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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시작이 게이트라곤 안 했잖아요-12화 (12/361)

12화

아직 해가 지나지 않아 19살이라 했지만 차분한 분위기와 냉정한 판 단력은 그 나이를 흐리게 만들었다. 어느새 무리는 한서하를 중심으로 흘러갔다.

그 압도적인 무력이란!

권성민은 내심 이 사람 옆에 딱 붙어있는 것만이 내가 살 길이라생각했다. 그러니 절대 떨어지지 말 고, 빌붙어서 어떻게든 살아남자고. 불침번을 서는 밤에 속으로 다짐했 다.

말했다시피, 한서하는 말이 없었 다.

몬스터가 튀어나오면 혼자 어떻게 든 해결해내곤 했지만, 그 과정에서 조금씩 스친 상처에도 별말이 없었 다. 정찰 스킬 때문에 설민준을 옆 에 끼고 다녔으나 그와도 자주 대 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구름무늬기름고래를 라이터로 화 려하게 지졌을 때는 정말 미쳤냐고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되돌아온 한서하가 너무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머리카락 일부가 불에 타버린 김태 병도 해맑게 웃고 있어서 그 물음 을 삼키고 다른 말을 꺼냈다.

"고생했어."

동시에 약간의 허무함이 몰려왔다.

"나도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내뱉고 나서 흠칫 놀랐다. 권성민 은 지금껏, 제 분수에 맞게 욕심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도움이 되고 싶다고? 내 주제에,

그런 생각을……

힘도 권력도 없는 그가 내뱉기엔 사치스러운 말이었다. 하지만 정작 한서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 치였다. 별 뜻 없는 겸양의 말로 생각한 것 같았다. 권성민은 그것도 어쩐지 속이 상했다. 스스로의 무기 력함에 은근한 불쾌감이 치솟았다.

그래서 실내체육관에 도달하고 최 우도와 대면했을 때는 실수하지 않 으려고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 모 른다.

"자네는 욕심이 많군."

최우도가 그를 그렇게 평했을 때.

"내 아래서 더 많은 걸 배워보는 게 어떤가……

권성민은 그제야 인식했다. 아. 욕 심이 났다.

한평생 제 분수를 알고 고개를 숙 여왔으나, 욕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서하. 그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 옆자리에 서고 싶다는 마음이 이렇 게나 커져 있었다.

♦ ♦ ♦

그는 한동안 정신없이 지냈다. 권 성민이 없던 시절 최우도 홀로 어 떻게 처리했던 건지, 정말 의문이 들 정도로 할일이 많았다. 매일매일 식료품과 식수를 배분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불침번 순서와 경비 교대 시간, 새롭게 들어온 생존자들은 기 존 체계 어디에 어떻게 끼워 넣을 지 정하는 일까지.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갈 정도였으 나, 뿌듯한 마음도 컸다. 권성민은 자신이 왕이라도 된 것처럼 느꼈다. 이 실내체육관에 그의 숨결이 닿지 않은 체계가 없었고, 그가 파악하지 못한 구성원이 없었다.

이 작은 공동체를 효율적으로 굴 리기 위한 인적 자원들이, 마치 기 계 부품처럼 머릿속에서 끼워 맞춰 졌다.

종종 한서하가 정찰을 마치고 보 고하러 들를 때마다, 최우도의 옆에 서서 그 보고를 들으며 말할 수 없 는 만족감을 느꼈다. 동등한 위치에 서서 어디를 보호하고 어디를 정찰 할지 대화를 나눌 때면, 미소를 짓 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옆에서 최우도는 그것을 보고 좋 을 때라며 우스갯소리를 했으나, 권 성민이 생각하기에 이건 동료애 겸 자아 표출이지, 연애감정은 아니었다.

케르베로스 토벌대에는 자의로 참 여했다. 한서하 혼자서도 충분히 지 휘하겠지만, 한동안 너무 체육관 안 에서만 지냈다는 이유로 자원했다. 한서하의 화려한 몸놀림을 다시금 실전에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 종의 팬심이었다.

-나의 주인……원한다…….

케르베로스가 감히 그딴 말을 지 껄였을 때.

-너와 만남을.

권성민은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제가 터무니없이 약했기 때문에.

한서하의 옆에 나란히 서고 싶어 발버둥 쳤는데, 현실은 이 모양이었 다. 죽음이 가까워 대화조차 끼어들 지 못하는 수준.

그 자괴감에 무너지려 할 때 한서 하가 결정적인 한 방을 날렸다.

"그럼 나는?"

" 뭐?"

애석하게도, 한서하는 전혀 예상 못 한 말을 들은 것처럼 되물었다. 네가 왜?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권성민은 바닥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래. 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일방적인 생각이고, 한서하에게 권성 민은 '일 잘하는 사무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걸.

