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화
챕터: 무너지지 않는 성곽
실내체육관 문 앞에 선 남자가 규 칙성 있게 문을 두드렸다. 탁, 타 닥, 탁탁탁. 안쪽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왔구만, 수일 아저씨. 와, 오늘은 고기 좀 먹겠……
날카롭게 간 돌로 만든 창을 들고 있던 문지기가 말을 내뱉다 말고 우릴 응시했다. 잠시 번갈아 보던 그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 다.
"생존자들이 네?"
"그래. 우도 선생님은 어디 계시 냐?"
"안쪽에 계실 거야."
최우도. 귀에 익은 이름이다. 전에 실내체육관에서 지낼 때 그를 도와 이런저런 활동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내 고유 스킬을 이용해서 밖으로 싸돌아다니느라 도리어 내부 사람들하곤 데면데면했었다.
그를 따라가는 길에 여러 사람들 이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씩씩하 게 터럭벌레 사체를 끌고 오는 쌍 등이들과도 호의 어린 말을 주고받 았다.
피곤해 보이긴 하지만 절망적이진 않은 광경이었다. 족히 50명은 되 는 사람들이 함께 지내고 있는 것 같은데, 구역별로 나뉘어 음식을 배 분받고 제 할 일을 하는 모습이 인 상적이 었다.
종종 무장을 하고 우리를 고요하 게 응시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드물게도 어린아이들이 정겹게 소꿉놀 이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게이트 안에서 보기 힘든 광경이다.
사람들이 박수일이라고 부르는 남 자를 따라간 곳은 체육관 문에서 가장 먼 안쪽에 위치한 천막이었다. 다른 곳보다 크기가 꽤 컸다. 고작 해야 2명 들어가면 끝인 다른 천막 과 달리 꽤 튼튼하고 10명은 족히 들어갈 것 같았다.
"다 들어올 건 없고, 대표자 한…… 두 명만 들어옵쇼."
그 말에 권성민이 우선 지친 사람 들에게 자리에 앉아 쉬라고 권했다.
무거운 짐가방을 들고 행군해왔던 터라 다들 힘겨운 소리를 내며 주 저 앉았다.
"일단 저랑 서하, 이렇게 들어가 죠."
반박은 없었다.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해 얼른 쉬고 싶은 듯 보였다.
권성민이 긴장한 얼굴로 천막에 들어섰다.
묘한 향수가 일었다. 내가 이 체육 관에 몸담았던 시간은 짧았지만, 내 기초적인 전투 실력을 갈고닦은 곳 이 여기였다. 그렇게 되도록 날 키 워준 것도 바로 최우도였고.
10명은 족히 들어갈 천막에서 그 가 생활하는 이유는 특권 때문이 아니다. 이 안에서 10여 명의 사람 들이 옹기종기 모여 어딜 정찰하고 보호할지 전략을 구상하기 때문이 다. 일종의 전략데스크라 볼 수 있 겠지.
"어서 오시게……. 고생이 많았 어."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우릴 반 긴다. 권성민이 잠깐 놀란 얼굴을 했다. 그도 그럴 게, 최우도는 백발 이 드문드문 난 노인이기 때문이었 다.
"권성민이라고 합니다."
"최우도라고 하네."
그가 자연스럽게 앉으라 권했다.
"젊은이들이군. 생존자들 중에 어 린 사람 비중이 얼마나 되나?"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중장년 층입니다."
"오는 길이 험난했던 모양이
지……
대한민국에서는 남을 이끄는 자리 를 으레 나이순으로 먹기 마련이다. 하지만 예외인 경우가 있었으니, 지 금처럼 목숨의 위협을 실시간으로받는 때가 바로 그중 하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창때인 청년 들이 판단력은 몰라도 힘이 더 좋 다. 항상 비례하지는 않지만 나이와 지혜는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다 고 생각하는 현대 사회에서, 중장년 층이 대부분인 무리의 우두머리가 새파랗게 어린 청년인 경우는 단 하나다.
지혜보다 무력이 더 중요한 경우.
실제로 무력이 더 높은 사람들을 위주로 운영되어 왔으니 틀린 말이 아니다. 최우도는 이 단적인 모습에 서 그것을 짚어냈다.
