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화
챕터: 나타롯샤 신학교
내가 일어난 곳은 어둠에 묻혀 있 었다. 나란히 놓인 이층 침대마다 아이들이 누워있었다. 아직 새벽인 듯 아무도 깨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놀랄 법 도 하지만, 내겐 꽤나 익숙한 일이 었다. 스테이지형 게이트에 입장했다는 신호였다.
이 스테이지형 게이트는 일종의 '롤플레잉 게임'과 유사한 형식을 띤다.
입장한 플레이어들은 각자 적당한 역할을 하나씩 부여받고 게이트 내 부 스토리를 따르는 것이 일반적인 클리어 방식이다. 지금 보이진 않지 만 아마 다른 사람들도 적당한 역 할을 하나씩 배당받았을 것이다.
'나타롯샤 신학교, 라.'
알림에 떴던 이름을 되짚었다. 낯 선 이름의 신학교다.
스테이지형 게이트에 대해선 의견
이 분분하다. 아주 다양한 배경, 다 양한 목적들을 가진 스테이지들이 었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 스테 이지들이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 고 있으며 각 인물이 처한 상황과 시간대에 따라 뒤바뀔 뿐이라고 주 장했다.
정확히 검증된 적은 없으나 나 역 시 그 주장에 동의했다. 내가 깬 수많은 스테이지들은 미묘하게 유 사한 문화 양식을 갖고 있는 경우 가 많았으니까.
필드형 게이트는 시간의 흐름이 외부와 동일한 데 반해 스테이지형 은 그 배율도 각기 다르다는 점에서, 본질부터 다른 유형이라는 걸 유추해볼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팔 다리의 감각이 낯설진 않았다. 손을 쥐락펴락해보니, 본래 내 신체가 그 대로 온 것 같았다. 다른 인물에 빙의하는 형태가 아니라 다행이었 다. 방 안에 거울이 전혀 보이지 않아 확신할 순 없었지만.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들어 목덜미 를 손으로 훑었다. 낡은 펜던트가 손에 걸렸다. 날개를 좌우로 펼친 형상이다. 뭐지? 클리어에 필요한 아이템인가?
창가에 가까이 다가가 밖을 .훑었 다. 아직 깜깜해 제대로 보이진 않 았지만, 신학교라는 이름답게 하얀 색 건물들이 많았다.
"우웅……. 리트야?"
뒤에서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렸 다. 리트? 그게 내 이름인가? 섣불 리 대답할 수 없어 가만히 침묵했 다.
"일찍 일어났네……. 슬슬 애들 깨 워야겠다. 곧 새벽 기도회가 시작하 니까……
하암, 작게 하품하는 목소리에 의 심하는 기색은 없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내 이름이 '리트'인 모양이다.
[알림: 주요인물(달리아)을 만났습 니다.]
저 애가 달리아인가 보다. 달리아 는 익숙한 몸짓으로 촛대에 불을 붙였다. 미약한 불빛에 비로소 달리 아가 제대로 보였다.
빛바랜 황금색 머리카락은 굽이굽 이 자연스럽게 말려서 가슴께까지 왔다. 서양인에 가까운 이목구비에 하얀 피부가 조화를 이루었다. 녹색 눈동자는 아직 반쯤 감겨있었다. 그모습마저 아름답게 느껴졌다. 화려 한 미인이었다.
"애들아, 일어나!"
달리아가 크게 소리치자 누워있던 아이들도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 다.
"빨리빨리! 오늘도 늦으면 크게 혼 날 거야!"
"알겠어, 달리아. 금방 간다구
촛불이 여러 개 켜지면서 방 안이 좀 밝아졌다. 하나같이 이국적인 외 양에 다양한 머리 색을 하고 있었 다.
"자, 준비 끝!"
"얼른 가자!"
"오늘 아침은 뭘까? 벌써 배고파 죽겠는데."
"메리, 네가 배고프지 않은 날이 있니?"
재잘재잘 떠드는 모습이 그 나이 또래 어린애들 같았다. 고작해야 17살이나 18살로밖에 안 보이는데.
"뭐 해, 리트?"
달리아가 다정하게 물었다. 나는 이제 간다며, 같이 가자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오늘 어쩐지 좀 멍해 보여.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그런 거 아냐. 그냥 잠이 좀 덜 깨서 그래."
