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시작이 게이트라곤 안 했잖아요-1화 (1/361)

1 화

챕터: 회귀자의 스타트지점

사람들은 내가 운이 좋다고 떠들 었다.

16살 때 한 국가공인 헌터적성검 사에서 고유 스킬 '공간 간섭'을 확 인했으니, 그거면 탄탄대로가 아니 냐면서 말이다. 실제로 내 앞에 수 많은 건설 회사, 물류 회사, 운송회사들이 줄을 섰다. 내가 성인이 되면 날 스카우트해 가려고 안달을 내더라.

뭐, 고유 스킬을 갖고 있다는 점에 서 운이 좋은 녀석이라는 말은 부 정할 수 없겠지. 하지만 뒤이어 죄 꼬이기만 한 내 인생을 생각하면 마냥 그렇게 떠들 수 있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빌어먹 을 게이트에 휘말려 장장 3년을 눈 물겹게 생존한 것도, 내 은인을 그 곳에서 잃은 것도, 알지 않아도 될 진실을 알아버린 것도. 그래, 게이 트가 열리고 각성자가 판을 치는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은 정말 너무했다.

나는 분명 최후의 결전에 출전했 고, 최전방에서 놈들을 쓸어 담으며 잔뜩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그러다 언제나처럼 내 앞을 막아선 귀뾰족 녀석과 마주했고, 치열하게 다퉜다. 분명 그 녀석의 창이 내 폐를 찔렀 을 텐데…… 기이하게 일그러지는 녀석의 얼굴을 보며, 나는 의아한 마음을 품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것이 내 평온한 안식이었을 터였 다.

영원한 안식, 죽음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놓인 것

"뭐 해, 학생! 당장 뛰어!"

다급하게 외치는 중년 여성의 목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고작해야 노말 등급의 몬스터, '바 람갈퀴'가 마트를 휩쓸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사람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현실감이 없어 서 손이 떨렸다. 이름 모를 여자가 내 옆에서 소리 지르다가, 내가 멍하니 정신을 못 차리자 다짜고짜 손을 잡고 뛰었다.

얼결에 따라 달리는 와중에 낯익 은 창이 떠올랐다.

[알림: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사용자를 확인합니다.]

[개체 '한서하(각성자)'를 확인했습 니다.]

[시스템에 접속합니다.]

빌어 처먹을. 아무래도 나는, 악몽 의 3년을 보냈던 19살 때로 돌아온 모양이다.

* * *

마트 입구는 막혔다. 몬스터가 들 어온 순간부터 뻔한 일이었다. 마트 를 채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은 물류창고에 겨우 숨어들었다. 나도 그들 틈바구니에 있었다.

"갑자기 이런 일이……

"휴대폰도 먹통이네요."

"게이트에 입장했다는 알림이 울 리던데…… 진짜일까요?"

불안에 차 신음하는 사람들. 게이 트 알림을 들었음에도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 했다. 나 역시 이 주 마등인지 뭔지 모를 상황에서 도망 치고 싶었으므로, 가만히 입 다물고 주변을 살폈다.

"게이트에 휘말렸나 봐요. 갑자기 휴대폰이 먹통이 될 이유가 그것 말고 뭐가 있겠어요?"

"하지만 경고음은 듣지 못했는데! 게이트가 열리기 전에는 보통 주민 대피를 알리는 국가재난문자가

"예고가 없었나 봅니다. 최근 10년 간 비파장 게이트가 늘어났다고 뉴 스에 나오던 거 못 봤어요?"

"아니, 그게 진짜 이렇게 될 줄

정치인들의 흔한 정치 선전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아마 태반이었을 거다.

대충 기억난다.〈연화도 게이트 사 건〉이라고 총칭되는 일이었지. 장 장 3년이나 클리어하지 못해 수많 은 사상자를 낸 비극이었다.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하나가 바로 나였 고. 그때도 이렇게 마트에서 숨어 생산성 없는 이야기나 나누고 있었 지. 그러다가…… 어떻게 됐더라. 게이트 안에서 워낙 많은 일들이 있었고 예전 일이라 자세한 내용이흐릿했다. 아마도…… 누구 한 명이 나서서 그나마 그럴듯한 계획을 세 웠고....

"잠깐만 제 얘길 들어주시죠. 저는 헌터는 아니지만 각성자고, 적성검 사를 받았을 때 아카데미 입학 권 유도 들은 적 있습니다."

한 남자가 나서서 말하기 시작했 다. 헌터가 없는 이곳에서 그는 중 요한 인적 자원이다.

"우선, 이곳이 게이트화 됐으니 여 러분은 모두 각성자가 됐을 겁니다. 자기 상태창을 확인해주시죠."

그의 말에 사람들이 하나둘 따라

서 상태창을 확인했다. 나 역시 따 라서 상태창을 외쳤다.