"박수일이랑 같이 왔으면 봤겠지 만…… 지금 우린 물자가 많이 부 족한 상황이네. 지금까진 어떻게 버 텼지만 슬슬 터럭벌레 놈들도 이 근처에 잘 안 나타나 골머리를 썩 였지……. 마트에서 왔다고 하니 그 만큼 물자는 많이 갖고 왔겠어. 고 맙게 생각허이...
"아닙니다. 이 체육관이 훌륭한 요 새라는 건 오는 길에 직접 봤습니 다. 이 안에서 생활하면서 저희 역 할을 수행하게 해주신다면 그걸로 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금은 흥정보다 호의와 안정을 얻어내는 게 중요하다. 이 범상치않은 노인을 상대로 어설프게 협상 을 걸어 물자와 뭔가를 교환하려 들다가 호되게 당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권성민의 화 법은 꽤 좋은 판단이었다.
"일단 오늘은 주인 없는 구역에서 하루 묵게 해주겠네. 자세한 배분은 내일 상의하는 게 좋을 것 같 고……
최우도가 잠시 뜸을 들였다.
"..오는 길에 뭘 봤는지.. 그 게 궁금하구만……. 오는 길에 얼마 나 죽었나?"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 대답에 최우도가 드물게 놀란 얼굴을 했다. 이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이 감정을 낯빛에 드러내는 일 은 흔치 않다.
"아무도?"
"네. 아무도요."
"어떻게……. H마트에서 다리를 건너왔다고 하지 않았나?"
박수일에게 대충 얘기를 들은 모 양이다. 그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 낡아빠진 안경을 눈가에 걸쳤다. 얼마나 들여다보았는지 꽤 삭은 지도가 테이블에 펼쳐졌다. 멀 다면 먼 거리다. 이 시국엔.
"......그건.…"
권성민이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이걸 말해도 괜찮은가, 하는 기색이 었다.
'아카데미생도 아니고 헌터 지망생 도 아니라 한 게, 내 정체를 숨기 는 것처럼 보였나?'
내가 말없이 어깨를 으쓱하자 권 성민이 대충 둘러댔다.
"저희 쪽에 고유 스킬을 가진 사 람들이 조금 있는데, 개중에 정찰 스킬이 있어 몬스터들을 몇 번 피 할 수 있었습니다."
"호오……. '정찰'이라. 우리 쪽에 도 둘 있지."
아마도 그 쌍둥이인가 보다. 정찰 은 어쌔신과 레인저 계열의 기본 스킬이니까.
"좋은 인재들이 들어왔군……
최우도가 만족스러운 음성을 냈다. 타고난 책략가인 그는, 수중의 장기 말이 많아질수록 제 진가를 드러내 는 유형이다. 이 정도면 회귀 전보 다 더 풍족한 인적 자원을 소유한 셈이니, 이 체육관이 무너질 확률은 더더욱 줄었을 것이다.
'……그래야 할 텐데.'
회귀 전 최우도는…… 이 게이트 의 생존자가 아니었다. 그는 내부 분열로 일어난 다툼 가운데 죽었고, 이후 실내체육관은 근간을 잃고 뒤 흔들린다. 그래서 저 쌍둥이들 단둘 이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던 거다.
실내체육관이 무너지지 않는 성곽 이긴 했으나, 이 명칭은 오히려 비 꼬는 의미가 강했다.
무너지지 않은 건 건물뿐이었고 그 안팎으로 인간들은 모조리 죽어 나갔으니 말이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혹은 다가오 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의 상황과 는 다르게 현 시점에서 실내체육관 은 아주 이상적인 요새다. 현명한 책략가를 필두로 능력 있는 각성자 들을 차근차근 공들여 키워낸다. 나 역시 이곳에서 초보자 시절을 보냈 으니 최우도가 인재 양성에 얼마나 탁월한지 잘 안다.
'김태병이랑 설민준은 여기 남아서 실력을 키우는 편이 나아.'
그 둘은 각각 특정 계열에 특화된 성질을 갖고 있으니, 잘 키우면 쓸만할 거다.
'송다정은 대장장이 계열이라…… 여기서도 그 싹을 틔울 수 있을지 모르겠네.'
얼핏 근력과 체력이 높은 송다정 을 어설픈 탱커로 키워낼 수도 있 었다. 그것도 뭐, 인력이 부족한 상 황에선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도 있겠으나 탱커보다 대장장이 쪽이 더 희귀한 재능이니 아깝긴 했다.
