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팔랑. 책 페이지 넘어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났다. 그래. 내가 불렀 지.
까마귀에게 준 서신에는 분명 그 런 내용이 담겨있었다.
"납치해달라고, 할 얘기가 있으니 만나서 하고 싶다고. 맹랑하게 굴던 모습은 어디로 갔지."
재수 없는 자식. 혀에 기름칠이라 도 한 듯 고상하게 구는 꼴을 보면 절로 토악질이 나올 것 같다. 인간 같지 않은 아름다움을 겉가죽에 뒤 집어써 그 본질을 흐릴 때가 많으 나, 이 취향 나쁜 보스 몬스터는 내 스승의 원수였다.
"자길 납치해달라는 인간은 처음 봤다. 긴 생을 산 내게도 아직 처 음인 일이 있더군."
그거 영광이다. 내가 아주 희대의 미친 인간으로 기억되겠군.
"그래서."
그가 책을 덮고 날 응시했다.
"할 말이란 게 뭐지?"
붉은 눈동자가 날 옭아매듯 샅샅 이 관찰한다. 곧장 카람빗에 성수를 발라 휘두르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아냈다.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물 론 휘둘러봤자 이 무른 육신으로는 닿지도 못하고 사라지겠지만.
"나랑 거래하자."
"주제를 파악할 필요가 있군."
김기택에게 들은 것 같은 이야기 다. 표현이 좀 더 고급스러웠지만.
"당신이 흥미로워할 정보를 갖고 있는데도?"
"난 대부분의 것에 흥미가 없어."
그런 얼굴이긴 했다. 하지만 그의 유일한 취미를 내가 알고 있지 않 은가.
"나한텐 홍미가 있잖아."
가지고 놀면 재밌는 장난감, 정도 겠지만.
"고작 그런 얄팍한 감정에 의지해 제 목숨을 배팅하다니. 어리석구 나."
"당신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
그가 내 의중을 살피려는 듯 잠시 침묵했다. 무슨 의미인가 싶겠지.
허풍인지, 정말로 무엇을 알아냈는 지 의심스러울 테고.
회귀 전에도 나는 이 게이트에서 불편한 진실을 알아버렸다. 정부에 서도 슬쩍 '혹시 그런 건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가설만 제시하던 때에, 놈들의 속셈을 정면으로 마주 해버렸다.
"톨룩. 오염된 이데아. 그곳에서 왔잖아."
"우리 쪽에 배신자가 있는 모양이 지."
"마음대로 생각해."
톨룩.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그
렇게 불렀다. 우리가 이곳을 지구라 고 부르는 것처럼. 그 끝을 모를 정도로 드넓게 펼쳐진 대륙 땅덩어 리, 그들의 삶의 터전은 그렇게 불 렸다.
간단한 얘기다. 톨룩은 오염됐고, 생명체가 살아가기 힘든 환경으로 변했다.
그래서 톨룩의 생명체들은 살아남 기 위해 다른 곳에 눈을 돌렸다. 그게 바로 이곳. '지구'다.
게이트는 천재지변이나 신벌 따위 가 아니었다. 톨룩의 침입, 침범. 우리를 굴복시켜 자신들의 노예로삼고자 하는 정복 전쟁의 신호탄이 었던 거다.
물론 톨룩이 예상하지 못했던 일 이 바로, 게이트가 생기면서 우리 쪽에도 각성자가 생기기 시작한 것 이다. 그래서 살살 간을 보며 전쟁 을 준비하고 있는 거지.
"당신은 인간들을 싫어하지?"
벨제부브는 재밌는 인간, 관찰하기 좋은 대상을 향한 집착과 별개로, 인간의 집단을 싫어했다. 인간들이 뭉치기 시작하면 오만해지고, 아집 을 부리고, 주제를 모르고 날뛴다 고, 경멸하듯 말하곤 했다. 그러면서 혜원 언니의 동료들을 죄다 죽 여버렸지.
당장 연합군이랍시고, 숫자가 제일 많아 머리 위에서 떵떵거리고 싶어 하는 인간들이 아주 거슬릴 것이다.
"톨룩 연합군 수뇌부의 치부를 내 가 알고 있다면?"
그제야 그가 구미 당긴다는 얼굴 을 했다.
"그 정보를 어떻게 믿지?"
"내 목을 걸게."
그 정도는 각오하고 왔다.
