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시작이 게이트라곤 안 했잖아요-18화 (18/361)

18화

흑마법사는 기본적으로 마족과 계 약해 그들의 힘을 끌어다 쓰는 족 속들이다. 마족에게 붙은, 일종의 배신자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배신자. 놈들을 족칠 때 들 었던 얘기가 분명…….

" 아."

"무슨 일이지? 보스 몬스터가 뭔 가 연락을 취했나?"

허공에 대고 작게 탄성을 내뱉자, 전청운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 는 연신 내게 보스몹의 연락이냐고 캐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별일 아니라고 일축했다. 그러자 그는 몹 시 실망한 기색으로 자리에 앉았다. 무표정인데 속내가 다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나는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생각에 잠겼다. 아주 기발한 아이디 어가 떠올라버렸다.

* * *

혹마법사가 마족과 최초의 계약을 맺을 때, 이들은 게이트 안에 있어 야 한다. 게이트 내부가 경계가 가 장 희미한 곳이기 때문이다. 마족을 게이트 밖에서 불러낼 수 있었다면 그야말로 악몽이 도래했을 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마족을 소환할 때는 아주 까다로운 법칙이 뒤따른 다.

각 마족마다 계약 조건도, 부르는 방법도 조금씩 다르고. 그중에서도 고위 마족은 정보가 극히 제한되어있어서, 임의로 소환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작은 사역마는 경우가 다르지.

내 천막 밖에서 불침번을 서는 꼬 마 마법사님을 잠시 확인하고, 그대 로 안으로 들어왔다. 작은 쪽지를 보내줄 사역마쯤 계약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그 녀석을 배불리 먹 일 피만 충분하다면.

'흑마법은 금기이긴 하지만.'

내가 회귀하기 직전에는 금기고 뭐고 가릴 처지가 아니라 사역마와 계약하는 일이 많았다. 사역마를 통한 연락은 도청당할 일이 없기 때 문에 중요한 일을 전할 때 요긴했 다.

스윽"

카람빗으로 팔뚝을 그었다. 소리 없이 매끈하게 살갗이 갈라진다. 잘 관리해둔 덕택이다. 피가 바닥에 흐 르지 않게 컵에 받쳐 담으니 그 양 이 적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그리기 힘들긴 하지만…… 이불을 걷어내 고 침대 시트를 빼내 뒤집었다.

바닥에 깔고 그 위로 피를 물감 삼아, 손가락을 붓 삼아 문양을 그 리기 시작했다.

기하학적인 문양이 복잡하게 얽혀 든다. 나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지 만, 고대 마족의 언어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애초에 이쪽 세계의 것이 아니니 마족을 소환했던 이들 도 아마 지구의 인간은 아니겠지만.

완성된 문양 위에서 일정한 음율 의 주문을 읊으며, 피를 정해진 위 치마다 부어 넣는다. 그러면 놀랍게 도, 천 위에서 흘러내릴 것 같은 핏물들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진다. 핏물을 감쪽같이 도둑맞 는 이 현상이 마계와 잘 연결됐다는 중거다.

"■■■. 나의 이름을 걸고,"

카람빗으로 새로운 상처를 내 뜨 거운 피를 바친다.

"나의 육신을 걸고,"

마지막으로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툭 치고, 그대로 바닥을 훑는다.

"나의 영혼을 바치노니."

화악!

문양 위로 환영이 비친다. 확 치솟 는 불꽃이 금방이라도 날 덮칠 것 처럼 일렁인다. 뜨거운 불꽃이 타오 르는 형상이지만 이건 진짜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미지에 불과하다. 마계와 연결됐다 하더라도, 마계의 일부를 재현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 까악!

불꽃을 헤치고 검은 까마귀가 모 습을 드러냈다.

회귀 전에도 지옥에 서식하는 이 까마귀, 그러니까 언랭크 등급 의…… '붉은부리까마귀'와 계약을 했었다. 이 녀석들은 똑똑하고 주인 을 가릴 줄 알아 대중적으로 쓰였 던 사역마다.

내 주위를 한 바퀴 돈 까마귀는 까악, 하고 내게 보채듯이 작게 울었다. 혹여나 밖에 들릴까 봐 쉬이,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해줬다. 그리 고 문양을 그리다 남은 핏물을 보 여주자 환장하며 머리를 박아 꿀꺽 꿀꺽 삼키기 시작했다.