그 노고를 치하할 순 있어도, 절대 그녀의 동료는 될 수 없다는 걸.

"서하는?"

"갔어. 인사도 없이."

권성민은 생각보다 차분한 자신에 게 놀랐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서였을까. 도리어 안유수가 제 분을못 이겨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갔구나……. 그래."

"뒤도 안 보고 떠난 것 같던데. 밤 에 그렇게 갑자기 가버리고."

비꼬는 어투지만, 권성민은 이게 안유라가 서운함을 표출하는 방법 인 걸 알았다. 그보다, 이 쌍둥이들 이 이른 아침부터 권성민을 찾아올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난 왜 찾아왔는데?"

"당신은 알고 있지. 서하 누나 어 디로 갔는지."

아하. 그런 용무신가. 권성민은 작 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 유능한 쌍 둥이들은 묘하게 한서하한테 집착 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긴, 이 천방 지축에 거만하기까지 한 쌍둥이들 을 다룰 수 있는 건 한서하가 유일 했으니. 수일 아저씨도 다룬다기보 단 휘둘리는 쪽에 가깝고 말이다.

"미안하지만 그건 알려줄 수 없 어."

사실 권성민도 잘 몰랐다. 한서하 가 철저히 입단속을 했기 때문이다. 목적지까지 여기에 착실히 보고할 이유는 없었겠지.

"왜? 우리까지 따라가 버릴까 봐?"

설핏 밴 비웃음이 날카롭다. 권성 민은 안유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하긴. 우리 없으면 이 체육관에 제대로 된 파수꾼도 없으니까."

분명 쌍둥이는 이 대피소에서 중 요한 전력이지만, 이것만큼은 권성 민도 강하게 말할 수 있었다.

"여길 나가면 너희가 서하처럼 혼 자 살아날 수 있을 거 같아?"

그 말에 안유수가 멈칫했다.

이 온실 속의 난초 같은 녀석들.

역설적이지만, 이 지옥 같은 약육강 식의 생태 속에서 녀석들은 곱게 자란 난초에 가깝다.

이 녀석들은 제 역할을 살린 역할 배분 체계에 익숙한 나머지, 사냥 외의 것에는 터무니없이 약하다.

당장 입고 있는 옷만 하더라도 가 사 일을 도맡아하는 분담원들이 해 주었을 텐데. 요리는 어떻고? 손질 만 할 줄 알지, 굽기 말고 제대로 된 요리를 할 줄은 알까?

"건방지게 굴지 마. 우리한테 너희 가 필요한 것처럼, 너희도 우리가 필요하잖아."

짧게 경고하자, 쌍둥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권성민은, 육체적 싸움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시스템의 힘 으로 찍어 누르면서. 새로운 길을 생각해냈다.

이제 와서 그가 힘을 단련해 한서 하의 옆에 서는 건 불가능하다.

죽을 각오를 해도 소용없는 것이 재능의 한계다. 안타깝게도 권성민 에게 그 길은 허락되지 않았으나, 그에게도 남들보다 특출한 분야는 분명 존재했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짜인 체계와

시스템. 그 안에서 인간은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한다.'

이 체육관은 소규모 공동체라, 한 서하가 마음대로 이탈하도록 내버 려둘 수밖에 없지만…… 이 게이트 전체에 강력한 시스템이 적용된다 면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게이 트를 나가서도 사회 전반에 그러한 체계가 스며든다면.

제아무리 한서하라 할지라도, 막강 한 권력에는 종속될 수밖에 없겠지.

권성민이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하얗게 내려앉은 것들을 밟으면 움푹 발자국이 패었다. 사브락, 사 브락, 하고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얼핏 광활하게 펼쳐진 설원처럼 보 이지만, 이건 눈이 아니다. '소금'이 다.

소금이 이렇게나 펼쳐져 있는 건 보기 드문 장관이다. 만약 게이트 밖에 존재했다면 유명한 관광지가 됐을지도 모른다. 이 소금은 일반적 인 현상은 아니라, 게이트 안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기이한 광경이었 다. 게이트 연구자들은 이게 게이트 화가 진행되면서 지구의 대기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종의 오 류가 아닐까 추정하고 있었다. 어찌 됐든 정확한 원인은 아무도 모른다.

"하아......

체육관에서 나온 지 딱 일주일 되 는 날이었다. 소금투성이인 이곳에 홀로 색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금바위……. 진짜 바위는 아니 고, 소금이 달라붙어 만들어진 덩어 리다. 하지만 소복하게 쌓인 소금들 과 달리 투명하게 빛났다. 불투명한 바위는 반쯤 소금에 파묻혀 있었지 만, 그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읍!"

바람이 불면서 입 안에 소금이 들 어왔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짠 맛에 왈칵 인상을 쓰고 퉤퉤 뱉어 냈다. 끔찍한 맛이다. 짠내에 코가 저릿할 지경이다.

