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키긱키긱키긱키긱-
비웃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사방 에서 들렸다. 환청처럼 어질어질하 다.
- 인간들!
- 인간이다!
- 저 중에 있나?
- 있다!
말을 한다고?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몬스터는 최소 D급부터 나온다. D급 중에서 도 지능이 높은 편에 속하는 케르 베로스도 이만큼 완벽하게 언어를 구사하진 못한다. 이건, 상황이 영 좋지 않다는 뜻이다.
"젠장……. '흰꼬리칼날들쥐'들인
가."
조연호가 작게 중얼거렸다. 일명 작은 악마들이라 불리는 몬스터였 다. 신화 속 작은 요정들처럼 작고 똑똑하지만, 성질머리가 아주 고약하다. 기본적으로 마수에 속하는 몬 스터들이라 상처 부위 감염도 심각 해 까다로운 상대다.
-우린, 선물이다!
-주인님이 보낸 선물!
-마중? 초대?
"뭔 소리야, 저게?"
놈들이 거슬리는 소릴 하자 혜원 언니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그 사이에서 오롯이 나만이, 그 뜻을 알고 있었다.
'주인님'이라고? 이 게이트의 주인 은…… 벨제부브 그 녀석 아니던가! 벨제부브가 내게 보냈나? 선물 이랍시고? 미친 건가?
'내가 아니었으면 바로 죽었을 거 야.'
내가 헌터들과 있지 않았다면. 실 내체육관에 있는데 저딴 걸 선물이 라고 보냈다면, 아주 볼만했을 거 다. 죽기 직전까지 싸워야 했겠지.
'나 혼자 나오길 잘했어.'
그리고 한 가지가 확실해졌다.
그 빌어먹을 벨제부브는 아직까지 날 주시하고 있고, 회귀 전에 내 스승에게 그랬던 것처럼 날 장난감 처럼 갖고 놀 작정인 거다. 난도가한계 끝까지 치솟는 몬스터를 보내 는 건, 놈이 자주 쓰는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떠나야겠어.'
나와 같이 있으면 혜원 언니가 위 험해진다.
"쫑알쫑알 말이 많네."
혜원 언니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외쳤다.
"덤벼. 개자식들아!"
혜원 언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숲 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풀벌레 우 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내 숨소리가 가장 크게 들릴 지경이었다.
놈들은 지능적인 몬스터다. 하나하 나의 전투 능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지만, 적어도 수십에서 수백까지 무리 지어 생활하고 우두머리를 중 심으로 그럴듯한 전략을 구사하기 때문에 위험도가 높다. 힘은 약해도 저놈들에게 잘못 물리면 독과 감염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혜원 언니가 가볍게 점프했다.
그러나 착지 소리는 들리지 않았 다.
두둥실, 아주 가볍게 허공에 몸을 띄운다. 그녀의 고유 스킬이다. 공중 부양. 땅만 딛고 살아가는 인간 에게 허공이 허용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혜원 언니가 내 스승이 될 수 있었던 이유기도 하다. 공중 에서 싸우는 법을 아는 사람은 그 다지 많지 않으니.
진형은 어느새 동심원을 그렸다. 놈들이 숲을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 는 한가운데에 몰릴 수밖에.
휘익, 혜원 언니는 공중에서 가볍 게 한 바퀴 돌았다. 가뿐한 몸놀림 이었다. 손에는 가벼운 레이피어가 들려있다. 칼이라기엔 창에 가깝다. 베기보다 찌르기에 특화된 검이었 다.
제일 바깥쪽은 탱커들이 자리하고, 그 뒤에 근접 딜러, 그 뒤에 레인 저를 비롯한 원거리 딜러들이 위치 한다. 파티 레이드의 핵심이나 다름 없는 조연호는 한가운데 사령탑처 럼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놈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들쥐라고 이름 붙이긴 했지만, 놈 들은 쥐 머리와 작은 인간 같은 몸 통에 날개를 붙인 것처럼 생겼다. 하늘을 날 수 있다는 뜻이다. 가장 먼저 표적이 된 것은 홀로 공중에 떠 있는 혜원 언니였다.
"레인저!"
새까만 안개처럼 뭉쳐서 날아오는 놈들을 레인저들이 다처리할 순 없었다. 수십 마리의 쥐새끼들이 혜 원 언니에게 향했다. 그때, 아래에 있던 정상준이 제 방패를 하늘에 던졌다.
텅!
"나이스!"
혜원 언니는 곧장 그것을 잡아채 고는 방패를 앞세워 몸을 던졌다. 선두에 있던 놈들은 방패에 짓뭉개 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나머지 는 순식간에 허공에 흩어졌다가, 뒤로 돌아 다시 뭉쳤다. 방패를 뒤돌 려 막아냈지만, 충돌의 충격으로 바 닥에 널브러졌다.
