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이거 완전히 미친 여자였다. 이 여 자만이 아니다. 이 교단은, 내 생각 보다 훨씬 미쳐있었다. 아이들을 모 아두고 고문을 자행할 때부터 소름 이 끼쳤는데. 대체 어떻게 이딴 생 각을…….
"아직도 이게 거짓 같나요?"
혜원 언니도 나도, 가만히 침묵했
다. 성녀에게서 말로 설명하기 어려 운 귀기가 흘렀다. 카람빗을 쥔 손 에 땀이 났다.
"제가 바로 그 증거랍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성녀의 몸에 서 은은한 빛이 흐르기 시작했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 틈을 타 성기사 단장이 다가가려 했으나 성녀가 고 개를 저었다.
"이 영혼에 이식된 '신의 조각' 은…… 〈신성한 저울〉이었지요그 아이템은 알고 있다. 신성한 거
울은 한쪽에 금화나 물건을 올리면 그 상응하는 대가를 제공하는 아이 템이 었다.
우우우우우웅.
신묘한 소리가 울리고. 환한 빛이 성녀의 몸에서부터 새어나왔다. 그 리고 그 등 뒤로, 빛무리가 뭉치면 서…… 저울의 형상을 그려냈다. 내 가 아는 '신성한 저울'과 흡사한 모 습이 었다.
빛의 조각들이 모여들면서 저울의 아래부터 그 모습이 드러났다. 고급 스러운 문양의 기둥을 타고 올라가 다가, 좌우로 갈라져…….
"쿠홉......!"
하얀 빛덩이 사이로 붉은 빛이 보 였다. 성녀가 피를 토했다.
"성녀님……!"
성녀의 등 뒤에 생기기 시작했던 저울이 산산조각 났다. 원래부터 존 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성기사들이 안절부절못하며 성녀 를 걱정스러워하는 게 보였다. 성녀 는 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성기사들이 달려가려는 것을 막아냈다. 등 뒤에 성녀를 두 고, 성기사들과 대치했다.
" 방금......
옆에서 혜원 언니가 멍한 어투로 말했다.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내가 묻고 싶었다.
방금 내가 본 그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충만하게 느껴졌던, 강 력한 신성력. 조연호보다 몇십 배는 진한…… 그야말로, '성녀'라고 칭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 미친 교리가 정말 사실이었다 고?'
-인간은…… 고통과 함께 성장하 기 마련이지요. 죽음에 가까운 위기 를 넘기면, 한층 고결해진답니 다…….
정신을 놓은 것 같은 성녀의 표정 이 아른거렸다.
미친 성녀, 미친 교단. 그리고 제 일 미친 건 역시 이 빌어먹을 게이 트였다!
아이템을 인간에게 이식해서, 교황 에 가까운 힘을 발휘하게 만들 수 있다니. 인위적인 힐러! 얼마나 매 력적인 단어란 말인가. 마법사나 힐러처럼 천성이 따르지 않으면 습득 할 수 없는 직업군은 그 몸값이 하 늘 높이 솟아있는데. 후천적으로 얻 을 수 있다고 하면 밖에서도 수많 은 사람들이 군침을 흘릴 거다.
'그 과정이 비인간적인 건 신경 쓰 지 않을지도 모르지.'
어차피 게이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부분 비밀에 부치지 않는가. 안에서 인체실험을 잔뜩 해서 이 정도 급의 힐러를 하나만 구할 수 있으면…… 그걸로도 충분히 이득 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 방법이 이 스테이지형 게
이트가 아니라 밖에서도 통하는지 는 알아봐야겠지만……
여러모로 위험한 내용이다. 침을 꿀꺽 삼켜냈다.
[알림: 목표를 143/148만큼 달성 했습니다!]
그때 현실을 일깨우는 알림이 울 렸다.
휙,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봤다. 김기택이 땀을 뻘뻘 흘리며 아이 하나를 밖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건물들을 바 라봤다.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저 안에 사람이 남아있을 거란 생각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제 남은 건 한 명……!'
