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화
지나간 일이니 그나마 희망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거겠지. 그걸 김태병 도 아는지 뒷말은 좀 어물거렸다. 그러다 이내 살짝 웃어 보인다.
"우리 둘, 쌍둥이들 그리고 설민준 은 헌터 지망으로 바꿨어. 찬송이는 가업을 잇는다는 것 같고. 사실 찬 송이는 연락이 잘 안 되네."
"고해윤 씨는 원래 직업을 그대로 할 거라 했슴다. 회계사였다고 함 다!"
"우도 선생님도 헌터관리국에서 일해보고 싶으시다고, 요즘 공부를 다시 시작하셨대."
다들 자기 갈 길을 찾아 가고 있 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정 언니는 탱커보 다는 대장장이 쪽에 소질이 있었던 것 같은데. 물론 대장장이도 근력과 체력이 필수이니 방향성이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순 없지만……. 전에는 게이트 안이라서 제대로 조언해주지 못했지만 이렇게 만나게 된 거 좀 더 제대로 된 길을 알려줘도 좋 을 것 같았다.
"참. 권성민 씨 얘기 들으셨슴까?"
"응? 아니, 성민이는 체육관 이후 로 연락 없지 않았어?"
"저도 최근에 건너건너 들었슴다. 박수일 씨가 말해준 건데, 최근에 정계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함다."
정계로?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길인데.
행정직에 가까운 남자라고 생각은
했지만, 헌터로서의 자질이 나쁜 것 도 아니었는데. 게다가 그는 리더십 이나 전략적인 측면에서 꽤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전쟁 때 선두에 서는 타입은 아닐지라도 책 사로서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했는 데. 꽤나 아쉬운 손실이었다.
"정확한 건 아님다. 애초에…… 그 분은 좀, 우리랑은 거리감이 있지 않았슴까."
"좀 그렇긴 했지……? 우도 선생 님이랑만 자주 얘기했으니까."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니 잘됐으면 좋겠는데 말임다."
"맞아, 맞아."
둘이 소소하게 잡담을 나눴다. 그 래도 평판이 나쁘진 않았다.
'마지막에 나올 때, 좀 찝찝하게 나와서 만나긴 껄끄러운데. 그래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네.'
나와 크게 관련 있는 사람은 아니 지만, 그래도 나름 한 달 넘게 같 이 고생했던 사이이니 나 역시 잘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디 가서든 잘 지낼 만한 사람이긴 하니, 괜찮을 거다.
"연수원 끝나면 한번 만나자고 해 보는 게 어떻슴까? 다들 보고 싶어
할 검다."
"맞아! 쌍둥이들도 얼마나 서하를 찾았는데! 걔네 길드한테까지 부탁 해서..
" 길드?"
쌍둥이들이 벌써 길드에 들어갔다 고?
헌터가 된다고는 했지만, 그 둘은 아직 어리고 능력이 좋으니 국립 아카데미에 들어갔을 줄 알았다. 국 가에서도 분명 제안을 했을 텐데. 그 엘리트 코스를 놔두고 사설 아 카데미를 다녀서 벌써 헌터가 됐다 니.
"우리보다 한 기수 빨리 헌터 시 험에 합격했슴다. 아카데미도 다니 는 둥 마는 둥 했는데, 단번에 헌 터 시험에 합격하지 뭠까."
"어디 길드로 들어갔는데?"
"그게, 분명 그 이름이……
김태병이 입을 열려고 하는데, 불 쑥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서하야."
고개를 돌리자 언제나처럼 반짝이 는 머리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형광등 아래서도 빛나는 것 같은 착각을 주는 색이다.
"이운우."
"이분들은 누구셔?"
그가 웃으며 내 옆에 앉았다. 덕분 에 이운우의 앞에 있게 된 김태병 이 딸꾹질을 시작했다. 히끅, 히끅. 침묵 속에 그 소리가 울렸다.
"반가워요. 서하 씨랑 헌터 시험 때 같은 조였거든요. 이운우라고 해 요."
"아아아! 그러시구나!"
다정 언니가 꼭 생애 처음으로 자 식이 집에 데려온 친구를 본 엄마 처럼 굴었다. 과하게 반기는 어투였다.