"윽……
걱정 어린 말을 건넬 틈도 없었다. 놈들이 다시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극적으로 몸을 허공에 띄 우며 피해냈다. 바닥에 꼬라박은 쥐 새끼들 두어 마리가 대신 나뒹굴었 다.
'프로 헌터가 확실히 빨라.'
보통 사람 같으면 다 피해내지도 못하고 피라냐 떼에 물린 물고기처 럼 구멍이 숭숭 났을 거다. 민첩이높고 공간 활용력이 뛰어나 시간을 끌 수 있는 거다. 그 과정에서 레 인저들이 들쥐들의 수를 차근차근 줄여나가고 있었다.
놈들은 혜원 언니를 공격하는 게 시간낭비란 걸 알아챈 모양이다. 잠 시 멈칫하더니 방향을 바꿔 우리 쪽으로 향했다.
키긱키긱키긱키긱 !
방패가 없는 정상준이 가장 먼저 표적이 되었다. 그가 빠르게 뒤로 빠졌지만, 그 때문에 진형에 틈이 생겼다.
콰드득!
"아악!"
"원거리 딜러들 더 뒤로 빠져! 근 딜 앞으로!"
유혈사태가 조금 있었지만 상황 파악이 더 빨랐다. 레인저들은 빠지 고, 근접 딜러들이 앞으로 나와 칼 과 단검 등으로 들쥐들을 난도질했 다.
키에엑…….
우리에게까지 다가오려는 쥐새끼 하나를 카람빗으로 잡았다. 촤악, 베어내자 핏줄기 같은 것이 튀었다.
-강하다. 인간.
-헌터, 헌터다!
-인간. 헌터들이랑 있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이제야 위기 감을 느낀 모양이다.
그래. 이 쥐새끼들이 여기서 멈추 면 등급에 비해 시시하지.
살아남은 놈들이 다시 숲 속으로 날아들어 그 안에 남아있던 것들과 합류했다. 으드득, 으둑, 하는 섬뜩 한 소리가 들리더니…….
-헌터들, 방해다!
거대한 몸체를 가진 몬스터가 새 롭게 튀어나왔다. 이 자식들은 위기감을 느끼면 이렇게…… 우두머리 에게 달라붙어 새로운 몬스터처럼 변한다.
팔뚝 정도였던 것들이 한데 뭉치 니 사람보다 5배는 더 큰 거구가 됐다. 나무를 한 손으로 꺾으며 등 장하니 위압감이 상당했다.
쿵쿵쿵!
묵직한 무게감에 걸을 때마다 땅 이 흔들렸다.
-키긱키긱키긱!
특유의 소름끼치는 소리가 났다.
"탱커들, 앞으로."
혜원 언니가 짧게 명령하자, 방패 를 건네받은 정상준을 필두로 탱커 들이 어그로를 끌기 시작했다. 한 사람에게 공격이 집중되면 위험하 기 때문에, 서로 적당히 분산하면서 방패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쿵, 쿵!
"생각보다 너무 강한데!"
"길드장님!"
놈이 주먹을 휘두르자 방패가 휠 정도였다. 제아무리 탱커들이라 할 지라도, 저걸 한 대 견뎌내면 두 번은 없을 거다.
"조금만 더 버텨줘!"
탱커들이 고군분투하는 사이, 레인 저들은 화살을 쏘고 칼을 다리에 쑤셔 넣었다. 혜원 언니 역시 공중 을 날다시피 하면서 놈의 목덜미에 긴 자상을 냈다.
쿠궁!
"으윽!"
"더, 이상은……!"
"아아악!"
외마디 소리와 함께, 탱커들이 무 너졌다. 조연호가 빠르게 힐링을 시 전했으나, 박살난 방패가 되돌아오지 않는 이상 크게 의미는 없었다. 다친 탱커들을 다급하게 뒤로 빼냈 다.
공격을 대신 맞아주는 사람이 없 어지자 딜러진이 무너지기 시작했 다. 기본적으로 딜러들은 몸이 약하 다. 한 대만 맞아도 생사를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긴장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저 뒤통수만 치 면 되는데, 후욱, 틈이 없네……
혜원 언니가 한쪽 눈을 찌푸리며 답했다. 이마에 생긴 찰과상에서 피 가 눈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처참한상황이었다. 앞을 막아줄 방패는 없 고, 사람들은 지쳐있었다.
그러나 약점인 뒤통수는 공중에 훤히 드러나 있었다. 접근만 하면 타격할 수 있다.
"뒤통수를 치면 되는 거죠?"
