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짝짝짝짝!
박수 소리가 우렁차게 울리는 와 중에, 말끔하게 차려입은 둘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전청운과 김기택이었다. 내가 아는 그 둘이 이렇게 나란히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저절로 굳은 얼굴이 됐다. 둘은 헌터로서 차려입었던 것과는 아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 다.
둘은 깔끔한 검정색과 군청색 정 장 차림이었다. 김기택의 훤칠한 키 와 길쭉한 팔다리가 돋보이는 옷 센스였다. 전청운도 은은하게 푸른 빛이 도는 머리카락과 비슷하게 정 장을 빼입으니 한결 분위기가 신비 로웠다. 특유의 무표정은 여전했지 만.
"연수생 여러분들, 반갑습니다. 홍 염의 김기택입니다. 이쪽은 다들 아 시겠지만, 전청운 헌터입니다."
짝짝짝. 아까보다는 짧은 박수가
지나갔다.
"이번 연수원 수준이 아주 높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 데도 저희와 함께할 분들이 계시겠 지요."
능숙하게 기대감을 고조시킨다. 김 기택은 타고나길 이런 자리에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홍염에 대한 부연 설명이 더 필 요할까 싶지만…… 그래도 더 자세 한 얘기를 드리고자 이 자리에 섰 습……
관중을 훑어보는 김기택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한동안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놀란 얼굴로 살짝 입 을 벌린 채 굳어 있었다. 그 모습 이 조금 우스우면서도,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날 찾아다닌 것 같아 기뻤다. 살짝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 다.
그가 말을 하다 말고 멈추자, 전청 운도 의아한 듯이 바라본다.
"아……. 네, 이 자리에 섰습니다."
김기택이 황급히 시선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우선 저희가 준비한 자료영상을 같이 보도록 하죠."
그 말을 끝으로 둘은 잠시 단상에 서 내려가고 연회장 안 불이 꺼졌 다. 김기택이 다 내려가기 전에 내 게 눈짓했다.
' 흐음.
눈치를 보다가 화장실을 가는 척 연회장 밖으로 나왔다.
"한서하 씨."
"한서하."
나가자마자 둘이 눈앞에 서 있었 다. 김기택은 아주 죽었다 살아난 사람을 만난 것처럼 굴었는데, 생각 해보니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상처는 요? 다 치료했죠? 너무 금방 퇴원 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잘 지낸 것 같은데. 멀쩡해 보이 고."
나 대신 전청운이 답한다. 잘 지냈 고 멀쩡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 다.
"오랜만에 보네요."
"할 말은 그게 전부입니까?"
김기택이 뭘 더 바라는지 모르겠 다.
"다 들었습니다. 마지막에, 스스로
배를 찔렀다고...
"아. 그랬죠."
"아, 그랬죠, 하고 끝날 일이 아니 지 않습니까!"
전부터 드는 생각이지만 김기택은 아주 냉정하게 굴 것처럼 말하면서 사실 누구보다 윤리적인 책임을 따 지는 경향이 있다. 그 정도 부상은 헌터에겐 당연한 일인데. 그때 내가 헌터는 아니었지만.
"왜 면회를 다 거절한 겁니까? 우 리는 당신이 이 업계에 완전히 질 려서 떠난 줄 알았습니다."
"딱히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냥,
저는 홍염에 들어갈 생각도 없으니 거리를 좀 두었을 뿐인데…… 혜원 언니가 말 안 했어요? 혜원 언니는 홍염 쪽이랑 계속 연락하잖아요."
"......표혜원......
짚이는 바가 있는지 김기택이 혜 원 언니의 이름은 음산하게 중얼거 렸다.
'언니도 참. 과보호가 심하다니까.'
아무래도 더 이상 내가 홍염과 얽 히는 게 싫어 말을 아낀 모양이다.
"얼굴을 보니 기쁘군."
"전청운 씨, 당신은 놀라지도 않습
니까."
"예상하고 있었다. 연수원 수석 이 름이 한서하라고는 들었으니까."
