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자살시도처럼 보일 테지. 그래도 가야만 했다. 쌍둥이들도 그럭저럭 실력이 붙었으니 이제부턴 둘이 대 련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독학할 수 있다. 권성민을 비롯한 다른 사 람들은 약하니 나를 따라오는 것보 단 여기서 경험을 쌓는 게 더 유익 하다. 그러니 홀로 떠날 수밖에.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어."
"부모님? 아니면 형제? 누가 됐든, 이렇게 시간이 지났으면…… 가망 이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둘 다 아니다. 내겐 부모도 형제도 없으니까. 아, 친척집을 전전하며 얹혀살 땐 그 비슷한 게 있긴 했 지.
"헌터야. 내가 찾는 사람은. 아마 도 이 게이트에 들어왔을 거고."
내 스승이 게이트에 들어오는 시 점이 이쯤이다. 나는 그녀를 만나러 가야 했다.
"안 들어왔으면 어떡하게. 만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데 꼭 위험을 무릅써야겠어……?"
"들어왔을 거고, 밖에 있는 몬스터 들 대부분은 나한테 큰 위협이 아 니야. 알잖아?"
E급이나 도급 몬스터들은 내 상대 가 아니다. 그는 되지도 않는 말로 날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제일 강한 전력이라 서? 물론 정찰조 하나가 리더를 잃 긴 하겠지만, 그건 쌍둥이가 한 명 씩 정찰조를 맡게 하면 될 일이었 다. 애초에 둘이 한 정찰조에 들어가는 게 비효율적인 구성이었지.
"……유수랑 유라는? 그 애들도 너를 잘 따르는데 갑자기 사라지면 얼마나 힘들겠어……
"그 애들도 어린 나이가 아니야. 18살이잖아. 유수가 유독 나를 따 르기는 하지만, 유라가 있으니 괜찮 을 거야."
그의 말을 끝까지 반박하자, 살짝 고개를 숙이고 마지막 말을 내뱉었 다. 떨리는 음성으로 자그맣게.
"그럼 나는?"
" 뭐?"
나도 모르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 다. 너무 의외인 말이었으니까.
권성민과 내가 초반부터 리더 비 슷하게 행동하면서 다른 이들보다 대화를 더 많이 나누고 친해지긴 했지만…… 이 실내체육관에 들어 온 이후로는 각자의 일에 충실하느 라 좀 소원해졌다. 어색한 정도는 아니어도, 나는 차라리 같은 정찰대 원인 설민준과 더 자주 마주쳤다. 권성민은 나와 다른 분야에서 일하 니 내게 의존할 이유도 전혀 없었 다.
그런데 흡사 내가 그를 버려두고 가는 것처럼 말하는 이유는 뭐란말인가?
"……떠나면, 우린 본 적 없는 사 이가 되는 거야. 알겠어?"
그가 나를 위협하듯이 낮게 으르 렁거렸다. 안타깝게도, 그는 나보다 약하다.
"뭐라 말해도 나는 떠날 거야."
단호하게 선언했다.
몬스터에게 습격당해 혼비백산했 던 첫째 날, 물류창고에 남을지 말 지 고민하는 사람들 앞에 서서 말 했던 것처럼. 나는 권성민이 뭐라 말해도 떠날 생각이었다. 더 냉정하 게 말하면, 내 결정에 그의 의사는필요치 않았다.
내 대답에 권성민이 얼굴을 싸늘 하게 굳히고 천막에서 나갔다. 펄 럭, 신경질적인 손길로 천을 거두어 냈다.
"이것 참…… 어려운 일이구만."
최우도가 흥미가 듬뿍 담긴 얼굴 을 했다. 이걸 되지도 않는 치정싸 움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정말로 권성민과 연애감정 비슷한 기류를 나눈 적이 없었다. 우리 사 이는 담백했고, 그 역시 친한 오빠 보다는 최우도의 오른팔이란 공적 인 위치에 걸맞게 행동하지 않았던가.
"떠날 때가 되면 다시 말씀드릴게 요. 제가 맡던 정찰조는 유수나 유 라한테 인수인계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정 가겠다면 나야 말릴 수 없 지…….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지도 않고."
정확했다. 그가 말린다 하더라도 별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남는 사람들에겐 잘 설명 해두는 게 좋을 거야……
최우도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고,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권성민이 과민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나머 지는 그렇게 어렵지 않으리라.