목표는 '5명 미만'이었다. 이제 딱 5명이 남았으니, 저 안에서 한 명 만 데리고 나오면…… 목표 달성이 었다. 그런데. 아주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서하야!"
혜원 언니가 부르는 것을 무시하 고 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아이들 틈바구니를 빠르게 훑었다.
없다. 없었다. 빛바랜 황금으로 빚 은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이 보이질 않았다.
'달리아가 없어!'
다시, 건물을 바라봤다.
거센 불길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젠장.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정 말, 정말 이러고 싶지 않은데…….
나를 응시하던 그 선명한 녹안. 그 안에 깊게 밴 후회를, 내가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그 아이를 어쩐지 외면할 수가 없었다.
"제…… 제가 들어갈게요."
"네? 당신이요?"
김기택이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봤 다.
"저 대신, 성녀 쪽에 가주세요. 저 안에는 제가 갈게요. 제 고유 스킬 아시잖아요. 빠져나올 수 있어요."
"위험합니다. 신부들의 움직임이 이상했습니다. 저렇게 불이 났는데, 밖으로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고요."
"그래도 가야 해요. 제가 갈게요."
답지 않게 고집을 부렸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저 안에 있을 달리아를…… 달리아를 구해야 했다. 이기 적인 말이지만, 어차피 한 명만 저 안에서 구해 나올 수 있다면, 아는 사람인 쪽이…… 더 마음 편하지 않은가.
김기택은 날 관찰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내가 갑자기 이렇게 행동 하는 이유를 가늠하는 얼굴이다. 그 래, 어쩌면. 가장 걱정했던 것처럼 내가 리트에게 과몰입해서 느끼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발이 덜덜 떨리는 이 흥분감과 고양감이, 정상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 달 동 안 웃고 떠들고 함께하면서 정이든 걸까?
하지만 지금 내가 정상이 아니라 하더라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 약 지금 모르는 체하면 나중에 아 주 깊이 후회할 것 같았으니까.
결국 불타는 건물 안으로 뛰어든 건 나였다. 김기택은 망설이다가 마 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의 문 앞에서, '공간 간섭'을 발동했다. 머 릿속으로 순식간에 건물이 파악됐 다.
'이상하다. 1층에도, 2층에도 아무 도 없어.'
빠져나올 생각이 있다면 저층 창
문에서라도 뛰어내릴 준비를 하는 게 맞을 텐데. 대체 왜 아무도 없 는 거지? 그때, 김기택의 말이 생 각났다. 신부들의 움직임이 수상하 다는 말. 저렇게 불이 났는데, 아무 도 나오지 않았다는 말.
제발. 아니길 바라면서, 스킬을 발 동했다.
목표 지점은…… 꼭대기 층이다.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하!"
눈을 뜨기도 전에 시끄러운 웃음 소리가 귀를 때렸다.
"성공했다. 성공했어!"
주변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시끄럽 게 떠드는 남자는 신부복을 갖춰 입고 있었으나, 온몸에 피 칠갑을 해 붉은 옷처럼 보였다. 남자는 내 가 온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시신이... 하나, 둘, 셋.
바닥에 널브러진 시신이 한둘이 아니었다. 개중 아이들의 시신 은…… 보이는 것만 셋. 큰일이다. 커트라인은 넷까지. 생각보다 빠듯 하다.
"차세대 '성녀'가, 드디어 탄생했구 나! 역대 가장 강력한 신의 조각을
이식했으니 넌 내 인생의 역작이 다……. 나의 창조물, 나의 주인이 시여!.. 아아, 달리아!"
...그 말을 듣자, 온몸이 싸늘하 게 굳었다.
'달리아'라고 한 건가, 지금?
"응? 아아, 손님이 와 있군……. 잘됐어. 우리의 새로운 성녀님을 테 스트할 기회가 되겠어. 자아, 달리 아. 어서 정신 차리렴......
남자의 등 뒤로.
보고 싶지 않은 것이 보였다.