'권성민은 어느 계열 특화가 아니 라 두루 능력치가 높은 올라운더니 까, 차라리 최우도 아래서 전략가 특성을 개화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
지.'
초반부엔 다재다능한 올라운더가 좋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특화계열 이 더 유리해 한계가 명확하다. 권 성민은 신체적 능력보다 타고난 리 더십과 협상 능력, 상황파악 능력이 뛰어나니 현장에서 뛰는 것보다 후 방 지원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이찬송과 고해윤도 잘 키우면 한 사람 몫을 해주겠지만 지금은 애매 해.'
고해윤의 민첩 수치는 꽤 높은 편 이지만 오는 동안 후방을 맡았기 때문에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 잘키우면 설민준처럼 정찰 스킬을 개 화할 수도 있으니 더 지켜봐야겠지 만.
이찬송은 민첩보다 매력 수치가 더 높다고 했다. 버프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바드 같은 직종도 있겠으 나, 이 열악한 환경에서 그런 사치 스러운 직종으로 특화되긴 어렵다 고 봐야겠지.
차근차근 생각해보니 상황이 나쁘 지 않아 다행이었다.
모처럼의 휴식기였다. 하늘은 천장 으로 막혀있고, 몬스터가 침입할 확 률도 적고…… 아직은 역할 배분이끝나지 않았으니 불침번도 우리의 몫이 아니다. 그야말로 잠만 잘 자 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녀와야 하는 곳이 있어.'
남몰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비, 그러니까 아이템은 중요한 문제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지만, 헌터는 장비를 가린다. 자신의 직종에 맞는 뛰어난 아이템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가져다주니까. 최상 위급 헌터들이 값비싼 장비를 온몸 에 두르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내 무기는 처참하 다고 할 수 있다.
[아이템을 확인합니다.]
〈날카로운 잭나이프〉
등급: F
공격력: 10~20
설명: 날이 잘 선 잭나이프다. 깊 게 찌르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회귀 전의 내게도 영혼의 단짝 같 은 무기가 있었다. 다름 아니라 바 로 이 게이트에서 얻은.
게이트를 클리어하면 시스템이 기 여도를 확인해 그 수치만큼 정당한 보상을 제시한다. 그리고 회귀 전 에…… 이 게이트 클리어 기여도 1 등은 나였다.
헌터들도 클리어하지 못해 장장 3 년이 걸린 게이트였다. 그 보상이 어마무시할 거란 이야기는 딱히 비 밀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게이트를 클리어할 순 없으니 임시방편으로 쓸 만한 아이템을 찾는 수밖에.
아이템은 몬스터를 죽이고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히든아이템들도 있 다.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아이템을 주는 방식이다. 일종의 이스터에그 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기에, 실내체육 관 근처에도 그 이스터에그가 있었 다. 내가 아니라 다른 정찰조 사람 이 얻은 장비였는데 그 전까지 우 린 몬스터에게서만 장비가 나오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꽤 화제가 되었다.
그 사람이 떠들던 바로는, 실내체 육관에서 북동쪽으로 가면 모 동물 병원이 나온다 했다.
' 찾았다.'
한마음 동물병원. 이제는 폐허가 됐지만, 아기자기하게 꾸몄던 내부 는 그 흔적이 남아있었다.
안에 들어서자 악취가 났다. 동물 시체 썩은 내 같은 게. 그렇겠지. 사람도 다 도망치지 못해서 죽는 와중에 동물병원에 갇힌 아이들을 빼내줄 정신은 없었을 거다. 그리고 몬스터들이 그 고기냄새를 감지하 고 와서 난동을 부렸을 테지.
아니나 다를까, 진료실 안쪽으로 들어가자 잔혹하게 뭉개진 철창들 사이로 썩어가는 살점들이 보였다. 무너진 철창에 드문드문 새겨진 이 름들이 뼈아프다. '초코', '사랑이', '망고' 같은 이름들이 늘어서 있었 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서자 원장 실이 나왔고, 그 옆쪽으로 직원 휴 게실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굶어 죽은 사 체가 하나 있었다. 어린 강아지였는 데, 홀로 어떻게 살아남았으나 먹이 를 줄 사람이 없어 그대로 아사한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사체를 들어밖으로 나갔다.
'좋은 곳으로 가렴.'
작게 성불을 빌며 땅에 묻었다. 태 어난 지 고작해야 몇 달이나 되었 을까 싶은 작은 강아지였다.
[알림: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소정의 보상을 제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