"무슨……. 서하야. 넌 나설 필요 없어. 이건 우리가……
"제 고유 스킬은 '공간 간섭'이에 요."
내 말에 혜원 언니가 멈칫했다. 그 녀도 알 거다. 단 한 번, 그 찌르기 가 필요한 상황에서 내 능력은 그 야말로 치트키에 가깝단 걸.
"……할 수 있겠어?"
옆구리에 피를 흘리던 여자가 옆 에서 물었다. 첫날 나를 동정하던 헌터 였다.
"할 수 있어요."
단호하게 말하자, 혜원 언니는 잠 시 고민하는 낯을 했다. 그러나 길 게 망설일 순 없었다. 어느새 앞에 있던 사람들도 다 휩쓸리고, 놈이 코앞까지 다가왔으니까.
조연호는 부상자를 치료하던 걸 멈추고 혜원 언니에게 스킬을 썼다. 소모한 체력이 모두 회복됐을 거다. 눈 위의 찰과상도 급속도로 아물어피가 멎었다.
"좋아. 내가 신호하면, 달려들어서 이걸로 찔러. 뒤통수에 틈이 있을 거야. 저것들도 완벽하게 합체할 순 없거든. 거길 찔러 넣으면 합체가 풀려. 알겠지?"
혜원 언니는 딱딱하게 굳은 핏자 국을 손으로 쓸어 넘기면서 말했다. 내 손에 혜원 언니의 검이 들렸고, 혜원 언니는 내 카람빗을 가져갔다. 언니는 카람빗을 두어 번 휘둘러보 더니 허공에 몸을 던졌다.
"다 비켜!"
겨우겨우 시간을 끌던 사람들이
혜원 언니가 오자 뒤로 물러섰다. 버티고 서는 게 고작일 정도로 부 상이 심각했다. 조연호가 다시 바빠 질 차례였다.
놈이 휘두르는 주먹을 가뿐하게 피했다. 그때마다 바닥이 파이고 나 무가 두 동강 났지만. 한 번이라도 맞으면 사람은 곤죽이 될 거다. 그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속에서 한 번, 두 번, 세 번, 피하기만 반복했다. 감질 나는지 흥분한 녀석이 큰 동 작을 취하려고 팔을 높이 들었다!
푸욱! 순식간에 혜원 언니가 안으 로 파고들어 카람빗으로 양 눈을 죄다 찢어발겼다. 아직 사용이 미숙한지 혜원 언니의 손아귀도 함께 베였지만, 그것에 시선을 둘 시간이 없었다.
"지금이야! 서하야!"
혜원 언니가 채 외치기도 전에, 나 는 이미 스킬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많은 양의 정보가 들이닥 쳤지만 휘청일 순 없었다. 익숙한 감각과 함께 눈을 감았다 뜨니.
나는 놈의 머리 위였다.
"서하야!"
푸욱!
아.
핏방울이 흩날렸다. 순간 감각이 멍했다. 귀가 응응거리고, 사방이 흔들려서 시야가 헛도는 것처럼 느 껴졌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지?
그리고 잠깐 벙벙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끔 찍한 고통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어억, 하고 비명을 내지를 수도 없 었다. 뇌가 흔들리는 것 같은 작열 통이, 말문을 막히게 했다.
허억!
놈의 꼬리가 내 다리를 꿰뚫고 있 었다.
하지만, 내겐 해야 할 일이 있었
다. 둔탁한 감각 속에서 통증만이 느껴졌다. 나는 아직 내 손에 레이 피어가 들려있음을 눈치챘다. 내 눈 앞에 놈의 틈새가 있는 것도.
고민은 짧았다.
착, 레이피어로 반대쪽 손을 베었 다. 얼얼한 고통만이 지금 내가 느 낄 수 있는 전부였다. 고통과 함께 손에 감각이 돌아왔지만, 어쩐지 계 속 멍했다. 아마도 다리를 통해 침 투한 독 중에 마비독이 있는 것 같 았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하나, 둘.
셋!
-키에에에엑! 케겍, 케에엑!
틈새에 레이피어를 꽂아 넣자, 커 다란 덩치가 허물어지듯이 해체됐 다. 내 허벅지를 뚫은 꼬리도 잘게 분해되면서 피가 울컥 치솟았다. 그 대로 땅에 내동댕이쳐진 채, 의식이 흐려지려는 순간이었다.
내 레이피어 끝에 걸린 쥐새끼 한 마리가 말을 전했다.
-선물은……키긱, 마음에 들었나? 키기기긱....
찢어 죽일 벨제부브. 조만간 내가 족쳐줄 테니…… 목 씻고 기다려 라…….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까무룩 정 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