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성녀?
"성녀요?"
"이 미치광이들이 꾸며낸 전설 정 도로 생각했는데…… 진짜 성녀가 현존한단 말입니까?"
김기택의 말이 옳았다. 우리는 이 수상쩍은 신학교에 머무르면서, 이들의 교리가 엉터리라는 데 모두 동의했다. 신의 조각이니, 그릇이 니. 그딴 말을 하며 채 성인이 되 지 못한 아이들을 고문하는 게 정 상은 아니었으니까.
외부와 지나치게 단절된 공간이 그 의심에 타당성을 더했다. 저 밖 에 이 인체실험 같은 것에 성공한 '성녀'라는 존재가 있다고 아이들에 게 가르치지만, 아무도 성녀를 직접 본 적은 없지 않나.
"실제로 있는 모양이야. 쓰레기들 을 태우다가 편지 봉투 조각을 발 견했어."
혜원 언니가 주머니에서 챙겨온 것을 꺼냈다. 불에 타다 만 종이였 다. 일반적인 종이가 아니라 특수 처리를 한 고급 종이였다. 부드럽 고, 글씨가 번지지 않는.
"이 끝은 타들어 가서 잘 보이지 않지만…… 여긴 분명히 보이지. 'Saint'라고 쓰인 게."
"성녀, 카트리나……
수업 시간에만 질리도록 듣던 이 름이 었다.
"한 달이라는 기한은 어떻게 안 거죠?"
"오늘 일정이 새롭게 나왔거든. 근 데, 전에는 이삼 일에 한 번 아이 들을 데려갔던 게…… 하루에 한 번으로 확 짧아졌어. 정확히 한 달 동안."
"그 기간 안에 실적을 내겠단 소 리군요."
순하랑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김기택은 애써 토악질을 참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가 볼 끔찍한 광경이 늘었다는 소리였다.
"성녀가 오면 그쪽으로 시선이 집 중될 수밖에 없지. 절호의 기회야. 병력이 성녀를 호위하기 위해 한쪽
으로 몰렸을 때, 우리가 뒤통수를 치면 큰 피해 없이 아이들을 밖으 로 빼돌릴 수 있어."
혜원 언니가 어둠 속에서 비장하 게 선언했다.
"2주 동안 철저히 준비해서, 그날 모두 무사히 빠져나간다. 그게 최선 의 계획이야."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 * *
" 리트."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이름이 불 렸다. 달리아였다.
" 왜?"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
드물게 진지한 얼굴이었다.
"우리는 모두 신의 조각을 받아들 이는 그릇이 되기 위해 이곳에 있 는 거잖아. 그렇지?"
"웅……. 그렇지."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저번에 클로에 수녀님께서 하신 말씀 기억나? 밖에서의 가족, 신분, 배움…… 모두 버리고 새롭게 태어
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라고 하셨 잖아."
"웅."
그 말을 듣고 뒤가 구리다고 생각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직후에 끔찍 한 실태를 알고 얼마나 몸서리쳤던 가.
"……난 요즘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어……? 달리아. 울어? 왜 그 래……
둥근 눈매에 방울방울 맺힌 눈물 을 보니, 꼼짝없이 죄책감이 들었 다. 내가 큰 잘못을 저질러 천사같은 달리아를 울리는 것 같았다. 내가 뭘 잘못했지? 새벽 기도회마 다 잠든 거? 수업 시간에 제대로 안 듣는 거? 쪽지 주고받느라 몰래 이곳저곳 빠져나가서 달리아가 날 찾아 헤매게 만든 거? 되짚어보니 내 잘못이 너무 많았다.
"같이 신의 조각을 담아내자고, 그 렇게 다짐했잖아. 그러기로 하고 여 기 들어왔잖아……. 그런데 요즘 리 트는 내가 알던 리트가 아닌 것 같 아."
그야 네가 알던 그 리트가 진짜 아니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일단 여기서는 내가 리트니까.
하지만 이건 명확히 해야 하는 문 제다. 스테이지 게이트에서 자신의 역할에 너무 몰입하거나, 오랜 시간 을 지낸 나머지 자신의 정체성을 잊고 정신이 망가져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나는 '리트'가 아니라 '한서하'다.