붉은부리까마귀의 부리는 사실 붉 은색이 아니라 흰색이다. 피가 주식 이라 물들어 붉게 보일 뿐이다. 이 녀석들은 소환과 계약이 간편한 게 장점이다. 물론 인간이 한 번에 빼 낼 수 있는 피의 양은 한계가 있으 니 계약은 2마리가 최대지만.

녀석이 배부르게 먹고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미리 준비해둔 편지를 다리에 꼼꼼하게 묶어줬다. 그리고머리에 손을 대고, 누구에게 가야 하는지 목적지를 알려줬다.

나는 그 자식이 어디 있는지 몰라 도 같은 권속인 이 아이는 알 것이 다. 붉은 어둠의 권속. 그 이름값이 있으니 말이다.

"부탁할게."

_ 까악!

까마귀가 가볍게 대답하고는 계약 진을 통해 스르르 사라졌다. 편지가 전해지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3일? 일주일? 그 안에 모든 준비를 끝마 쳐야 했다.

* * *

"조연호."

내가 그를 부르자, 뒤돌아 바라본 다. 다친 이후로 그가 묘하게 날 피해 다녔기 때문에 정면으로 얼굴 을 마주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왜? 나 바쁜데."

그가 눈길을 피하며 바쁜 척을 해 댔다. 딱히 그렇지도 않은 걸 다 아는데. 옆에서 다른 사람이 '연호 야, 괜찮아. 여긴 내가 마무리할게.' 하고 말을 얹자 '아, 형!' 하며 성질을 부려댔다.

"뭔 일이야."

내가 용건을 꺼내기 전에 그가 눈 꼬리를 날카롭게 올리면서 다른 말 을 덧붙였다.

"근데, 저 꼬마도 옆에 달고 말해 야 하냐?"

내 옆에 가만히 서 있던 어린 여 자아이, 순하랑에게 갑자기 시비다.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순하랑은 대꾸 한 마디 없었다.

"상관없어. 부탁할 게 있어서 온 거야."

나는 개의치 않고 말문을 열었다. 단편적인 정보로 알아낼 일이 아니 니 순하랑이 들어도 상관없었다.

"부탁? 네가?"

내 말에 조연호가 뜻밖이라는 듯 짐짓 놀란 얼굴을 했다. 내가 누구 한테 부탁이란 걸 잘 안 하긴 했 지.

"혹시…… 성수를 만들 수 있어?"

"성수'?"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력이 담긴 물을 통틀어 성수라고 부른다. 신성 력을 물질에 담아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대부분 고위 힐러만 가 능한 일이다. 포션 대용으로 쓰이기 도 하지만, 무엇보다 언데드나 마족 들에게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 었다.

"아주 미약하게는."

사실 크게 기대하지 않고 물어본 건데, 가능하다고? 생각보다 조연 호가 고위 힐러였던 모양이다. 나는 조연호의 두 손을 꽉 잡으며 절절 하게 애원했다.

"혹시 좀 준비해줄 수 있어?"

"야, 이것 좀 놓고……!"

그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걸

힘으로 잡아 눌렀다.

"준비해줄 수, 있어?"

조연호는 탁, 손을 뿌리치더니 알 겠다며 퉁명스레 답했다.

"정말? 고마워!"

"어어……. 요즘 다쳐 오는 사람도 없으니까 크게 어려울 건 없는데, 그건 왜?"

"혹시 몰라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대체."

조연호는 툴툴거리면서도 이틀 뒤 에 주겠다며, 그때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쓸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미약하 긴 해도 없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이 게이트에서 무사히 나가면 뭘 할 겁니까?"

내 옆을 지키던 김기택이 불쑥 물 었다.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글쎄요."

아마 다시 헌터 일을 하려나. 모르 는 척, 그냥 평범한 삶을 살아갈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다. 헌터의삶이 치열하고 고통스럽다는 건 분 명한 사실이니까. 그러나,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 다가오고 있 지 않은가. 그걸 생각하면…….

"헌터가 될 생각은 없습니까?"

독심술이라도 쓰나.