……라고 생각했건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나 보다.
"떠, 떠난다고? 그, 그렇구나……. 그래……. 서하는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송다정이 조금 넋을 뺀 어투로 중 얼거렸다. 역시 자신이 부족하다는 둥, 나를 이런 좁은 곳에 붙잡아둘 순 없는 거라는 둥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자존감이 낮은건 알았지만 이렇게 의기소침할 일 은 아닌데…….
"다정 언니는 잘해주고 있어. 이런 일을 겪을 줄 전혀 몰랐잖아. 그런 데 날 따라서 여기까지 왔고, 이 안에서도 성실하게 일하고 있으니 까."
"정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가가 발 갛게 달아올랐다. 토끼같이 동그란 눈을 더 땡그랗게 떴다.
"근데 왜…… 떠나? 우리가 너무 부족해서……? 역시 그래서 그런 거지?"
"그런 게 아니라니까.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
분명히 잘 설명해주었는데 왜 이 러는지 모르겠다. 송다정이라면 옷 으며 다녀오라고 말해줄 것 같아서 제일 먼저 찾아왔는데…….
"찾아야 하는 사람?"
날이 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날 카롭게 벼린 칼날처럼, 빈틈을 쑤시 는 타이밍이었다.
"그게 무슨 소린데?"
안유수. 엷은 갈색 머리카락이 달 빛을 받으면 금발처럼 하얗게 빛났다. 이국적인 모래색 눈동자가 이글 이글 타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런. 송다정에게 말한 다음 쌍둥이에 게 가려고 했는데, 엿듣는 식으로 알게 되어 화가 난 모양이다.
"안유수. 안 그래도 너한테도 말하 려고 했어. 나는 찾아야 하는 사람 이 있어서, 조만간……
"조만간, 뭐?"
목소리가 차갑다. 이쯤에서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쌍둥이는 건방 지고 얄미운 어투로 말하긴 해도, 이렇게까지 진지한 낯을 하는 애들 은 아니었다. 18살이라는 나이에걸맞게 자기들끼리 투닥거리지 않 았던가.
"……조만간 여길 떠날 거야."
하지만 저 애가 투정을 부린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다. 나는 이미 결심을 굳혔고, 누구도 꺾을 수 없 다. 내가 이렇게 딱 잘라 말하는 것은 통보에 가깝다. 나는 이렇게 할 테니, 너는 그리 알고 있으라는 식의 통보.
그걸 너도 모르진 않겠지.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안유수가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돌렸다. 배신감에 치를 떠는 듯한모습이다. 내가 저 둘 옆에서 영원 히 스승 노릇이라도 할 줄 알았던 걸까.
"너희 실력도 많이 늘었고, 나 없 어도 둘이 대련하면서 충분히 독학 할 수 있을 거야."
애초에 사람을 상대로 죽이지 않 고 제압하는 수준까지만 키우려 했 고, 충분한 성과를 올린 지 오래였 다. 이제 이 체육관에서 저 쌍둥이 를 체술로 이길 사람은 나 하나뿐 이니.
"가면 언제 오는데?"
전략을 바꿨는지 울음기 어린 목
소리로 물었다. 순식간에 울상인 얼 굴로 바꿔 보이는 것이 아주 작위 적이다.
"우리 다시 볼 순 있는 거야?"
이건... 꼭 애완동물을 버리고 가는 비정한 주인이라도 된 것 같 아서 기분이 영 찝찝했다.
"살아서 게이트 밖에서 만나자."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우회적인 답변이었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 다. 쌍둥이들은 이 게이트의 생존자 들이고, 회귀 전에도 종종 연합레이 드 때 마주하기도 했으니까. 최후의 결전에 같이 참전하기까지 했으니우리가 다시 마주하는 건 필연에 가깝다.
"……유라가 많이 슬퍼할 거야."
그러겠지.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 다. 벨제부브가 날 주시하고 있으 니, 내가 마냥 이곳에 있으면 이들 에게도 더 위험하다. 벨제부브는 날 위협하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걸 즐기고 싶을 테니. 이 무너지지 않 는 성곽을 무너뜨리려고 안간힘을 쓸 거다. 지금은 D급 몬스터 3마리 만 와도 다 쓸려 죽어버릴지도 모 른다.
"흐급……흡……
송다정이 애써 눈물을 참으려 하 지만 잘 되지 않는지 숨을 들이켜 는 소리를 연신 냈다.