"혹시…… 후회하고 있는 거야?"
후회? 무슨 후회? 아무래도 '리트' 와 달리아 사이에는 여러 사연들이 더 얽혀있는 것 같았다.
"……그립니? 네 가족, 네 가 문…… 네가 누렸던 모든 것들이?"
도무지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 다. 하지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지 는 않는 듯해 일단 부정하고 보았 다.
"그런 거 아니야."
"……혹시 후회한다면, 이 신학교 를 떠나."
뭐? 이 사이비 집단에서 정식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고? 그런 건전한 방식이 있단 말인가.
"몰래 스칼렛 가문에 연락을 보내. 네 가문이라면, 이곳에서 사람 하나 빼내는 것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 니까."
그러니까. 내 몸의 주인이 '스칼 렛'이란 가문 출신인데, 그 가문이 꽤나 힘이 좋다 이건가? 이 신학교 는 외부의 지식을 전혀 가르치지 않으니 스칼렛이란 가문이 어떤 수 준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런 거 아니야, 달리아. 정말로."
"그럼?"
일단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조잡 한 말들을 내뱉었다.
"나 다 봤어."
달리아의 녹색 눈동자가 결연한 의지로 물들었다.
"네가 밤마다 어딜 몰래 나가는 거, 다 봤다고."
그걸 봤다고? 나는 대번에 얼굴을 굳혔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 진다.
어떻게 해야 할까. 죽여야 하나? 계획이 유출되면 골치 아파진다. 자 칫하면 게이트 실패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사이비 놈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아무도 모르니까. 슬쩍, 옷 안에 감춰둔 카람빗을 손으로 매만 졌다. 어떡할까……?
"그래도 애써 모르는 척했어! 네가 잠시 방황하는 거겠지, 금방 신의품으로 돌아오겠지. 신께서 우릴 굽 어살펴 주시겠지! 그렇게 생각했다달리아는 잔뜩 흥분한 것 같았다. 옷 안에 감춰뒀던 펜던트를 꺼내들 며 울부짖었다.
"이제 와서 후회된다면…… 탓하 지 않을게. 너무 많은 것을 욕심낸 나의 잘못일 테니. 조용히 이곳을 떠나는 게 좋겠다."
그 말을 끝내고 달리아가 뒤돌아 섰다.
펜던트를 보는 순간. 나는 내가 이 곳에 왔을 적부터 목에 달려있던것이 생각났다. 바로 달리아가 꺼내 든 것과 같은 모양의 펜던트 말이 다! 말하는 투나 똑같은 펜던트를 보니 이 둘은 인연이 아주 깊은 모 양이다.
[알림: '리트의 기억' 힌트를 발견 했습니다.]
['리트의 기억'을 열람하시겠습니 까?]
'예'를 선택하자 낡은 기억이 보였 다.
드넓은 저택, 화려한 장식품. 권세 가 대단해 보이는 집안이었다. 수없 이 많은 시종들이 부지런히 움직이 며 온기 없는 집 안을 광내고 있었 다. 그 사이로, 어린 '리트'가 보였 다.
어린 시절의 나와 쏙 빼닮은 모습 이지만 저건 내가 아니라, '리트 스 칼렛'이다. 나와 흡사한 이유는 그 저 이 게이트 안에서 내게 배정된 역할이기 때문이다. 만약 순하랑이 이 역할을 맡았다면 순하랑의 얼굴 이 저기 있었을 거다.
리트는 공주님 같은 드레스를 차 려입고 정치학을 배우고 있었다. 고작해야 예닐곱 살로 보이는데, 수업 시간이 살인적이었다. 똘똘하게도 그 모든 것을 소화해내고 있긴 했 으나 내가 보기에 행복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8대 왕이셨던 루클리온 님은 백성들을 아끼셔...
지루한 내용들뿐이었다. 어린 리트 도 마찬가지인지 죽은 동태 눈깔을 했다.
죽은 것과 다르지 않은 삶이다. 관 전자의 위치에 있었으나 알 수 있 었다. 어린 리트 스칼렛은 이 모든 것이 권태로웠다.