어느 종교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얘길 들어보니 새벽 기도회는 매일 담당 수녀님들이 돌아가며 주도한 다고 했다.
나 참. 새벽같이 일어나는 이 짓을 매일 반복해야 한다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겐 좀 가혹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신에게 귀의하는 삶 이란 원래 그런 법이라고, 고생스럽 기 때문에 더욱 값지다고 얘기하는 달리아의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 다.
아침으로는 희멀건 감자수프가 나 왔다. 딱딱한 빵 한 덩이와 함께.
아침을 먹고 나면 다시 숙소에 가 서 잠시 쉬다가, 해가 뜨고 새가 지저귀는 때에 종교 공부를 시작했 다.
이들이 모시는 신에 대한 신화, 규 율, 진리. 그다지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옆에 서 달리아가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로 인해 문이 열리기 시작 하였고, 선택받은 힘을 가진 사람들 이 태어나게 됐죠. 그곳에서 '신의 조각'이 유래했습니다……
그때, 수업을 진행하던 수녀님이 달리아를 지목했다.
"달리아 양."
"네, 수녀님."
"훌륭한 학생인 달리아 양이지만, 좋은 친구를 사귀는 법은 아직 배 우지 못했나 보군요."
그 말에 퍼뜩 숙였던 고개를 들었 다. 나를 저격하는 말이었다.
"달리아 양의 훌륭한 인품으로 주 변 사람들을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 길 바랍니다."
"네, 수녀님……
달리아가 자리에 앉자, 나는 조그 맣게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달리아 가 괜찮다는 듯 슬며시 웃었다. 내 수업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날 직접 지적하면 될 것을, 왜 달 리아에게 이런단 말인가.
"여러분은 모두 신의 조각을 받아 들이기 위해 이곳에 있습니다."
그랬군. 처음 듣는 얘기지만 알고 있었던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길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신 의 품 안에서 함께하기 위해 이곳 에 오지 않았습니까."
"네, 수녀님."
나를 뺀 나머지 아이들이 입을 모 아 답했다. 어리둥절한 건 나뿐인 모양이다.
"새벽같이 기도하며 육신을 정갈 히 하고, 마음가짐은 바르게 정신은 맑게! ……그렇게 해야 비로소 신 의 조각을 받는 그릇이 되는 겁니 다."
"네, 수녀님."
"신의 조각을 받으면 여러분은 온 세상을 굽어살피고 신의 뜻을 잇는 '성녀'가 될 것입니다."
"네, 수녀님."
"지금의 성녀님께서 몸이 편찮으 시니, 여러분 중에서 그 그릇이 나 와야 하는데…… 큰 것은 볼 줄 모 르고 눈앞의 편안함에 취하는 모습 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수녀님이 날 똑바로 응시하며 마 지막 말을 이었다.
"이 신학교는 외부와 단절된 곳입
니다. 오로지 신께 경배하며 모든 것을 바치는 곳이지요. 밖에서의 가 족, 신분, 배움…… 이런 것은 아무 런 의미가 없습니다. 밖에서의 삶을 모두 벗어던지고 그릇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 그것이 여러분의 임무 이자 숙명입니다. 명심하세요."
그렇게 말한 뒤 수녀님은 뒤돌아 교실을 빠져나갔다.
신의 조각, 그릇, 성녀, 외부와의 단절……. 이거 구린 냄새가 심하게 났다.
하루 종일 수업을 듣고 나자 온몸 에 진이 빠졌다. 정신적으로 매우 지쳤다. 알지도 못하는 교리를 알아 듣는 척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 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 었다. 숙소의 창을 통해 석양이 보 였다.
"이제 뭐 없지?"
"웅. 저녁 기도 잠깐 하고 자자."
계속되는 수업이 두려워서 물으니 달리아가 아직 일정이 하나 더 남 았다고 태연히 답했다. 젠장. 성직 자의 길, 너무 고되다. 새삼 조연호가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가 성직자인 것은 아니지만.
저녁 기도는 숙소 방별로 조그맣 게 진행됐다. 우리 6명은 동그랗게 모여앉아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 했다.