"저는 송다정이라고 해요. 이쪽은 김태병이고요. 서하랑은 연화도 게 이트에서 만나서 저희가 신세를 진 사이거든요."
"이운우 씨 이름은 많이 들었슴 다."
김태병도 알고 있을 정도면 이 연 수원 안에 이운우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봐야겠지.
"같이 먹어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그럼요!"
"난 된다고 한 적 없는……
"많이 드십셔!"
중간에 태클을 걸려 했지만 무참 히 씹혔다. 음, 뭐…… 생긋 웃고 있는 이운우가 좀 불안하긴 하지만. 같이 밥 먹는 정도는 괜찮겠지?
"연화도 게이트면 고생이 많으셨 겠어요."
"좋은 기억만 있는 건 아니었죠."
"그래도 다른 분들 도움 덕에 비 교적 안전하게 지냈슴다."
이 둘도 그야말로 무고한 피해자 들이겠지. 갑작스레 게이트가 열려 인생이 180도 변했을 거다. 그런데도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니 다행인 것도 같다.
"두 분은 그럼 생각해둔 길드가 있으세요?"
이운우가 무난한 화제를 던졌다. 이 연수원 안에서 최대 관심사는 그것뿐이겠지. 길드를 목적으로 오 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둘은 서로를 잠시 바라봤다가 멋 쩍게 답했다.
"사실 저희는 길드에 대해서 잘 몰라서 요."
"이번에 길드 설명회도 많이 듣고
결정하려고 함다."
좋은 자세다. 무조건 거대 길드로 갈 필요는 없지. 작은 길드 중에도 소수 인원으로 탄탄하게 서포트해 주는 곳이라면, 거대길드 가서 방패 노릇만 하는 것보단 나을지도 모른 다.
물론 그런 견고하고 좋은 중견길 드는 중소길드 사이에서도 아주 드 물다는 게 문제지만. 역천도 따지자 면 중견길드에 속할 거다. 수는 그 렇게 많지 않아도 다들 탄탄한 실 력을 갖고 있으니.
"서하는?"
"응?"
"생각해둔 길드가 있어?"
이것 봐라? 이운우는 그다지 관심 없는 것처럼, 그냥 다른 사람에게도 물어봤으니 네게도 예의상 물어본 다는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은근히 느껴지는 뉘앙스로 알 수 있다. 앞 의 질문은 그냥 나한테 물어보기 전 사전 작업에 불과했단 걸.
'날 데려가고 싶으시다?'
아무리 봐도 내가 청사에 어울리 는 성격은 아닐 텐데?
물론 청사 가입 조건에 '웃으면서 독설 날릴 줄 알 것, 앞뒤가 다를 것'이라고 쓰여 있진 않겠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란 자연 스레 특정한 경향을 띠지 않는가. 나는 차라리 홍염에 어울리면 어울 렸지, 청사에 어울릴 사람은 아니었 다.
"……청사는 안 갈 거라서."
"왜?"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 이다. 그야 청사 빠돌이에 천성적으 로 청사인 너는 모르겠지.
"나랑은 안 맞아."
"그러지 말고 설명회라도 같이 들 어보는 게……
"안 가."
단호하게 끊어내자 이운우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런 표정 지어도 내 마음은 변함 이 없었다.
대놓고 신입 쟁탈전의 장인 만큼, 수업시간 이후로 저녁에는 일주일 동안 돌아가며 길드들이 설명회를 열었다.
거대 길드는 후반부로 밀려있고,
오늘 하는 길드는 중견 길드일 것 이다. 그보다 작은 길드들은 설명회 를 열 자격도 얻지 못한다.
설명회를 들을 인원을 조사하느라 연회장 앞이 붐볐다. 대기자 목록에 자기 이름을 적어 넣는 사람들이 한가득이 었다.
"우와.…"
"다들 열정이 대단함다."
둘이 설명회를 듣고 싶다고 해서 가는 길에 같이 왔는데, 이 모습을 보니 기가 질린 모양이다.
"저는 오늘 수업으로도 힘들어서 쉬고 싶은데 말임다."
" 나도......
나는 오늘 실기 수업이 면제였지 만 둘은 아니었으니 지칠 만도 했 다.
"힘들면 들어가서 쉬는 게 좋을 걸."