[상태창]

이름 : 한서하

칭호 : 재■장한 플■■어, 전■의 ■■을 여■ 자, ■■의 별, 기■의 귀재…….

고유 스킬 : 공간 간섭

체력 : 3500(잠금)

마력 : 800(잠금)

근력 : 15(잠금)

민첩 : 34(잠금)

어라?

힘체민, 그러니까 힘, 체력, 민첩을 포함한 스탯은 10분의 1꼴로 저하 되어 있었는데, 칭호는 군데군데 지 워지긴 했어도 그대로였다. 본 적 없는 '재■장한 플■■어'라는 칭호 도 있었고. 잠금은 또 뭐지? 처음 보는 상태 이상이었다. 시스템 오 류? 이 시스템이 오류란 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던가?

"성인 남성 기준 평균은 10입니다. 혹시 10 이상의 수치를 가지신 분 들은 제게 말씀해주세요!"

"저, 저 근력이 13입니다."

"저는 손재주요."

하나둘 용기를 내어 자신의 스탯 을 밝히기 시작했다. 나 역시 저하 되긴 했어도 10을 넘기는 것들이 태반이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막 수능을 마친 여고생이 민첩 스 탯을 34나 갖고 있는 건 아무래도 정상적인 일은 아니니까.

"혹시 고유 스킬 가지신 분들 있 습니까?"

그 말에는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고유 스킬이 있었으면 아마 헌터 지망생쯤 됐을 테니. 예전의 나는 여기서 스킬이 있다고 밝혔던 것 같지만. 굳이 입을 늘릴 필요는 없 었다. 이제서야 막 생각난 건데, 이 곳은 어차피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왜냐면…….

"다들 벽에서 떨어져요."

짧게 읊조렸다.

내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설명 을 요구하는 듯한 얼굴로 날 바라 봤다. 하지만 더 이상의 말은 사치였다. 나는 물류창고에서 식칼을 주 웠다. 뜬금없는 무장태세에 긴장감 이 서렸다.

"잠깐, 학생. 지금 뭐 하는……

"벽에서 떨어지라고요!"

흉기를 든 채 외치자 그제야 사람 들이 발걸음을 옮겼다. 물류창고 안 쪽으로 몰아넣고 그들 앞에 섰다. 그런 내 앞에 아까 리더 역할을 자 처하던 남자가 나와 대화를 시도했 다.

"잠깐만요. 좀 진정하고……

"놈이 올 거니까 무기를 쥐든가 뒤에 숨든가 해요."

"네?"

"빨리요!"

-콰앙!

내가 소리친 것과 거의 동시에 굉 음이 터졌다.

벽에 쩌저적, 금이 갔다.

한 번 더 쿵! 부딪히는 소리가 들 렸고 벽 틈새로 그것이 보였다.

"으…… 으아아아악!"

희번덕대며 빛나는 붉은 눈동자. 그 크기가 거의 사람 몸통만 했다. 거대한 눈동자와 눈을 마주치는 그 섬뜩한 기분을 알까.

도등급 땅장군.

노말 등급의 몬스터지만, 일반인들 에겐 충분히 위협적이다.

나는 손에 쥔 식칼을 내려다봤다. 포장지에서 막 나와 날이 반질반질 했다. 아이템 확인 스킬은 다행히 그대로였기 때문에 곧장 등급을 살 폈다.

[아이템을 확인합니다.]

〈평범한 식칼〉

등급: F

공격력: 15

설명: 평범한 식칼이다. 날이 잘 벼려진 것 외에 장점이 없다.

역시나 허섭스레기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훨씬 나으니, 별수 없지.

"혹시…… 헌터입니까?"

"그럴 리가요."

"그렇다면 뒤로 물러나는 게……r

쫑알쫑알 시끄러웠다. 나는 아마 20대 중후반이나 되었을 사내를 뒤 로 슬쩍 밀쳤다. 근력 15인 나는 어지간한 성인 남성보다 강하므로 쉽게 뒤로 밀렸다. 그 잠깐 사이에벽이 거의 다 뚫려 땅장군의 살벌 한 집게가 드러났다. 사람들이 공포 에 질린 비명을 겨우 삼켜냈다.

단단한 외곽 껍질은 겨우 식칼로 뚫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애초 에 땅장군은 평균 15m는 된다. 평 범한 인간이 칼질해봤자, 발톱에 홈 집을 내는 수준밖에 안 된다는 뜻 이다.

그러나 나는 제일 앞에 섰다. 다들 내 등만 바라보고 있었다.

땅장군은 아까부터 나와 눈을 마 주하고 있었다. 녀석이 주저하지 않 고 앞집게를 휘둘렀다. 묵직한 중량감 때문에 그다지 빠르진 않았다. 보고 있으면 피하기는 쉬웠다. 내 입장에선.

쿵! 쿵! 쿵!

