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화
"다정 언니! 김태병 씨!"
"서하야아아아! 우리, 우리 진짜 살아서 만난 거야? 허어어엉, 흐익, 흐헝헝! 너 수석으로 선서하는 거 보고, 힉, 내가, 내가 환상이라도 보는 줄 알았다고……
송다정이 날 꼭 껴안았다. 아니, 잠깐만. 게이트에 있을 때보다 훨씬단단해진 몸체가 날 짓눌렀다. 저 기, 언니. 잠깐만.
김태병은 차마 날 껴안진 못하고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이런저런 얘기를 꺼냈다.
"게이트가 끝나고 열심히 찾았는 데 결국 못 찾았슴다! 저번에 보여 줬던 학생중 역시 가짜였슴까? 온 갖 아카데미를 다 뒤져봤는데 '한 서하'라는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했 슴다!"
그야 아카데미를 안 다녔으니까. 그리고 그 시기엔 아마 병원에 있 었을 거야……라고 답해야 하는데여전히 송다정이 날 꼭 껴안고 있 어서 말을 못 꺼냈다.
"예? 대답해주십쇼!"
"서하야아아아! 다신 못 볼 줄 알 았어어어. 살아서, 살아서 게이트 밖에서 만나자고, 흑, 허엉, 그때 그렇게 가버리고오오!"
좌우에서 정신이 없었다. 머리가 뱅글뱅글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드 는데. 그때, 머리를 차갑게 식히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조작으로 수석이 된 주제에……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명확하게 악의가 섞인 말투들이었 다. 들떠있던 송다정과 김태병도 멈 칫했다.
"이봐요. 당신들 방금 무슨 소 릴……
송다정이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였 다.
"제군들! 뭐 하시는 겁니까!"
단호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 렸다.
"정숙하고 5열로 줄지어 앉습니다. 실시!"
"네엡......!"
"시, 실시!"
머리부터 발끝까지 방어구를 갖춰 입은 남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압 감이 흘렀다. 투구 사이로 날카로운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그 기백에 송다정과 김태병은 굉 장히 마지못해 물러선다는 듯이 으 르렁거 렸다.
'저런 시비는 상대하지 않는 게 나 아. 그리고…… 저분은 아무리 봐도 탱커 쪽 헌터 같은데.'
그의 앞에 5열로 서는 사람들도 모두 내가 아까부터 탱커 같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었다. 나를 비롯한 원딜 수강생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한 채였다.
"오늘은 합동 수업을 진행하게 됐 습니다. 오늘 수업은 두 반 다 제 가 지휘할 것이니 잘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아하. 그렇게 된 일인가. 그 말이 끝나자 우리 쪽도 5열로 모여 서기 시작했다.
"원딜과 탱커는 창과 방패 같은 존재입니다. 원딜은 뚫어야 하고 탱 커는 막아내야 합니다. 오늘은 그 특성을 이용해 대련을 진행하겠습 니다."
첫날부터 대련이라니. 빡센 일정이 다.
아주 간단한 대련이었다. 우리가 근접 딜러는 아니라 맞붙을 수는 없으니, 일정 거리 떨어져서 주어진 시간 동안 탱커가 흐트러지게 하면 승리인 승부였다.
"기준은 탱커의 무릎이나 등, 머리 가 바닥에 닿을 경우 자세가 흐트 러진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러더니 불쑥, 이렇게 말하는 것 이다.
"우선 시범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한서하 헌터. 나와주십시오."
응? 나?
아니길 바라면서 그를 바라봤지만, 너무도 명확하게 날 바라보고 있었 다.
이거. 우연이라고 하기엔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나와주십시오."
수석도 할 짓이 못 된다.
표정이 너무 썩지 않게 주의하며 앞으로 나갔다.
"무기가 뭡니까?"
"총입니다."
"무기를 드십시오."
그 말에 노이트를 한 손에 쥐었다. 동시에 그가 등에 멨던 방패를 꺼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바닥에 살짝 내려놓자 쿵, 하고 무게감 있는 소 리가 났다. 척 봐도 보통 무게가 아닌데. 저걸 등에 지고 다녔다니.
"한서하 헌터. 앞으로 30초, 제 방 패를 향해 총을 쏘면 됩니다."
