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불길한 생각이 스쳤으나 애써 무 시했다. 그래. 공인 헌터 시험에서 사고가 생길 일이 뭐가 있겠는가?
눈을 뜨니 낯선 곳에 서 있었다. 우거진 수풀들 사이로 햇빛이 새어 나왔다. 하늘이 다 보이지 않을 정 도로 울창한 밀림이었다. 바닥엔 이 끼가 가득하고 축축하면서도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밀림형 던전은 생존하기 쉬운 편 이다. 이 울창한 숲속에는 그만큼 먹을 것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첫인 상은 나쁘지 않았다. 사막이나 빙하 지대보다야 훨씬 사정이 나았다.
"자작나무숲 던전이네요."
이운우가 말했다. 자작나무숲 던전 이라면 서울 근교에 있는 던전이다. 난이도는 초보들에게 적합한 수준 으로, 일반인에겐 혹독하나 초보들 에겐 적당한 정도다. 과연. 헌터 시 험을 치르기 딱 알맞은 곳이었다.
"어떻게 알아요?"
"전에 와본 적이 있거든요."
"던전을요?"
"네. 길드장님과 함께 견학차
청사의 유망주다 이건가. 보통은 출입 자격이 없는 일반인이 던전을 들어갈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자격이 있는 인물과 함께해야 하고, 위험한 일이 생길 경우 보증인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하며, 다른 무엇 보다…… 금전적인 부분에서 부담 이 크다. 자격 없는 일반인이 던전 에 들어갈 때 드는 돈이 얼마더 라……? 최소 천 단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 대단하네……
김주일이 작게 중얼거렸다. 청사 정도 되는 거대 길드면 투자 개념 으로 경험 쌓게끔 데리고 오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목표가 단순히 일주일 생존은 아닌 것 같네요."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던 부분을 입 밖으로 냈다. 우리가 밟고 서 있는 땅에, 미션지가 놓여 있었다.
두루마리를 건드리자 창이 떠올랐 다.
[알림: '헌터 시험 두루마리 13'과 접촉했습니다.]
[메시지가 전달됩니다.]
[미션: 던전 안을 탐사하여 또 다 른 두루마리를 찾아낼 것]
"정찰 임무?"
"다행이에요. 몬스터를 직접적으로 상대하라는 건 아니라서."
아마 초보들이 수행하는 임무가 대부분 정찰이라 이런 미션을 준 듯했다. 전투 능력이 훌륭한 일부헌터들을 제외하면 이쪽 분야가 제 일 수요가 많기도 하고.
"그래도 와본 적 있다니까 좀 안 심인데."
"일단 야영 장소를 찾아 이동해볼 까요?"
이운우의 제안에 다들 고개를 끄 덕였다. 일주일 안에 찾아야 하는 물건이 있으니, 첫날이라 할지라도 일단 움직이는 편이 더 나을 것이 다.
수풀 사이를 걷는 건 체력이 많이 소모되는 일이다. 공기는 서늘하지 만, 인적이 드물어 '길'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곳을 헤쳐 나간 다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천천히 주변을 경계하며 걷던 것 도 잠시.
"근데 다들 나이가 어떻게 될까 요?"
"저 22살이요."
"전 25살인데. 서로 나이 차도 별 로 안 나는데 말 편하게 하죠?"
"그럴까?"
초보 헌터들은 금방 긴장을 풀고 만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수풀 속
에서 계속 긴장하고 있으라고 요구 하는 것도, 지망생들에겐 과한 일일 지도.
"서하 씨랑 운우 씨는……?"
"전 20살이요."
"서하가 막내네!"
대뜸 말을 놓는다.
그럴 만도 하겠지. 이곳에 있는 이 들은, 아카데미에서 난다 긴다 하던 이들일 테고.
헌터 지망이라는 점부터 남들보다 특출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반중이 니…… 헌터 지망생들이 자신들만의 리그를 형성하며 끼리끼리 어울 리는 문화가 있다는 건 들은 바 있 다. 연예인 지망생 같은 느낌으로 자기들이 특별하다 믿는 거다.