그 삶에 변화가 생긴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건방지게. 천것이 어디, 아가씨의 물건에 손을 댄단 말이냐!"
"배은망덕하기 그지없구나. 너희를 보살피는 스칼렛가의 아가씨를 몰 라보고 이런 짓을 벌이다니……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도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바라본다. 어 린 달리아가 엉망인 꼴을 하고, 원 망 어린 눈빛을 했다. 지금의 달리 아를 보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모 습이 었다.
누더기 같은 옷에 검댕이 묻은 얼
굴, 제대로 먹지 못해 꼬챙이처럼 가는 팔다리. 잘 배운 아가씨 같은 분위기의 달리아에게 저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았 다.
"아가씨. 이 비렁뱅이를 어떻게 할 까요?"
"손목을 잘라 모범을 보이셔야 합 니다."
옆에서 유모가 작게 속삭였다. 앞 으로 이 영지를 다스릴 위정자로서 위엄을 세우라는 내용이었다. 그러 나 어린 리트는, 무엇에도 흥미가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이렇게 물었다.
"밥은 먹었니?"
정말 엉뚱한 질문이었다.
달리아는 처음에 제게 묻는 말인 줄도 몰랐다. 멍하니 있다가 경비가 호통치자 얼결에 더듬더듬 대답을 했다.
"아, 아직입니다……. 아가씨……
"그래?"
그러고는 태연하게 명했다.
"씻기고 단정하게 해서 오늘 저녁 자리에 같이 들여보내거라."
"예? 아가씨, 그게 무슨……
"배불리 먹이고 돌려보낼 것이니 그리 알거라."
촤르륵. 리트는 화려한 문양의 부 채를 펼치며 살랑살랑 흔들었다. 달 리아는 멍한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 봤다.
"아가씨는 참으로 이상한 분이십 니다."
달리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 다. 소매치기나 하며 겨우 먹고살던달리아에게, 꿈과 같은 저택에 사는 리트는 전혀 다른 세상 사람과 같 았다. 그런데 그 높으신 귀족 나리 가 이렇게 평민을 데리고 식사를 한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예……? 시, 실례가 됐다면 죄송 합니다……. 제가 배운 것이 없어 서……
그 말에 리트는 작게 웃었다.
"원한다면 더 머물다 가도 좋다. 이 저택에 어린 너 하나 누일 곳이 없겠느냐."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아가씨!"
그렇게 달리아는 스칼렛 저택의 객식구가 됐다. 명목은 리트 스칼렛 의 말놀이 상대였다. 운 좋게 꿀 같은 자리를 차지한 달리아를 고까 워하는 시종들이 많았으나, 그 정도 는 견딜 만했다. 추운 바람에 덜덜 떨며 잠을 청하지 않아도 되는 것 만으로도, 하늘 같던 귀족 나리와 같은 천장 아래 있는 것만으로도 달리아는 꿈만 같았다.
같은 또래인 둘이 친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단둘이 있을 적이면 달리아는 간도 크게 반말을 쓰기도 했다. 리트도 딱히무어라 지적하지 않았다. 둘은 리트 가 수업 중일 때가 아니면 늘 함께 했고, 많은 것을 공유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달리아마저 모 르는 것이 있었다.
3층 제일 구석진 방. 일반 시종들 도 들어가지 못하고 철저하게 검증 된 자들만이 그곳에 출입할 수 있 었다. 달리아는 리트에게 그 방에 대해 물었으나, 늘 친절하던 리트도 드물게 침묵했다.
* * *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번개가 쿵 쾅거리는 밤이었다. 번쩍이는 번갯 빛이 어두운 저택 안을 드문드문 밝혔다. 그때마다 복도에 걸린 액자 나 비싼 장식품들이 스산하게 빛났 다. 세차게 부는 바람에 커튼은 휘 몰아치고, 위잉위잉 하는 소리가 귓 가에 울려 퍼졌다. 축축한 습기와 찬 기운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드는 밤이었다.
리트....
달리아는 그 모든 것들 사이에서 리트를 찾았다. 홀로 지새우기에 그 밤은 너무도 차가웠다.