" 네."
탕!
"제가 시작이라고 말하면 쏘는 겁 니다!"
"아. 죄송해요."
바로 쏘는 줄 알았지. 멋쩍어서 뒷 목을 살짝 쓸었다. 그 뒤로 송다정 과 김태병이 여전하다는 듯이 미소 짓고 있었다.
"시작!"
탕, 탕!
가볍게 2발 정도 연속으로 쐈지만 남자는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방패 뒤에 온전히 몸을 숨긴 모습 이, 매우 견고해 보였다.
'기준은 탱커의 무릎, 등, 머리가 땅에 닿는 거였지.'
그렇다면.
휙, 옆으로 돌아 달려갔다. 그 낌 새를 읽고 방패가 돌아가지만 내가 조금 더 빠르다.
탕!
팅, 아슬아슬하게 방패가 막아낸 다. 끄트머리로 받아낸지라 반동으 로 몸이 조금 휘청거렸다. 이 정도 면 할 만하지. 흐트러진 틈을 타서 앞으로 달려갔다.
"홉!"
방패 위로 타고 올라가려 하자 방 패를 밀어내 날 떨구려 한다. 바닥에 잠시 착지했다가 가볍게 몸을 놀려 허공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 다. 높이 찬 덕분에 상대의 머리가 눈에 보였다.
'쏴도 되나?'
그 생각이 스쳤고, 습관적으로 머 리를 노리려다 살짝 틀어 어깨를 겨냥했다.
탕!
급하게 방패를 들어올리다 보니 전반적인 무게중심이 무너졌다. 총 알은 방어해냈으나, 동시에 하체가 드러났다. 착지하면서 바닥에 누웠 다. 한 바퀴 바닥을 구르며 다시자세를 잡아 종을 겨눈다.
상대도 눈치채고 방패를 다시 바 닥에 내리꽂으려는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틈으로, 총알이 들어갈 수 있다.
방아쇠에 얹은 손가락을 당기려는 순간.
삐비비빅!
알람이 울렸다. 30초가 지난 상태 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바닥을 나뒹군 옷을 손으로 털어 내며 인사했다. 아쉬워라. 1초만 더있었으면 쏠 수 있었을 텐데. 상대 가 현직 헌터인데 이 정도인 걸 보 면, 역시 벨제부브와 여왕개미를 상 대하고 능력치가 회복된 덕에 감각 들이 되살아나는 모양이다.
'숙련된 헌터들과 비슷한 수준인 가.'
스스로 그렇게 자가진단을 내렸다.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훌륭했습니다, 한서하 헌터. 다들 보셨다시피, 막연히 서서 공격 하고 방어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 다.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상대는 그걸
막아내는 것. 그게 이번 대련의 목 표입니다."
그의 말에 신규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걸 어떻게 하냐는 말들 이 튀어나왔다.
그래. 어설픈 시비에 대응할 필요 는 없다. 보여주면 되니까. 압도적 인 실력의 차이를.
내가 좌중을 훑어보자 하나같이 우물쭈물하며 내 시선을 피했다.
"물론 여러분은 신규 헌터이니 수 준 높은 대련을 원하는 게 아닙니 다. 그럼 짝지어준 대로 대련을 실 시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미리 준비해뒀는지 조별로 이름을 불렀다. 짝이 지어진 헌터들 은 각자 자리를 잡아 이동했다. 그 런데 끝까지 들어도 내 이름은 들 리지가 않았다. 뭐지?
"마지막으로 한서하 헌터는……
드디어 내 이름이 나왔다. 그를 바 라보자,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침묵 이 이어졌다.
"다른 연수생들과 대련을 하면 부 상자가 나올 것 같다는 판단 하에 이번 대련에서 배제하도록 하겠습 니다."
"그럼 전 뭘 하면 됩니까?"
"자유롭게 행동하셔도 좋습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다른 연수생들을 살펴주러 가버렸다.
이래도 되는 건가?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다른 연수생들과 수준이 맞을 것 같진 않았다. 이운우가 있 었다면 좀 할 만했을 텐데. 아니, 지금 이운우는 근접전에 대한 대항 이 없으니, 내 스킬로 거리만 좁히 면 낙승이려나.