"제가 형 바로 밑이네요. 23살이거 든요."
이운우가 입 속의 혀처럼 굴었다. 사근사근하게 웃는 낯이 매끄럽다. 속으로는 헛구역질을 하고 있을지 도 모르지만.
"내가 제일 연장자네. 좀 부담스러 운걸."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김주일 이 헛소리를 했다. 굳이 대꾸하진않았다.
♦ * *
"아직까진 뭐 특별한 게 없는 데…… 진짜 던전 맞나? 게이트도 뭐 별거 없구만."
"그러게. 아카데미에선 쌤들이 엄 청 겁줬는데."
김주일과 민달래는 쿵짝이 잘 맞 는 것 같다. 이운우는 간간이 추임 새만 넣을 뿐 둘의 대화에 끼지 않 았다. 난 헛소리에 끼어드는 취미가없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슬슬 야영 준비할까요?"
"그럴까."
"근데 두루마리가 어딨는지 힌트 도 없나? 무작정 찾기엔 너무 막막 하다구."
중얼중얼하면서도 착실하게 야영 준비를 해낸다. 아카데미를 허투루 다니진 않은 모양이다.
아까부터 헛소리하는 건 듣기 싫 지만, 김주일의 말은 예리한 면이 있다.
헌터 시험관들도 우리가 무작정
찾아다니다가 운으로 두루마리를 찾길 원하지는 않을 테니까. 분명 모종의 방법으로 힌트를 제공하려 할 것이다. 던전 안을 일주일 안에 전부 탐색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 우니.
"그러게요. 아마 조만간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요?"
"야, 그거 뭔가 플래그 같다? 돌아 와서 그녀에게 청혼할 거예요, 그런 거?"
김주일은 장난으로 넘겼지만 이운 우도 속으로 짐작하고 있는 것 같 다.
시험관들이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들 중 하나.
그중 대부분은 우리가 낮에 돌아 다닐 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으로 기회가 스쳐 지나갔다. 그렇 다면 가장 확률이 높은 방법은 하 나뿐이다.
"……불침번 순서 정할까요?"
이운우와 나는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으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 다.
그는 말을 꺼낸 나를 힐끗 바라봤 다. 오랜 시간 함께한 짬으로 대충예상이 갔다. 얘는 좀 쓸 만하군. 내지는 그래도 제정신이 한 명은 있군.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겠 지.
* * *
불침번 순서가 따로 정해졌으나, 딱히 믿을 만한 이들은 아니었기에 깊은 잠에 들진 않았다. 적당히 선 잠을 자면서 기감을 예리하게 유지 하는 정도면 일주일 동안 버틸 수 있다. 믿을 만한 동료가 없다는 점 은 꽤나 큰 리스크다.
-키룩…….
아니나 다를까.
-키루루루…….
몬스터 소리가 들렸다.
"다들 일어나!"
민달래가 동시에 소리쳤다. 늦다. 몬스터가 이만큼 지척으로 다가오 기 전에 알렸어야지. 그러나 탓할 것은 없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초보 에, 지망생이니까. 서툰 것이 당연 하다.
"태산개미야!"
그래도 몬스터에 대한 지식은 쓸
만했다.
텐트 밖을 나가보니 다들 무기를 쥔 채로 몬스터와 마주하고 있었다.
태산개미. 그 이름대로, 거대한 몸 집을 한 개미 형상 몬스터다. 톱니 모양의 입은 분쇄기와 같고 머리에 달린 더듬이는 눈 대신 움직임을 감지한다.
"전에 얘기했던 대로 대형 맞춰 요!"
이운우가 자연스럽게 지휘를 잡았 다. 민달래가 앞에 서고, 김주일과 내가 그 뒤에 섰다. 맨 뒤에 이운 우가 위치했다. 정석적인 포메이션이다.
"다들 제 말을 따라주세요."