"헌터요?"

하지만 지금 나는 일개 각성자일 뿐이라 맹하니 되물을 수밖에 없었 다.

"홍염은 재능 있어 보이는 신입 각성자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 하고 있죠. 알고 있습니까?"

"네, 뭐. 알고는 있죠."

거대길드가 자신들의 전속 헌터를 육성하는 사설 아카데미를 운영하 는 건 그다지 비밀도 아니다. 그 사설 아카데미는 국립 아카데미와 다르게 길드의 후원으로 먹고 자고 입으며, 그 대신 길드에 평생 충성 할 것을 맹세하도록 강요받는다.

"내가 당신을 추천한다면, 어떨 거 같습니까?"

그가 알 수 없는 눈빛을 했다. 뭘 보고 그러는진 대충 알겠다.

역천과 함께 이동하면서 나도 마 냥 놀고먹지는 않았다. 도나 E급은나 혼자서도 잡을 수 있으니, 옆에 감시자들을 데리고서도 간혹 나가 몬스터 고기를 얻어오곤 했다. 마냥 얻어먹는 것도 찔리니까.

그 모습을 유심히 봤을 테고, 쥐새 끼들과 싸운 얘기도 전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홍염에는 관심 없어요."

홍염에 소속될 생각은 없었다. 내 겐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의 길드 가 필요하다.

"숨 막히거든요."

홍염을 비롯한 여러 거대 길드는 규모가 큰 만큼, 통제를 위해 엄격한 위계질서를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개인보다 길드 차원의 의뢰 를 우선시하며, 헌터 자신이 아닌 길드를 위한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역천에서 표연원을 거의 바지사장 으로 두고 나 홀로 날아다녔던 경 험이 있기 때문에, 그런 꽉 막힌 분위기는 사양이었다. 애초에 내 능 력은, 보다 자유로울 때 그 진가가 발휘된다.

"홍염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요."

"대충은 알죠."

"그렇다면 이게 얼마나 큰 기회인 지도 알고 있겠죠?"

내가 진짜 신입 각성자라면 다시 없을 기회일 것이다.

대형 길드의 스카우트 제의라. 수 많은 각성자들이 꿈에 그리는 장면 아니던가. 중소 길드에서 일하는 프 로 헌터 중에도 어떻게든 홍염의 눈에 들고 싶어 안달 내는 사람이 많을 거다. 그러니 홍염에서 경력을 시작하는 건 일종의 엘리트 코스다.

그러나 난 엘리트 코스가 아닌 방 법으로 정상에 닿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고작 길드의 이름 따위,개인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아무 런 의미도 없었다.

"그래도 관심 없어요."

" 왜죠?"

그가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는 말 투로 물었다. 거부당한 적 없는 거 대 길드의 오만함이었다.

"뜨거운 걸 싫어하거든요."

말장난을 치며 살짝 웃었다.

까마귀를 보내고 5일쯤 지났을까. 언제쯤 반응이 올까, 지루하게 기다 리던 때였다. 평소처럼 잠자리에 들 었고 천막 밖에는 전청운이 대기하 고 있었다. 조금 더 있다가 김기택 이나 순하랑과 교대할 터였다.

품 안에 조연호에게서 받은 성수 를 챙기고, 카람빗을 허리춤에 매고 잠에 들었다.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한 채 스 르르 잠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이제 깨어났군."

내 앞에 벨제부브가 있었다.

뭐?

내가 꿈이라도 꾸는 걸까. 지나치 게 현실감이 없었다.

구색을 겨우 갖춘 천막과 삐걱거 리는 철제 침대가 아니라, 살갗에 닿는 느낌이 지나치게 부드러운 이 불보와 푹신한 매트리스 위였다.

대체 언제? 옮겨지는 줄도 몰랐다 는 건 심각하다. 반사적으로 허리춤 의 카람빗을 꺼내 들었다.

"왜 그러지?"

벨제부브는 잔뜩 경계하는 나를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그는 화려한 무늬가 음각, 양각으로 새겨진 의자에 앉아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테이블은 고풍스럽고 그 위에 놓인 찻잔에서 향기로운 내음이 났다. 중세 귀족이라도 된 것 같았다.

"날 부른 건 네가 아니었던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