초점을 잃은 눈이 허공을 응시한
다. 녹색 눈동자가 그 빛을 잃어 탁했다. 금발 머리는 온통 피로 질 척였고, 얼마나 많은 성수를 사용했 는지 맨발 아래에 빈 병들이 굴러 다녔다. 달리아가 묶인 의자 옆으 로…… 갖가지 흉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후회하지 않아.
-단 한 순간도.
정말?
지금도, 후회하지 않니?
"일어나라, 달……허억!"
촤악!
살 이유가 없는 버러지는, 베어버 리는 것이 옳다. 카람빗이 놈을 거 칠게 베어냈다. 한 번의 칼질로는 죽지 않아서 여러 번 휘둘러야 했 다. 핏물이 줄줄 새 바닥에 웅덩이 가 생겼지만, 애초에 바닥은 피투성 이였기 때문에 별로 티 나지 않았 다.
"..달리아. 늦어서... 미안해."
들리지 않겠지만. 미안하다고 사과 했다. 내가 너무도 늦었구나. 가슴 안쪽에서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아아......
내 목소리에 반응한 것일까. 달리 아가 작게 목소리를 냈다. 죽은 눈 에 잠시 생기가 감돈다.
"리트……. 나…… 나 성공했 어……'?"
띄엄띄엄, 묻는 말에 차마 대답하 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 나 정말 성녀가…… 된 거구나……. 나, 이제…… 내가, 리 트를 지켜줄 수…… 있겠다……
굳은 입꼬리를 애써 올려 보인다. 하지만 예전처럼, 상냥한 미소는 더이상 아니었다. 달리아도 그 부자연 스러움을 느꼈는지 어라…… 하고 중얼거렸다.
잘 움직이지 않는 얼굴 근육을 연 신 바들바들 떨며 웃어 보이려고 노력한다. 그럴수록 얼굴이 일그러 져 고통스러워 보이는 줄도 모르고. 애써 날 안심시키려고 한다.
"이젠.…" 내가...... 아.…". 아 아……. 아아아아아아악!"
달리아가 갑자기 미친 것처럼 몸 을 흔들었다.
극심한 고통에 팔다리가 덜덜 떨 리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눈동자가 뒤집혀 흰자가 보였다. 당황스러 운 마음에 다가가 구속구를 풀어보 려 했지만, 열쇠가 필요했다. 내가 풀 수가 없었다.
"젠장!"
죽은 시체를 뒤졌지만 열쇠는 나 오지 않았다. 젠장, 젠장! 계속해서 비속어를 중얼거리며 다른 시체들 을 훑었다. 끔찍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으나 그걸 따질 새가 없었다. 미친 듯이 시체 더미 사이 를 누볐다.
"아아아으].! 아악! 아아아!"
달리아는 계속해서 고통에 찬 신
음을 내뱉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무력감이 저 밑에서부터 타고 올라왔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 는 감각이었다. 뼈저리게 스미는 아 릿한 감각.
"아......!"
이윽고, 비명이 멎었다. 목이 확 꺾인 채로 울부짖던 달리아가 고개 를 푹 숙였다. 나 역시 손을 멈추 고 달리아를 바라봤다. 죽, 었나? 하지만 가슴팍이 오르내리고 있었 다. 숨을 쉬고 있으니 죽지 않았다.
이내 몸에서 빛이 새어나오기 시 작했다.
아까 성녀에게서 봤던 것과 같은 징조였다. 달리아 역시, 정말 성녀 가 된 것이다.
끊임없이 빛줄기가 새어나와 달리 아의 머리 위에서 형상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거대한 잔과 같은 모습이 었다. 넓은 입구에, 밑으로 내려갈 수록 좁아지는 모습. 겉에 새겨진 천사와 신들의 조각.
모를 리가 없었다.
애초에 이 게이트에 들어온 목적. 혜원 언니가 벨제부브를 처치하기 위해 사용했던, 테오가 인간들을 가 엾이 여겨 숨겨둔 안배.
S급 성물,〈성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