"하지만 저는 단순히 동명이인일 줄……
"그만둘 리가 없지 않나. 그 실력 을 가지고."
전청운이 당연한 것을 물어본다는 듯이 답한다.
너무도 흔들림 없는 어조라 나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 실력으로 헌터를 안 하고 썩 힌다면 그보다 더한 머저리도 없을
거다. 내가 아는 한서하는 머저리가 아니니 당연히 헌터를 하겠지."
뭐…… 타당하다면 타당한 말이긴 한데. 너무 당당한 태도가 어쩐지 태클을 걸고 싶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당신은 똑똑한 건지 멍청한 건지 가끔 구분하기 어렵군요."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아닙니다."
김기택도 똑같이 느꼈나 보다.
"아무튼…… 오랜만에 얼굴 봐서 좋았습니다. 슬슬 다시 들어가 봐야
하니 설명회가 끝나고 더 얘기 나 누죠. 그리고 홍염 가입 건은 재고 해줬으면 좋겠군요. 조건을 몇 가지 추가해서 제안을 드리도록 하겠습 니다. 그럼, 전청운 씨. 들어가시 죠."
"잠……
잠깐, 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쌩하 니 들어간다.
아니. 홍염은 들어갈 생각 없다니 까.
'……일부러 저런 거다. 일부러 이 런 거야.'
다짜고짜 만나자는 약속을 잡고
답도 안 듣고 가버리다니. 김기택답 지 않은 태도 아닌가. 내가 거절할 줄 알고 부러 이런 게 분명하다.
하지만 휑한 복도에 서서 뭔갈 할 순 없는 노릇이다. 뭐, 나도 오랜만 에 만난 전우와 회포를 풀고 싶기 도 하니 나쁠 건 없겠지. 애써 그 렇게 생각하며 다시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김기택이 앞에서 뭔가를 연설하고 있었다.
"아는 사이야?"
이운우가 옆에서 작게 속삭였다. 김기택이 날 보고 말을 멈춘 걸 눈치챈 모양이다. 빠르다니까.
"게이트에서 봤었어."
아직 강연이 한창인지라 그렇게 일축했다.
이운우도 더 캐묻지 않았다. 매우 찜찜하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홍염의 설명회가 이어서 하기 전에 이 주어졌다.
도란도란 홍염에
끝난 뒤, 청사가 30분의 휴식시간
대해서 얘길 나
누는 다정 언니와 김태병을 뒤로하 고 관계자 대기실로 향했다. 일반 연수생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 니지만, 김기택과 전청운이 허락한 일이었다.
홍염 대기실로 향하는 길 중간에 청사의 대기실도 보였다.
'이 안에 이운우도 있으려나.'
아까 나보다 먼저 가볼 데가 있다 고 하고서 나갔으니, 아마 이 안에 있을 거다.
스쳐 지나가 홍염의 대기실로 들 어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서하
씨."
김기택이 반갑다는 듯이 맞이한다.
"차? 커피?"
"차로 주세요."
"이미 커피로 탔습니다. 한잔 드세 요."
왜 물어봤담. 못 마시는 건 아니라 커피를 받아들었다.
"우선…… 고맙다는 얘길 하고 싶 군요."
묵직한 서두였다. 대변인을 통해 충분히 들은 얘기였으나 직접 듣는 건 또 느낌이 달랐다.
"그 결단이 아니었으면 우린 전부 죽었을 겁니다. 아, 한서하 씨는 살 았을지도 모르지만요. 그때가 아니 었으면 또 언제 그놈을 죽일 기회 를 잡았을지 가늠도 되지 않습니다. 저희 길드 직속 게이트 연구소에서 는 클리어까지 3년은 넘게 걸릴 거 라고 예측하더군요."
꽤 정확한 기간이다.
"게이트 클리어까지 3년을 예상했 는데 왜 들어왔죠? 몇 년이나 그 안에서 썩을 생각은 아니었을 텐 데."
"들어가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클
리어된 이후에 나온 연구 결과니까 요."