집게를 휘두르는 대로 땅이 파이 고 벽이 박살났다. 천장이 무너지지 않게 주의하며 땅장군을 유인했다. 녀석은 무식하게 두껍고 튼튼한 대 신, 자신의 그 육중한 무게에 스스 로 버거워했다. 3번 집게를 휘두르 면 중간에 잠시 멈추는 시간이 있 을 정도로.

예전 같았으면 그냥 돌격해도 됐 겠지만, 지금은 종잇장처럼 연약해졌으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키루룩키룩-

놈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잠시 멈 췄을 때.

나는 눈물겹도록 익숙하면서도, 아 주 오랜만인 것 같은 감각을 되살 렸다.

망막에 푸른빛의 회로가 아로새겨 진다. 순식간에 나를 중심으로 한 공간이 머릿속에 욱여넣어졌다. 바 닥을 스치는 모래 알갱이, 흩날리는 벽 부스러기 그리고 숨죽여 눈물 흘리는 사람들까지. 지나치게 생생 하게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공간 간섭'

내 가장 오랜 벗이 함께했다. 내 일평생을 함께한 고유 스킬.

남들이 채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 눈 한 번 깜빡하는 그 사이에.

나는 어느새 땅장군의 목 뒤에 있 었다.

"허억......!"

누군가가 숨을 삼키는 소리까지 생생했다. 땅장군의 더듬이가 날 감 지하고 집게를 다시 휘두르려 했으 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푸욱!

땅장군의 유일한 약점. 목 뒤, 그 철옹성 같은 외피의 틈새.

이 녀석이 노말 등급인 이유가 여 기에 있었다. 고작해야 도등급의 식 칼만 끝까지 밀어 넣으면 녀석은 그대로 뇌를 찔려 죽어버렸다. 부드 럽게 무언가 썰리는 감각이 손끝을 스쳤다.

쿠웅-!

거대한 몸체가 쓰러졌다.

다들 넋을 놓은 채로 식칼을 다시 뽑아낸 나를 응시했다.

"……방금, 그건."

"다들 정신 차리고 짐 챙겨요."

한쪽 벽이 무너진 이상 여기는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언제 천장 이 무너질지도 모르고.

"먹을 것, 마실 것, 무기, 생존에 필요한 생필품, 싹 다 챙겨요. 식량 은 통조림 위주로! 라이터랑 태울 만한 것들도."

"……어디로 가려는 겁니까?"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실내체육 관이 있어요."

"그곳도 몬스터에 점령당했을지 어떻게 알고요? 그냥 여기 있는게... 물자도 풍부하고..

"아까 온 건 땅장군이고, 처음에 마트 습격한 건 바람갈퀴라는 녀석 이에요. 바람갈퀴 이름 뜻은 알아 요?"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바람 속에 숨어서 갈퀴를 휘두른 다는 뜻이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냐 면, 몸을 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 이거예요."

내 말에 사람들의 안색이 창백하 게 변했다. 모습도 보이지 않는 몬 스터에게 끔찍하게 학살당하는 상 상을 했으리라.

"그니까 닥치고 짐 싸요. 벽이 없 으면 모를까, 이 상황에선 바람갈퀴 가 당장 누구 한 명 쓱싹해도 모를 걸요. 실내체육관은 평소에 대피 훈 련할 때 대피소로도 쓰이니 생존자 가 있으면 거기에 모여 있을 거예 요."

내 말에 남자는 그제야 수긍한 듯 했다. 나도 창고에 굴러다니는 가방 을 주워다 짐을 챙겼다. 통조림 위 주의 먹을 것, 깨끗한 물 그리고 응급처치 구급상자를 가득 담았다. 밖에 나가면 가장 귀중하게 거래될 것들이다.

젠장.

문득 또 이 상황에 처한 내 자신 이 불쌍했다.

사상 최악의 게이트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비극이었다. 근 3년이나 외 부 물자 공급 없이 고립되면서 사 람과 몬스터를 구분하기 어려워졌 다. 처음 1년 안에 죽을 놈들은 싹 다 죽었고, 이후 2년은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물자 전쟁을 피 터지게 했다. 다행히 난 첫 시작이 마트였 고, 쓸 만한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살아남았지만…….

'원래는 이곳에서 나 빼고 죄다 몰 살당했었지.'

당시 내 공간 간섭은 나 혼자, 고 작해야 몇 미터 움직이는 게 고작 이었다. 시전자 외의 생명체를 공간 간섭으로 옮기는 건 법적으로 금지 됐기 때문에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었다. 그래서 살려달라 울부짖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도망쳤었다. 한 참 뒤에 되돌아와, 사람들의 시체 사이에서 먹을 것을 훔쳐 달아났었 다.

다시 생각해도 더러운 기억이었다. 다행히 이번엔…… 내게 이들을 구 할 힘이 있었다. 최소한 허무하게 스러지지 않을 정도의 힘이.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