파티의 콜은 맨 뒤에 있는 마법사 나 힐러가 맡는 경우가 많으니, 반 발할 것은 없었다. 태산개미가 우리 가 진영을 갖추길 잠시 기다리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길들여진 몬스터 같았다.
'테이머가 있는 모양이지.'
혹마법사와 다르게 계약하지 않고 몬스터를 길들이는 희귀 헌터, 테이 머. 그 덕에 이런 연출도 가능한 거겠지. 물론 테이머의 급에 따라 길들일 수 있는 몬스터의 한계가명확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키루루루!
톱니 같은 입이 탁탁 부딪치면서 기괴한 소음을 냈다. '소리'라기보 단 진동이나 초음파에 가까운 느낌 이었다.
"민달래 씨. 버틸 수 있어요?"
"아마도요."
그녀가 몸체만 한 방어구를 들고 서 비장하게 답했다. 태산개미의 공 격력 자체는 높지 않다. 외골격이 튼튼하니, 딜러진이 이걸 뚫어내느 냐가 관건일 뿐이다.
"김주일 씨, 한서하 씨. 제가 두 분 전투 스타일을 모르니 일단은 자유롭게 행동해주세요. 중간중간에 제가 지시하는 것에만 따라주시고 요."
" 네."
"웅."
나도 제약이 없는 편이 좋았다.
준비가 끝난 기색을 보이자 태산 개미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맨 앞에 있는 민달래에 게 달려든다.
쿠우웅!
거대한 소음이 울렸으나. 민달래는 버텨 냈다.
아무래도 체중이 부족해 뒤로 몇 발자국 밀려나긴 했으나, 생각보다 스탯이 높은 것 같았다.
"움직여요!"
멍해 보이는 김주일에게 소리친 뒤 내가 먼저 달려 나갔다.
민달래가 버텨주는 동안 최대한 많이 공격하는 게 우리가 할 일이 다. 민달래의 바로 옆에 붙어 총을 겨눈다. 태산개미의 주둥이가 방패를 갉아먹는 동안, 놈의 머리는 이 곳에 고정이니까.
-키룩?
민달래의 방패 윗면을 받침대 삼 아 총을 쥔 손을 올렸다. 태산개미 의 눈이 코앞에 있었다. 아주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 다.
태산개미가 위험을 인식하기 직전 의 순간, 틈을 놓쳐선 안 된다.
탕!
-키이이이이익!
"0아|"
아직 숙련도가 낮고 잠금이 걸려 있다 해도, SSS급 무기의 위력은 예사롭지 않은 법이다.
태산개미의 눈 한쪽이 완전히 날 아갔다. 녀석이 고통으로 몸부림치 는 바람에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민 달래가 완전히 휘말려버렸다.
"버텨야 해요!"
"으윽……! 알아!"
그러나 금방 다시 자세를 잡고 섰 다. 방패가 다소 상하긴 했지만아직 지망생들이다 보니 높은 랭
크의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탓이다.
태산개미는 몸부림을 치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우리 쪽을 응시했다. 키루루루……. 스산한 소리가 울렸 다. 놈은 이제 알았을 거다. 민달래 를 뚫는 게 어렵다는 걸. 그리고, 제 고통의 원인이 나라는 걸.
내 쪽으로 달려들려다가 민달래가 내 바로 앞을 막아서 멈칫했다.
금방 고개를 돌려, 무방비하게 서 있는 김주일에게 향했다.
"뭐, 뭐, 뭐야!"
그가 당황스러워하면서 검을 휘둘
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쌍검을 쓰는 덕분에 간신히 주둥이를 한번 막아낼 수 있었다. 검 둘이 얽혀들 면서 겨우 공격을 막아냈다.
"도…… 도와줘!"
그가 소리치자마자 이운우가 답변 했다.
"옆으로 피해요!"
"어? 어어……
김주일이 이운우의 말에 반사적으 로 몸을 옆으로 피하자, 놀라운 일 이 벌어졌다.