소금바위 아래로 들어가 몸을 숨 겼다. 바위라고는 하지만 사실 동굴 에 가깝다. 바람 때문인지 뭔지, 가 운데에 사람이 몸을 숨길만 한 구 덩이가 패어 있기 때문이다.

'스승님께서 이 소금바위에 대한 얘길 하신 적이 있지……

체육관 근처에서 나와 마주치기

전에 이곳을 들렀다고 했으니, 곧 이 부근을 지나갈 것이다. 아직 일 주일은 더 버틸 수 있었다. 묵묵히 자리를 잡고 새하얀 소금 언덕들을 둘러봤다. 스승님, 언제쯤 오실는지 요.

* * *

사실. 스승님을 뵙게 되면 어떤 얼 굴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이 세계는 과 거로 회귀했으니, 내가 만날 스승님 은 더 이상 '나의' 스승님이 아니란걸. 나와의 추억도 없고 유대도 없 고 완전한 남에 가까우며, 내 기억 속의 스승님과 아주 다를 수도 있 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아니면…… 아주, 아주 희박한 확 률이라도. 스승님이 날 기억하고 있 을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만났던 사 람들이야 회귀 전에도 마주친 적 없거나 잘 몰랐던 인물들이지만. 스 승님만큼은 날 정확히 기억하고 계 실 테니까* * *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던 날, 나는 잠에서 깼다. 예민한 기감이 침입자 를 잡아냈기 때문이다.

두근두근 가슴이 떨렸다.

이 소금 사막 지역은 공격적인 몬 스터가 그다지 서식하지 않는 곳이 다. 고작해야 언랭크 등급인 소금지 네나 소금토끼 정도나 뛰어놀고 있 을 거다. 물론 근처에 먹을 게 없 으면 몬스터들이 이곳까지 침입하 긴 하지만.

그런고로 몬스터치고는 왜소한 형 체들이 느리게 움직이는 저 기척 은…… 내 스승이 속해 있는 무리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득히 멀리서 사람 그림자가 보 였다. 내가 저들을 알아본 만큼, 저 들도 날 인식했겠지. 생존자를 확인 하려고 다가오는 중일 거다.

선두에 선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 고, 상당히 많은 인원이 뒤따랐다. 갑작스레 게이트에 떨어진 일반인 들과 달리 철저히 무장을 해 얼굴 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소금 사막 지역에 나처럼 맨몸으로 들어 오는 건 바보 같은 짓이긴 했다.

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 컥하고 벅차올랐다. 그게 뭔지 나도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눈물 이 고이고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흥분감에 얼굴도 발갛게 달아올랐 다.

아득히 멀리서, 이제 얼굴이 슬쩍 엿보이는 저 멀리서 선두에 선 사 람이 무어라 소리쳤다. 잘 들리지 않았다. 심장소리가 귓가 바로 옆에 서 등등 울리고 있었으니까.

뭔가에 홀린 것처럼 소금바위 밖 으로 한 걸음 내딛자,

"어?"

발밑이 훅 꺼졌다.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바닥에 내

팽개쳐졌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게이트 안에서 이렇게 방심하다니. 멍청했다.

정체 모를 곳에 떨어진 건 아니었 고, 원뿔 모양으로 파인 바닥에 내 가 빠져들고 있었다. 저 가운데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몬스터가 바 로 보였다. 이런. 소금 사막에서 생 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몬스터 중 하나였다.

개미귀신처럼 깔때기 모양으로 함 정을 파 인간을 잡아먹는 몬스터. '소금귀신'이었다.

E등급으로 난도 자체는 높지 않

다. 끌려가서 입 한가운데에 단검을 찔러 넣으면, 그 이빨에 팔이 좀 다치겠지만 살아남을 순 있을 거다. 카람빗을 한 손에 들고 슬슬슬 흘 러내려가는 몸에 힘을 주어 자세를 바로 했다.

몬스터가 지척으로 다가오고, 네 갈래로 나뉜 입 안에 촘촘히 박힌 이빨이 매섭게 보였다. 잘못하면 팔 이 아작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다른 방도가 없 었다. 카람빗을 휘두르려는 순간이 었다.

-촤악!

"얘, 너 괜찮니?"

순식간에 소금귀신이 갈려 나갔다. 체액이 몇 방울 뺨에 튀었다. 아, 이 솜씨는. 고개를 들자 몬스터 사 체 위에 서 있는 여자가 보였다. 고운 천으로 얼굴을 둘러매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눈동자만큼은 선 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얀 설원 위에, 달빛을 등지고 선 헌터. 빛바랜 듯한 모래색 머리카락 이 바람 따라 흩날렸다.

표혜원.

나의 스승, 나의 후회.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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