"우리……홉! 게이트 밖에서…… 후, 다시…… 만나는 거다?"
아무래도 저 대사가 송다정의 심 금을 울린 모양이다. 그러자며 고개 를 끄덕이자 눈물을 쏟아내며 날 끌어안았다. 엉엉엉 소리 내어 오열 하기 시작하니, 조금 피곤해졌다. 이걸 언제 다 말하지?
* * *
"언니, 우리 버리고 가면 10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짓무른 눈가를 하고서 안유라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안 유수에게 미리 전해들은 모양이었 다. 채 성인도 되지 못한 아이가 슬픔을 안으로 삼키는 모습이 보기 좋은 건 아니었으나, 나는 모르는 척하며 가만히 웃었다.
a.간다고? 애
설민준은 놀란 눈을 하고서 그렇
게 되물었다. 그리고 뭔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알겠노라 수긍했다. 이 정도가 적절한 반응이라 생각했기 에 그러려니 했다.
"우와, 나는 꿈도 못 꿀 일인데. 저 밖을 나간다니. 역시 대단하 네이찬송의 비꼬는 어투는 평소랑 다를 바 없었고.
"기다리겠슴다! 대장!"
김태병은 날 자기 상관으로 착각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권성민은 그날 이후 나와 눈이 마주쳐도 단 한 마디도 섞지않았다. 부러 날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이들과 그만큼 친했던 가? 다시 생각해봤지만, 나는 살가 운 편이 아니라 그럭저럭 불편하지 않은 거리를 유지한 것 같은데…….
안유수도 처음엔 어색하게 굴었지 만 어느새 안유라랑 같이 가볍게 장난도 치며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 다. 둘이 돌림노래처럼 아리랑을 개 사해서 부르는 건 이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버리고 가면 10 리도 못 가서 어쩌구, 그 노래를 얼마나 다채롭게 부르던지. 나는 아 리랑의 바리에이션이 이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어찌 됐든 난 떠날 거야."
누가 뭐라 하더라도 난 일관되게 대응했다. 난 떠날 거니까.
내 냉철한 대답에, 처음엔 부루퉁 하게 불만을 표하던 사람들도 내가 철회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 윽고 체념했다.
인수인계도 착실히 진행됐고, 오며 가며 얼굴을 마주했던 사람들이 걱 정 어린 덕담을 한두 마디씩 던지 는 것을 유하게 받아치며 시간이 흘렀다. 나는 몬스터 고기 두 덩이 와 깨끗한 물, 최소한의 물자 몇 가지를 더 챙겨 가방에 넣었다.
내 목적지는 이곳에서 일주일을 꼬박 가야 나오는, '소금바위'였다.
* * *
한서하는 말이 없는 사람이다.
헛된 말은 삼키고 행동으로 보여 주는 사람이다. 그 명제로부터 나오 는 안도감이 분명 있었다.
권성민은 가장 처음 한서하를 만 났을 때를 회상했다. 갑작스러운 천 재지변.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면서 모두들패닉에 빠져 있었다. 밖은 몬스터가 돌아다니고, 사람들은 독 안에 든 쥐새끼처럼 겨우 물류창고에 숨어 들어 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나서긴 했지만.'
사실 권성민은 적당히 싸우는 척 미끼를 내세워 홀로 도망칠 심산이 었다.
그는 정의롭지도, 다정하지도 못한 사람이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크게 될 그릇도 아니며, 제 목숨 하나 겨우 부지하면 다행인. 잔머리가 좀 잘 돌아가는 것이 전부인 소시민 말이다.
국가공인 헌터적성검사에서 그럴 듯한 수치가 나오긴 했지만 두루 높은 올라운더라 애매한 재능이라 했다. 권성민의 집안은 자식 하나 제대로 키워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형편이라서, 그는 차마 헌터가 되고 싶다고 말도 꺼내보지 못했다. 그래, 내 주제에 무슨. 권성민은 그 렇게 체념했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나고 만 것이 다.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이가.
"다들 벽에서 떨어져요."
되지도 않는 어린애의 치기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푸욱!
순간 그 몸체가 흔들린다고 느꼈 을 때, 한서하는 이미 몬스터의 등 위에 올라타 식칼을 찔러 넣고 있 었다. 거대한 몸 위에 올라 당당하 게 승리를 쟁취하는 그 모습에, 그 누가 경외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 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