"그래도 설명회를 듣는 게 낫지 않겠슴까?"
"내일부터는 공개 수업이잖아. 설 명회를 듣는 것보다, 컨디션을 회복 하고 내일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게 더 나을 거야."
물론 어느 회사나 그런 것처럼, 신
입의 '당신 길드만을 원해요!'라는 입에 발린 소리는 플러스 요인이지 만. 비슷한 실력이라면 자신들에게 더 충성하는 사람을 뽑는 것이 맞 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둘은 이 아카데미 안에서도 실력이 꽤나 우수할 것이다.
'김태병은 게이트 안에서 스탯 상 승까지 겪었어. 일반 신규 헌터들이 상대가 될 리 없지.'
물론 심리적인 요인은 그가 극복 할 수 있을지 봐야겠지만.
사실 김태병보다 더 탐나는 인재 는 송다정이었다.
'대장장이로 개화하면 그 값어치는 일반 탱커에 비할 바가 아니지.'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아도 헌터 는 아이템을 가린다고 하지 않았던 가. 생산직, 특히나 헌터를 상대로 아이템 장사를 하는 생산직은 망할 일 없는 전문직 중 하나다.
"맞다……. 내일부터 공개 수업이 었지! 나 오늘 완전 꼴사납게 쓰러 졌는데..
"그래도 첫날부터 오는 길드는 몇 없다고 들었슴다. 보통은 마지막에 연수생들끼리 대련하는 날에 오지 않슴까?"
"그렇긴 해."
연수원 생활의 꽃은 마지막 토너 먼트라고 할 수 있지.
말이 토너먼트지, 연수원 생활 전 반을 평가해 적당한 상대끼리 맞붙 여 싸우게 하는 것이다. 비슷한 상 대와 싸우면서 그 실력을 온전히 드러내고 그걸 토대로 길드들이 러 브콜을 보낸다.
"난 들어가서 쉴 거야. 둘은?"
"나도 들어가서 쉬어야겠어. 내일 을 준비해야지..
"저는 그래도 들어보겠슴다. 아카
데미에서도 길드에 대해 많이 듣진 못해서, 이것저것 다 들어볼 생각임 다."
그 말도 일리가 있어 고개를 끄덕 였다.
나와 다정 언니는 여자 기숙사로 향했다. 그대로 아무 일 없이 하루 가 지나가면 좋았겠지만. 내게 평화 는 허락되지 않은 모양이다.
"나오지 그래."
"응?"
"숨어 있는 거 다 아니까."
내 말이 끝나자마자 불쑥 허공에
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은신' 스킬 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수련도가 부족해. 쉽게 간파할 수 있을 만큼."
내 말에 선두에 선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존심이 상했나? 그래 도 사실이었다. 조잡한 은신 스킬이 다.
"들은 대로 자신만만하네."
"내가 말했잖아. 재수 없다고."
그들 뒤편으로, 지긋지긋한 얼굴이 보였다. 허리춤에 쌍검을 달고 있는남자. 김주일이었다.
"무슨 용건으로 날 찾아왔는데?"
"알면서 모르는 척하네? 하긴. 그 정도 뻔뻔함은 있어야 수석 행세 하는 거지."
그놈의 음모론이었다. 아직도 포기 하지 않은 건가.
"청사를 등에 업으니 기세등등하 지? 심사 규정도 공개하지 않고, 정식으로 항의를 넣어도 매크로 답 변만 돌아오고. 권력이 좋긴 한가 봐."
그건 청사 때문이 아니라 아마 최 석철과 얽힌 내용 때문일 텐데.
"너한테 대련 신청할 거다. 이운우 는 몰라도 너 정도는 내 상대도 못 될 테니까! 토너먼트를 보러 모인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면, 너도 주제파악을 하지 않겠어?"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아냈 다.
'대련'이라. 토너먼트 직전에, 연수 원들이 원하면 대련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대부분 토너 먼트 직전에 힘을 빼지 않으려 하 지만, 지금처럼…… 연수원 안에서 감정이 상한 연수생들은 종종 대련 을 벌이곤 했다.
나야말로 원하던 바다. 신경을 살 살 긁으며 귀찮게 구는 그가 짜증 나던 참이었으니.
"그거 기대되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