모르고 들어왔다, 라. 김기택은 손 에 쥐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본래 저랑 전청운 씨 둘 다 좀 더 나중에 투입될 예정이었지만, 한 서하 씨의 존재가 알려지고 나서 보스 몬스터를 충분히 특정 지을 수 있다는 판단하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이제 와서는 그게 오만한 선택이었단 걸 알지만 말입니다."
그런 이유였나.
회귀 전에는 전청운이 들어오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들어온 이유. 그 게 바로 나였던 거다.
내 존재로 인해 보스가 빠르게 모 습을 드러낼 거라는 기대가 생겼고 홍염은 그 미끼를 덥석 문 것이다. 회귀 전에는 정찰팀이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돌아다녀도 보스 몬스터 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확신이 부족했을 거다. 클리어팀을 투입하 긴 하지만 길드에서 비교적 덜 중 요한 인물을 보냈겠지.
전청운은 홍염의 루키라 아끼고 아끼다가, 결국 혜원 언니가 희생하 기 전까지 들어오지 않았던 거다.
입맛이 썼다. 혜원 언니와 나의 처 절했던 생존기도 결국은 이득과 손 실을 계산하는 과정 중에 있었다니. 당연한 일이긴 하나 직접 들으니 또 뼈아픈 것이다.
"그러니 당신의 결단이 몇만 명의 목숨을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 니다. 그 3년의 시간 동안 헌터들 수천 명이 희생됐을 겁니다. 모두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이자 부모였 을 테고요."
알고 있다.
나는 그 처참한 현장을 함께했으 니까.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였으니까.
표연원의 절규를 바로 옆에서 본 목격자니까.
"감사 인사를 하려고 부른 건 아 닐 텐데요."
굳이 떠올리고 싶은 기억은 아니 라 화제를 돌렸다.
"그야 본론은 스카우트 제의죠. 홍 염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건 압 니다. 게이트에서 그런 일이 있었 고, 우리가 제대로 보호하지도 못했 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지만, 내 가 홍염에 들어갈 생각이 없는 건 맞으므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홍염은 이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히는 대형 길드입니다. 그만 큼 소속 헌터들에게 제공하는 혜택 은 끝도 없이 많죠. 직군에 맞는 아이템을 무상으로 대여해주는 것 과 원하지 않는 게이트를 거부할 수 있는 거부권에 대한 얘기는 많 이 들어봤을 겁니다."
그가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낸다.
그야. 홍염의 '조건'이 나쁘지는 않다.
홍염의 분위기와 경향성의 문제인 거다.
상하 수직적인 분위기, 길드 충성 도를 시험받는 것과 개인보다 집단 을 우선시하는 사고방식. 비난할 것 은 아니나 내 취향에 맞지는 않았 다.
'무엇보다 난 자유로운 활동의 보 장이 필요해. 하지만 대형 길드에서 그런 기대를 할 순 없지.'
길드도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단 체다. 제공하는 게 많다는 말은, 그 만큼 내게서 빼먹을 예정이란 소리 다. 물론 노비 짓도 대감집에서 하는 게 낫다는 말이 있긴 하다. 어 느 길드나 소속 헌터들을 굴려 먹 어 이득을 취하려 드는 건 매한가 지니 개중 복지도 좋고 법적 규제 도 없는 대형 길드가 최선이라는 것이다.
'테오의 안배를 찾아내고 톨룩에 대한 정보를 모으려면 길드 일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회귀 전처 럼 길드에 이름만 올리고 게이트를 돌면서 자율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해.'
대부분의 길드는 그것을 허락할 리 없고 말이다.
이런저런 조건들을 내미는 김기택 에게 거절의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이었다.
벌컥, 문이 열렸다.
"여기 있었네."
이운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청사의 사람들이 서 있었 다. 전반적으로 푸른색 옷을 맞춰 입은 사람들이었다.
충격적이게도, 이운우 말고도 아는 얼굴이 있었다.
"서하 언니!"
"서하 누나!"
안유수, 안유라 쌍둥이가. 푸른색 스카프를 목에 매고, 청사의 문양이 새겨진 활을 들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