" 리트……
달리아는 넓디넓은 복도를 가로지 르며 달려갔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달리니 흉흉한 복도의 모습이 보이 지 않아 그나마 나았다. 그녀의 절 친한 친우는 이 늦은 밤에도 늘 책 을 읽었으니, 오늘도 그러하리라.
"아!"
눈을 감고 달리던 달리아는 문턱 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넘어졌다. 잠옷은 옷감이 얇아서 살 결을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했다. 어 린아이의 여린 살갗이 카펫에 미끄 러지면서 붉은 자국을 고스란히 드러 냈다.
"으 o.." 人» 9 -..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정도로 쓰 라린 상처였다.
달리아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바 로 앞에 도서관 문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고풍스럽게 장식된 문은 항상 달리아로 하여금 문 앞까지 왔다가도 돌아가게 만드는 힘이 있 었다.
'불이…… 꺼져 있어?'
도서관 문은 화려한 장식 사이사 이 불투명한 유리로 메워져 있었다. 안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불빛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도서관 불 이 꺼져 있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 다.
'저 방은.'
그 대신 도서관 옆방의 문 틈새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늘 자 물쇠로 굳게 잠겨 있는 방이었다. 리트에게 물어도 아무 대답을 해주 지 않던. 소문만 무성한 비밀의 방.
자물쇠는 없었다. 하지만 문고리를 돌리면 들킬지도 몰랐다. 도서관 불 이 꺼져 있고 이곳은 켜져 있으니, 리트가 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달리아는 까치발을 들고 열쇠 구 멍에 눈을 맞췄다. 그 너머로 불빛 이 아른거렸다. 까치발을 든 자세가 힘들어서 시야가 흔들렸다. 달리아 는 몇 번이고 휘청이는 발을 다잡 아야 했다.
'안에…… 저게…… 뭐지?'
형상이, 어렴풋하게 서렸다. 달리 아는 그것을 확실히 잡아내고자 발 끝에 더욱 힘을 실었다.
아.
달리아는 저도 모르게 짧은 신음 을 내뱉었다. 아-, 저것은. 이 방 은. 이 저택은. 이 집안은.
다음 날, 달리아는 창백한 얼굴로 속삭였다.
"여기서 도망치자."
리트가 말간 눈으로 달리아를 바 라봤다. 불안에 떠는 손끝이, 리트 의 손을 마주 잡았다.
"여긴 미쳤어."
달리아는 확신했다. 이곳은 미쳤 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왜 리트가, 이 화려하고 풍족한 환경 가운데서 그렇게 시니컬한 표정이었는지 말 이다. 왜 모든 것에 무감각하게 굴 고, 많은 것들을 의미 없이 스러지 게 했는지. 그래. 그럴 수밖에. 그 모든 것들은 리트에게 닿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날 구원한 것처럼, 이번에 내가 널 구원할게."
줄줄 흐르는 눈물 사이로.
"날 믿고 동쪽 끝으로 가자. 그곳 에, 유토피아가 있다고 들었어. 인 위적으로 만들어진 유토피아 말이
야. 그래도 어디든 여기보단 나을 거야."
달리아는 속으로 다짐했다. 내 모 든 것을 바치더라도, 내 너를 이 지옥으로부터 구원하리라.
['리트의 기억'을 열람하셨습니다.]
[스토리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눈을 감았다 뜨니, 나이를 먹어 어 른에 가까운 모습을 한 달리아가 보였다. 눈물을 머금고, 혹시라도 그때의 선택이 후회되면, 늦지 않았으니 돌아가라고 이른다.
어린 리트는 아마, 선뜻 긍정을 표 하고 달리아의 손을 잡았을 것이다. 기억을 봤던 지금은 알 수 있다. 리트에게는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 가 없으므로. 달리아의 손을 잡는 것조차도.
"달리아."
달리아는 침묵했다.
"너는 후회하지 않아?"
모르는 척 가만히 있었으면, 그 안 락한 생활을 더 오래 누릴 수 있었 을 텐데. 달리아가 그 생활을 얼마 나 행복해했는지 이제는 나도 알았다. 혹시 후회하는 건 네가 아닐까.
"……후회한 적 없어."
그러나 달리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게 말하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하 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단 한 순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