파지지직!
"와……
말 그대로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 다.
하늘 끝에서부터 떨어진 낙뢰가 태산개미의 머리에 내리꽂혔다. 태 산개미는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 고 죽었다. 고기 익는 냄새가 희미 하게 흘렀다.
"허억.…"
만약 김주일이 검을 들고 맞선 채 로 있었다면 그까지 전기에 통구이 신세가 됐을 거다.
"다들 괜찮죠?"
« o 心."
-» o .
이운우가 태연한 얼굴로 안부를 물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그에 게서 높은 차원의 벽을 느꼈다. 어 안이 벙벙한 수준이었다. 김주일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아직도 일어 서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천재 마법사는 이때부터…… 차원이 달랐던 거다.
하지만 감탄하고 있을 때는 아니 다. 나는 아까부터 눈여겨보던 것이 있었다. 개미의 배 쪽에 미묘한 문 양이 새겨져 있었으니까. 한번 배를 갈랐다 다시 닫은 것 같은 상처 자국이.
tt서하야... 뭐 하는'.. 어?"
태산개미를 뒤집어 배를 가르자 민달래가 뭐 하는 짓이냐 물으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 안에서 유 리병이 나왔고, 병 속에는 종잇조각 이 들어 있었다. 나는 종이를 펼쳐 보여주었다.
'동쪽으로 가라.'
"힌트인가 봐!"
"와……. 무슨 힌트를 이렇게 살벌 하게 주냐."
역시나. 테이머가 길들인 몬스터를
보내 힌트를 준다, 라.
태산개미 정도면, 아마 다른 수험 생들 조합이었다면 정말 온갖 고생 을 다 했을지도 모른다. 초보 헌터 4명이 딱 적정한 수준이니 죽진 않 았겠지만…… 일주일 안에 찾아야 하는 타임 리미트가 있는 상태에서 그런 시간 허비와 체력 소비는 치 명적이다.
물론 굳이 이운우가 아니었더라도 내가 스킬을 써서 약점을 찌를 수 도 있겠지만…….
'믿을 수 없는 자들 앞에서 고유 스킬을 드러내는 것도 멍청한 짓이
지.'
이런 식이라면 아마 시험관들도 이운우가 규격 외의 강자라는 걸 알았을 테니, 앞으로의 시험 계획이 전반적으로 수정될지도 모른다. 이 운우의 특출함과 별개로 나머지 3 명의 자격도 시험해야 하니까.
'좀 더 아슬아슬하게 강한 수준의 몬스터를 보낼까? 그것도 아니면 이운우를 따로 고립시켜서?'
다양한 평가방법이 있겠지. 머릿속 으로 몇 가지 시뮬레이션들을 돌렸 다.
필기와 마찬가지로, 실기 역시 눈
에 띄는 건 사양이다. 적당한 수준 으로 통과하는 게 최선이니.
"후……. 일단은, 다들 잠도 깬 것 같은데 좀 일찍 출발할까요?"
"어어. 그러자. 근데 동쪽이 어디 지?"
나는 짐가방에서 나침반을 꺼냈다.
"제가 나침반 갖고 왔어요."
"이야. 다행이다!"
달칵. 나침반을 열어 동쪽 방향을 확인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명확해 졌다.
"근데 그 총, 어디 브랜드인가요?
태산 개미의 얼굴 절반은 한 방에 날리는 걸 보면 보통 물건이 아닌 것 같은데……
이운우가 눈썰미 좋게 질문을 던 졌다. 그야, 헌터 지망생이 들고 있 을 법한 무기는 아니긴 하다. 노이 트를 총집에 넣으며 짧게 대답했다.
"게이트 안에서 나온 거라, 브랜드 는 없어요. 좋은 총이죠."
"와, 연화도 게이트에서? 그거 규 모도 엄청 크더니 아이템도 빵빵한 거 나오나 보네."
민달래가 반쯤 헐떡이며 말을 얹 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일단 움직이죠."
아직 갈 길이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