* * *
"난 서하가 우리보다 훨씬 일찍 이 시험을 통과했을 줄 알았거든."
송다정이 저녁을 같이 먹으며 말 을 꺼냈다. 입원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랬겠지.
"맞슴다. 그런데 소식이 없어서 이 상하다고 생각은 했었슴다."
" 입원했었거든."
" 입원?"
송다정이 먹던 것을 멈추고 놀란 눈을 했다.
"아, 아니…… 서하가 다치는 건 좀 상상이 안 가서……
조금 뒤늦게 변명을 덧붙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나이 도 어린 서하한테 많이 기댄 것 같 아. 다들 흔들리는 와중에 혼자 우 뚝 서 있었으니까. 다들 말은 안 해도, 서하를 믿고 의지했어."
"그랬슴다. 우리랑 같은 사람이라 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하기 도 했고 말임다. 아직도 잊히지 않 슴다. 그 기름고래를 불태울 때 는……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슴 다."
오랜만에 이런 소리를 들으려니 좀 새삼스러웠다. 그야 다들 일반인이었고, 나는 겉은 몰라도 속은 프 로 헌터였으니. 그들을 이끄는 건 어떤 의미에선 당연한 일이긴 했다.
"게다가 아까도 느꼈어. 우리도 나 름 훈련을 받았고, 아카데미에서 재 능 있다는 소리도 들었는데…… 다 른 연수생들이랑 서하는 차원이 다 른 것 같아."
그야…… 이제 막 시작하는 신규 들과 비슷하면 내 경력이 울 것 같 은데.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테니 말을 아꼈다.
"많이 다쳤던 검까?"
"좀 오래 입원해 있었어. 병원 나
와서 거의 바로 헌터 시험을 쳤으 니까……. 퇴원한 지 한 달 좀 넘 었겠네."
"그렇게 오래 입원해있었어?!"
따지고 보면 얼추 3달 정도인 것 같다. 복부가 뚫리긴 했어도 벨제부 브의 피로 대부분 회복되었지만, 그 상처가 한 번 더 헤집어지는 바람 에 입원기간이 길어졌다. 마족의 피 가 인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현 대 의학은 잘 모르니까.
"뭣 때문에?"
"누가 서하 씨를 다치게 할 수 있 단 말임까!"
연화도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랑 홍염의 전청운 헌터, 라고 말하면 너무 뜬금없겠지?
'내가 체육관을 나와서 누굴 만났 는지, 어떤 일들을 했는지 전혀 모 를 테니까……
이들도 꽤나 초보 같던 날 기억하 고 있을 거다. 다소 독선적이었던 때를. 혜원 언니랑 연원이랑 지내면 서 많이 분위기가 누그러지긴 했다.
"그냥 뭐, 던전에선 흔한 일이지."
"그래도…… 나가서, 찾는다던 사 람은 찾았고?"
"응. 찾았어."
나도 모르게 활짝 웃어버렸다.
"어…… 어떤 사람인데?"
"프로 헌터야. 체육관 나와서는 거 의 쭉 동행했어. 지금은 그분 집에 신세지고 있고."
송다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마주 웃었다.
"한결 편안해 보여서 다행이다."
"그래? 게이트 밖이니까. 아무래
"다들 서하를 게이트 안에서 봤으 면 수석 자격이 어쩌니 하는 헛소 리는 못 할 텐데."
송다정은 아직까지도 한 번씩 회 자되는 수석과 차석 조작설이 분한 모양이었다. 나랑 수업을 같이 들었 던 연수생들은 이제 입도 벙긋 안 하지만.
그때 불쑥 김태병이 물었다.
"그런데 혹시 다른 분들한테도 서 하 씨 만났다고 얘기해도 괜찮슴 까?"
다른 사람들? 아무래도 둘은 줄곧 체육관 사람들과 연락을 하고 지낸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너 무 등한시한 건 아닐까 싶어졌다. 물론 내가 찾을 수 있는 방법도 없 었지만…….
"상관없긴 한데. 궁금하네, 다들 뭐 하고 지내는지."
"헌터가 된 사람들도 꽤 있슴다! 평생 모르고 지나갈 뻔했는데, 어찌 보면 그 게이트도 하나의 기회가 된 셈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