로 그의 관자놀이에 겨누기 만 해도 내 승리일 테다.
"날 갖고 노는 거냐!"
"이제 알았어?"
가벼운 도발이었다.
"으아아아!"
흥분한 상대는 강한 공격을 먹이 고 싶어지고, 그러면 절로 동작이 커지니까.
스윽-
소리 없이. 그의 목젖 앞에 검이 드리운다.
"내 승리야."
나는 고요히 선언했다.
"앞으로는 확신이 없으면 입이라 도 다물어."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조언이었다.
-아아! 승부가 결정났습니다! 한 서하 연수생의 승리로, 대련이 마무 리됩니다!
그의 눈앞에서 검을 떨궜다. 챙, 날붙이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잘 썼어."
내 것이 아니니 돌려줘야지. 넋이 나간 김주일을 뒤로하고 홀로 빠져 나왔다.
-오늘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수석
과 차석의 대결!
우와아아아, 하고 관중들이 소리쳤 다. 젠장.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많은 길드들이 눈독 들이고 있 죠? 역대급 신인 거너, 한서하! 아 까 대련에서도 훌륭한 실력을 보여 준 바 있는데요!
나를 소개하는 말이 울려 퍼지자 내 쪽으로 조명이 내리비쳤다. 순간 눈앞이 하얗게 점멸하며 시야가 흐 려진다. 눈알을 찌르는 듯 강렬한 빛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청사의 유망주로 드높은
명성! 천재 마법人}, 이운우!
이운우의 소개가 끝나자 불빛은 반대쪽으로 향했다.
아니. 연수원 하이라이트 대결을 원래 이렇게까지 화려하게 했던가? 회귀 전에 연수원을 가긴 했는데, 그땐 게이트 직후라 잘 기억도 안 났다.
-그 대결이 곧 시작됩니다!
동물원 원숭이가 된 것 같아 짜증 나지만, 노이트를 한 손에 쥐었다. 대인전이라면 내 전문이었다.
이운우와 나 둘 다 원거리 딜러라 겉으로는 똑같은 리스크를 진 것처럼 보인다.
원딜의 치명적인 단점은 거리를 확보하지 못하면 속수무책으로 당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마법 사의 경우 캐스팅까지 걸리는 시간 이 있으니 더욱 치명적이다.
'그렇다고 머리에 구멍을 뚫을 순 없는 노릇이고.'
어디까지나 목적은 대련이니 상대 방의 목숨을 위협하는 행위는 부정 행위로 간주된다. 노이트로 팔다리 정도는 맞혀도 괜찮겠지만…… 일 단은 카람빗을 더 활용해야 할 것 같았다.
-양측 준비하시고.
시작하자마자 끝내는 게 좋겠지.
익숙한 감각을 밑바닥부터 끌어올 렸다. 눈동자 안에 회로가 덧그려지 며 푸른 빛이 났다.
- 시작합니다!
팟!
말이 끝나자마자 이운우의 뒤쪽으 로 이동했다. 노이트를 가져다대면 그대로 나의 승리……였지만.
이운우와 눈이 마주친 순간, 불길 한 느낌이 들었다. 이운우도 여왕개 미방에서 내가 싸우는 모습을 봤을거다. 우리가 승리를 차지한 데는 초반에 내가 여왕개미의 날개를 꺾 어놓은 공이 크다는 걸 알겠지. 그 때 내 전투 스타일을 눈치챘을 테 고.
그렇다면 이건.
'함정?'
파지지직!
생각과 동시에 몸을 뒤로 뺐다. 내 가 서있던 곳에 전기가 흘렀다. 역 시나. 이운우를 가운데 두고 그 근 처 바닥에 온통 전기가 흐르고 있 었다. 파직파직 살벌한 소리를 낸 다.
"역시 쉽게 당해주진 않네."
살짝 웃는 얼굴엔 악의 하나 없다. 저 공격에 당했으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가 됐겠지.
"너 역시."
이운우의 말에 대충 대꾸하며 무 기를 바로 잡았다. 오른손엔 노이 트, 왼손엔 카람빗이었다.
마법사를 상대한 경험은 꽤 있다. 톨룩은 지구보다 마력이 훨씬 풍부 한 환경이라 우리보다 마법사 군대 가 더 많았다. 하늘에 빗발치는 불 덩이들을 피하면서 전투를 치르는 건 꽤나 고역이다.
그들과 전쟁을 치르면서 몇 가지 얻은 팁이 있다.
첫째, 마법사에게 시간을 줘선 안 된다.
휘익!
귓가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났 다. 다른 마법을 캐스팅하기 전에 이운우의 머리 위로 이동했다.
"윽……
칼을 쥐고 떨어지는 날 보더니 마 법을 취소하고 자리를 피했다. 좋은 판단력이다. 우물쭈물했으면 순식간 에 목에 칼이 닿았을 거다.
둘째, 마법사에겐 거리를 줘선 안 된다.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이운우를 향 해 뛰었다. 민첩은 내가 우위다. 이 운우가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 캐스팅에 집중하는 것처럼 눈을 감 았다.
피할까, 말까?
이운우가 내 첫 수를 읽은 것처럼, 나 역시 이운우의 수를 읽을 근거 가 있다.
'움직이는 대상을 맞힐 정도로 정 교하진 못하다고 했지.'