초저녁쯤인 것 같은 시간에 다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시계도, 거울도 없는 것이 아주 기묘했다. 누워서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완전히 잠들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들도 이 신학교 안에 있 을까?'
신학교보단 수녀원에 가깝다는 생
각을 했다. 남자가 전혀 보이질 않 았으니까. 아이들 얘길 들어보면 신 부님들이 종종 오실 때도 있지만, 그분들은 항상 바빠 잘 보이지 않 는다고 했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뭔가를 연구하는 중이라고. 분명 우 리를 그릇으로 삼기 위해 노력하실 거라며, 아이들이 웃었다.
'그럼 김기택이나 전청운은 신부님 역할을 배당받았으려나. 순하랑도 아마 중등부 쪽에 있을 것 같은 데……. 혜원 언니는 그럼 수녀님? 아직 본 적은 없지만, 오늘 본 수 녀님들이 전부는 아닌 것 같으니 까.'
이들과 만나 서로의 위치를 확인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런 스테이 지형에 진입했을 때, 동료를 먼저 찾는 건 기본적인 철칙이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프로 헌터니 눈치껏 잘 행동하고 있겠지 만.
'조연호는 저번에도 같이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으니 이번에도 마찬가 지겠지.'
조연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찾으면 될 것 같았다.
아이들이 새근새근 잠에 빠져든 것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 수녀들이 교대로 순찰을 돈다고 했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자, 촛불 이 없어도 흐릿하게 윤곽이 보였다. 하지만 제일 간단한 방법은 이거다.
'공간 간섭'
고유 스킬을 발동하자 빠르게 주 변 상황이 파악됐다. 적어도 이 앞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갔다. 목적 지는 우선 신부들이 기거한다는 고 층이다. 꼭대기 층은 신부들 전용 기도실이며, 그 아래 2개의 층에 신부들이 기거한다고 했다. 그러니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뭐든 발견할수 있을 거다.
'신부 쪽에 김기택과 전청운 둘 중 하나는 있을 확률이 높아. 혜원 언 니랑 순하랑은 확실하지 않으니, 확 률이 높은 쪽부터 공략한다.'
막 계단에 오르려는 순간, 반대쪽 복도에서 불빛이 보였다.
'수녀다!'
수녀가 촛불을 들고 컴컴한 복도 를 걷고 있었다. 처음엔 순찰 중이 라 생각했지만, 옆에 어린아이가 딸 려왔다. 이름은 모르지만 나와 같은 수업을 듣던 아이였다. 딱딱하게 굳 은 얼굴로 말없이 수녀를 따라가고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지켜보았다.
둘은 말없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 했다. 꺼림칙한 느낌에 발소리를 죽 여 그들을 미행했다.
한 층, 두 층, 세 층…… 차근차근 올라갔다. 신부들의 방이 있는 충 역시 지나치고 꼭대기로 향한다. 대 체 왜? 꼭대기는 신부들의 기도실 이라 했는데…… 수녀와 아직 수녀 도 되지 못한 어린애가 갈 만한 일 이 뭐가 있단 말인가.
수녀는 문고리를 들어 똑똑, 노크 했다. 이윽고 꼭대기 층의 문이 열렸다.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종교적인 인사를 주고받고, 수녀가 아이를 방에 떠밀었다. 아이가 깡마 른 팔을 뻗어 수녀의 옷깃을 붙잡 았으나 차갑게 내쳐졌다.
수녀가 그대로 뒤돌아 계단을 내 려가기에, 서둘러 천장에 달라붙어 숨었다. 문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아야 했다. 끔찍한 예감이 들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문의 열쇠구멍 에 슬며시 눈을 갖다 댔다. 캄캄한계단과 다르게 안쪽은 불빛이 환했 다. 대낮이라도 되는 것처럼. 잠시 눈이 적웅을 못 해 인상을 찌푸렸 고, 이윽고 안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이가 가운데 구속되어 있었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팔다리 가 의자에 단단히 고정된 채 입에 는 헝겊을 물고 있었다. 공포에 질 린 얼굴이었다. 아이는 앞으로 다가 올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것 같았 다.
단정한 예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번갈아 아이의 머리에 대고 축복을 중얼거렸다. 의식이 끝나자,아이의 손가락을 잘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