"나한텐 아무 의미도 없는데."
"정보가 진짜면 당신한테도 의미 가 있을걸?"
지구와 톨룩은 오랜 시간 대치해 왔다. 처음에는 슬금슬금 움직이던 놈들은, 5년 뒤에 보다 노골적으로 행동하면서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 뚜렷하게 각인시켰다. 그렇게 전쟁 을 벌이다 보면 알고 싶지 않은 것 들도 알게 되기 마련이다.
톨룩은 지구와 다르다. 우리가 모 두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족인 것 과 달리 저쪽은 이종족이 존재한다. 내 숙적이었던 귀뾰족 놈도 인간이 아니라 엘프였다. 눈앞의 벨제부브 는 마족이고. 그리고 당장 오염 때문에 목숨이 위험하니 한데 뭉쳤지 만 이들은 원래 사이가 썩 좋지 않 았다.
그러니 한 팀이어도 그 안에서 갖 은 정치질이 하루 이틀 벌어지는 게 아니었다.
회귀 전에도 놈들이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운다는 애길 들으면 기 쁨의 축배를 들었지. 적의 불행은 곧 아군의 행복이 아닌가. 그때 한 창 주워들은 정보들이 많았다. 개중 하나가, 크게 터졌던 연합군 수뇌부 들의 비리병역 논란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연합군 수뇌부들은
일명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따라 자신의 친자식 한 명은 전쟁터에 내보내는 것이 의무였다.
하지만 누가 제 자식을 전쟁에 내 몰고 싶겠는가? 그래서 한 명 두 명 편법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고아 를 아주 어릴 때 입양해 자식처럼 키운 다음, 친자식을 대신해 전쟁터 에 보내는 거다.
친자식들은 죄다 뒤로 빼돌렸다는 부패가 밝혀지면서 내부적으로도 한바탕 물갈이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전쟁이 본격화되지 않았으 니 많은 숫자는 아니겠지만. 최소한
수뇌부들 중 제일 꼭대기 놈들은 탈탈 털리겠지.'
이 정보는 아주 값지다. 주먹 한번 휘두르면 나가떨어질 내가, 그에게 거래를 요구할 수 있을 정도로.
"네가 원하는 건?"
"딱 하나."
내가 목숨 걸고 여기까지 와, 얼굴 도 마주하기 싫은 이놈과 대화까지 나누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내 스승 님. 당신을 이번만큼은 살려내기 위 해.
어쩌면 내가 회귀한 것도,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닐까. 어쩌면 이모든 게 죽기 직전에 꾸는 꿈 같은 것이며, 당신을 잃지 않길 바라던 내 후회가 빚어낸 환상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휘몰아친다. 결론은 단 하나다.
"역천의 표혜원은, 손끝 하나 건드 리지 마?
내 말이 끝나자 그가 미묘한 얼굴 을 했다. 여기서 왜 그 이름을 말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다.
"건드릴 생각도 없었다만……
"케르베로스의 맹약에 대고 맹세 해. 그러면 정보를 넘겨주겠어."
"고작 그걸로 괜찮은 건가?"
"충분해."
내 전부를 바쳐도 좋다.
"설마 갑자기 소금 사막으로 떠났 던 이유가…… 정말 그 여자를 만 나기 위해서였나?"
믿기지 않는다는 어투였다. 그가 날 관찰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막상 말로 들으니 좀 소름이 끼친 다.
"그렇다고 하면?"
"하.…"
허탈한 웃음이다.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그쪽이었나……
그렇게 말하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워낙 그림 같은 얼굴이 라 그것도 잘 어울리긴 했으나, 미 적 감각과 별개로 이 자식과 마주 하고 있으면 속이 더부룩하다. 한 대만 치면 소원이 없을 텐데.
"좋아. 맹세하지. 대신, 네가 날 아 주 재밌게 해줘야 할 거야."
뒷말이 아주 섬뜩했다.
3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하던 스승 님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 만, 견뎌내야 했다. 이 맹세만 성사 시키면 함께 움직여도 혜원 언니만큼은 무사할 거다. 그래. 그렇다면 역천과 동행해도 괜찮지 않을까?
" 마음대로."
그렇게 우리는 거래를 맺었다.