그렇다면 밀접하게 붙은 상태에서 오로지 나만 맞힐 정도의 정교함도, 당연히 없을 것이다. 확신이 들었 다. 틈을 비집고 파고들어 바짝 몸 을 붙이며, 어깨를 붙잡고 한 바퀴 빙 돌아 등 뒤에 섰다.
파직!
전기가 위협적으로 번뜩거렸다.
내가 더 빨랐다.
"하아.…"
이운우가 찾았던 숨을 내뱉는다. 머리 관자놀이 바로 옆에 노이트가 총구를 들이밀고 있었다. 방아쇠를잡아당긴다면 이운우는 그대로 쓰 러질 상황이었다. 아찔한 상상이 주 는 소름에 손이 살짝 떨렸다.
"……내가 졌네."
이운우가 두 팔을 가볍게 들었다. 항복을 표하는 제스처다. 그제서야 총을 거뒀다.
-아! 승부가 났습니다! 둘 다 신 인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요. 양측의 전투감각이 특히나 눈부 신 경기였습니다!
사회자가 뭐라 떠들어댔지만 중요 하진 않았다. 고개를 들자 빼곡히 채운 사람들이 보였다. 길드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와 이운우를 품평하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아직은 당신들의 평가 대상 이지만, 이후부터는 그렇지 않을 거 야.'
주먹을 꽉 쥐었다. 전서호의 수작 에 놀아난 듯한 불쾌감이 은은하게 서려 있었다. 물론 수석과 차석의 대련이 어느 정도 당연한 수순이긴 하겠지만, 그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것도 부정하기 어렵겠지.
그는 이운우가 승리하는 그림을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갈고 닦은 원석을 모두에게 선보일 무대로 이곳을 골랐을지도.
저 높은 곳에서 홀로 태연하게 무 대를 구경하고 있는 전서호를 바라 봤다. 그의 주변에선 그에게 말 한 마디 걸어보고 싶어 안달인 자들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운우에게 향하던 눈동자가 시선을 느꼈는지 날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웃어 보인다.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아직은 내 가 당신의 발밑에 있는 게 맞으니.
뒤돌아 무대를 빠져나갔다. 승리했 지만 여전히 불쾌한 감각이 손아귀 에 남은 것 같았다.
회귀 전 이운우와 내가 군사적 견 해의 차이로 여러 번 수뇌부 자리 를 놓고 대적하긴 했으나, 그럼에도 그는 나의 아군이었다.
적은 톨룩에 있지 지구에 있지 않 았으니까.
수도 없이 서로의 등을 맞댔던 자 에게 총구를 들이미는 건 썩 좋은 경험이 아니었다.
연수원의 마지막 일정은 수료식이
었다.
대련과 공개수업으로 자신의 가치 를 증명하고, 수료식과 동시에 각 길드는 자신이 원하는 신인들에게 스카우트를 제안한다.
"……헌터로서 시민들을 최우선으 로 여기며, 단 하나의 생명도 허투 루 하지 않을 것을……
선서 내용은 아주 따분하다. 원리 원칙에 맞는 말이지만 실제 게이트 에선 전혀 지켜질 수 없는 말들의 나열이다. 대의를 위해 남을 희생시 키지 말 것이며, 생명 하나를 지키 기 위해 몸 바쳐 일하며, 게이트를클리어하는 자신의 고귀한 숙명을 항상 명심할 것이며…….
이런 선서는 현대의 헌터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헌터와 게이트는 단순한 돈벌이로 전락한 지 오래다.
1세대나 2세대 초반까지는 정말 힘겹게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자신 의 목숨을 불살라 남들을 살리는 직업이 헌터였을지도 모른다. 그때 는 제대로 정비된 체계도 없었고 '시스템'이 뭔지 정확한 개념도 없 을 때니까.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숙명을 항상 명심하고, 품위를 유지할 것을 맹세합니다."
선서가 끝나면 고급스러운 케이스 에 끼운 게이트 출입 자격증을 받 는다. 전직 헌터들이 운영하는 부산 물 유통사에 가면 이런 게 벽에 걸 려 있기도 하다. 의사로 따지면 의 사 면허증 같은 거겠지.
모든 것이 끝나면 드디어, 길드의 차례다.
"한서하 씨. 반갑습니다. 저희는 '연'이라고 하는 원거리 딜러 중심 길드로……
"최고의 대우를 약속드립니다! 길
드 내에서 최우선권을 가지며……
"잠깐 저희랑 얘기 좀……!"
역시나.
공개 수업 때부터 두각을 드러낸 탓일까. 호시탐탐 어떻게든 나를 꾀 어내려는 무리들이 많았다. 귀찮음 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지만 앞으 로 같은 업계에 있을 사람들이니 밉보여서 좋을 건 없었다.
"죄송하지만 생각이 없어서요."
일절 거부의 말만 남기고 있지만 하나같이 끈질기다.
"서하야!"
그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 다.
휙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얼굴들 이 보였다. 혜원 언니와 조연호였 다.
"혜원 언니!"
"으아, 사람 많아. 좀 비켜주세 요〜. 지나갑니다!"
"잠……! 길드장님!"
혜원 언니가 어떻게든 인파를 헤 치고 다가온다. 저 뒤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조연호가 보였다. 쟤는 여기 서도 고생이 많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