품 안의 성수를 사용하는 일이 없 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들어주지 않 는다 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목 숨 걸고 싸워볼 생각이었는데. 내게 흥미가 있으니 죽이진 않았을 테고. 그 틈을 이용하면 혹시 모르지 않 는가.
이윽고 다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나는 천막으로 돌아와 누워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조심스러운 손길로 천막을 걷고 밖으로 나섰다. 오랜만에 보는 것처 럼, 나를 비추는 햇빛이 아주 낯설 게 느껴졌다. 어두컴컴한 놈의 저택 에 있다 와서일까. 눈이 적웅을 못 하고 빛무리가 번지는 것만 보였다. 인상을 찌푸리며 손으로 햇빛을 가 렸다가, 겨우 앞을 바라보니.
덜컹.
솥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났다. 저
녁식사 중이었는지, 아주 피곤한 기 색으로 음식을 퍼먹던 사람들이 그 대로 멈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3일 동안 밤을 새웠더 니 헛것도 보이는 모양이야."
혜원 언니가 다크서클이 잔뜩 생 긴 안색으로 제 볼 좀 꼬집으라며 정상준을 툭툭 쳤다.
"어? 뭐야. 너까지 왜 그래? 너도 설마 저 헛것이 보이냐?"
고요한 와중에 불꽃 튀는 소리가 요란한데, 혜원 언니 홀로 반쯤 넋 을 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 단체로 헛것을 보나? 혹시 이 수프에 들어간 버섯이 광대버섯이냐? 어……. 아닌데……. 근데 왜 서하 가 보이지…….
"혜원 언니."
"야야야. 이젠 나한테 말까지 건 다."
웃기지 않냐면서 정상준을 툭 치 는데, 그도 넋을 빼고 있어서 그대 로 옆으로 엎어졌다. 식기 떨어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그제야 혜 원 언니도 어라, 하면서 제 볼을 꼬집었다. 아파서 찡그린 뒤에야 꿈 이 아니란 걸 깨달은 모양이다.
"저 돌아왔어요."
"어……어어……
목소리에 울먹울먹 울음기가 맺혔 다. 와락! 다음 순간, 나는 어느새 혜원 언니의 품에 안겨있었다.
"서하야……. 어디 갔었어……. 너 진짜 열심히 찾았는데, 진짜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다들 네가, 보스 몹한테 끌려간 줄 알고……
꼭 껴안는 손길이 아주 다급했다. 나는 격한 반응에 어안이 벙벙해서, 잠시 멍하니 있다가 두 손을 언니 의 등에 대고 마주 끌어안았다. 손 안에 가득 담기는 온기에, 나는 그 제서야 실감했다.
아. 드디어 살렸다.
벨제부브가 언니에게 손을 쓰지 못하는 이상, 놈이 나한테 어떤 수 작질을 해도, 어떤 몬스터를 보내도 안심이다. 그래. 이제야, 아주 기나 긴 길을 돌아 지금에 와서야 내가 스승님을 지켜낸 것이다. 살려냈다.
당신이 저번에 날 구한 것처럼. 이 번엔 내가 당신을 구해냈다.
"저 왔어요. 살아서……
살아있었다. 우리 둘 다. 이것이 얼마나 찬란한 기적인지, 나만이 알 았다.
거의 3일이었다. 내겐 찰나와도 같 았던 시간이.
아마도 그 개자식이 날 재우려고 쓴 약물 때문에 오래 잠들었거나, 놈이 머무는 곳의 시공간 축이 무 너져있어 시간이 다르게 흘렀을 거 다.
이 게이트 안에선 하도 기괴한 일 이 많아,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특히나 보스몹의 서식지라면.
"자, 그래서."
재회의 기쁨도 잠시.
나는 곧장 다른 막사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홍염의 사람들과 함께. 이들도 3일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 는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말끔하게 다니던 김기택도 잘 세팅한 머리를 풀어헤치고 듬성듬성 수염이 난 상 태였고, 전청운은 입술이 부르트고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순하랑도 로 브 아래 신발이 흙으로 얼룩덜룩했 다.
"보스 몬스터에게 끌려가서 사라
졌던 거라고요……. 갑자기 그 보스 몬스터가 왜 서하 씨를 데려갔고, 어떤 목적으로 다시 되돌려 놓은 겁니까? 가서 무엇을 봤죠? 서식지 가 어딘지 알 것 같습니까?"
김기택이 따발총처럼 질문을 연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