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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140화 (140/141)

#140화

그래서 선택했다. 모든 걸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은 과거를 바꾸는 것뿐이었으니까.

과거를 바꾸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게 내 존재가 사라지는 길이라 하더라도.

지금의 나는 행복함을 느끼지 못했다. 어떻게 나 혼자 행복할 수 있을까.

어머니라면 나라도 행복하길 바랐겠지만,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는 지금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지만.”

이렇게 계속 혼자 살아가는 길은 별로 택하고 싶지 않았다.

미래를 바꾸려면 오로지 과거를 바꾸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과거로 돌아가는 방법은 매우 쉽고 간단했다. 단지, 무조건 성공한다는 확신이 없을 뿐.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했다.

“숙모님이 알려 주셨으니까.”

과거로 돌아가는 방법은 목숨을 매개체로 해서 시간을 돌리는 거였다.

다만 정확한 시간은 내가 정할 수 없고, 누가 기억을 가지고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누군가가 모든 기억을 가진 채로 과거로 돌아가게 하는 것뿐이었다.

숙모님이 어째서 이런 방법을 알고 있는지는 그리 크게 궁금하지 않았다.

“……어머니.”

두 눈을 감은 채, 어머니를 생각하자 행복하게 웃던 모습은 기억에 없었다.

내가 어렸을 때의 기억을 되짚어 봐도 행복하게가 아닌 힘겹게 웃던 모습만이 떠올랐다.

어차피 내가 돌아가 봤자 아무 짝에도 쓸모없었기에, 남은 건 전부…….

“아버지의 몫입니다.”

어머니를 과거로 되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으니까.

어쩌면 어머니가 과거를 되풀이하는 건 가장 잔인한 짓이니, 차라리 아버지가 모든 기억을 가진 채로 돌아가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누가 이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이런 식으로 죽는 미래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뿐이었다.

지금의 나는 행복하지 않으니까. 뒤바뀐 미래 속의 나는 행복하길 바라며 지금의 나를 죽이는 거였다.

“…….”

옆에 놓아두었던 기름을 방 안에 가득하게 뿌렸다.

이어서 자연스럽게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성냥을 꺼내고, 기름 위에 떨어뜨렸다.

“……이게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확신조차 없는 짓이라는 걸 알았다.

실패할 확률도, 이게 애초부터 말도 안 되는 짓이라는 것도 염두에 두고 하는 짓이었다.

어차피 내게는 살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렇게라도 해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둘 다 행복했으면 싶었다.

방 안에는 새빨간 불길이 치솟았다.

* * *

익숙한 체취가 코끝을 찔렀다.

달콤하고, 동시에 상큼한 과일 향을 은은하게 풍기는 낯설지 않은…… 오히려 그리웠던 향기에 눈이 살며시 떠졌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보랏빛 눈동자를 제외한 모든 게 새하얀 여자가 아른거렸다.

“앗! 체스터, 이건!”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당황으로 물들어 있는 음성이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이게 꿈이 아니라면…… 아니, 이게 꿈일지라도.

살살 뒷걸음질 치던 여자의 팔을 붙잡아 품으로 끌어당겼다.

“가지 마.”

수도 없이 품에 안아 왔던 그 가녀린 체구가 그녀라는 확신을 주었고, 심장 박동 소리와 따뜻한 체온은 이게 허상이 아님을 알려 주었다.

품에 쏙 들어오는 그녀는 딱히 나를 밀어내거나, 거부하지 않고 귀엽게 얌전히 품에 안긴 채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이게 꿈이든, 현실이든 상관없었다. 지금 이곳이 지옥이라도 괜찮다.

그렇게 딜런이 다 자라도록, 그리워했던 유일한 내 사랑을 다시 만났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체, 체스터?”

“…….”

“내가, 내가 뭘…… 잘못했어?”

그냥 율리아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몇십 년 동안 듣지 못했던 무척이나 그립고 사랑스러운 음성이 귓가와 심장을 간지럽혔다.

“나, 나는 그냥…… 체스터가 혼자 이곳에서 자고 있길래…… 햇빛이 뜨거울 것 같아서…….”

상황 파악을 할 필요성이 있었다.

횡설수설하며 변명을 주저리주저리 내뱉는 율리아의 모습을 어디선가 한 번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기 전에 보았던 그녀의 말과 행동과는 달랐다.

“많이…… 화났어? 체스터가…… 오지 말라고 했는데…… 몰래 와서…… 화난 거야?”

“화 안 났습니다.”

어떻게 당신한테 화를 낼 수 있을까. 나 따위가 어찌 감히 당신한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안절부절못하는 율리아의 모습을 얼마 만에 보는 건지.

감정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표정과 행동 그리고 말이 얼마나 그리웠었는지. 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여자는 하나도 모르겠지.

“그냥 얼굴만 보고 싶었어……. 그냥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어! 진짜야!”

“제 얼굴이 보고 싶었습니까.”

“……내일은 안 올게. 화나게 했다면…… 미안.”

그건 내가 싫은데.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아……. 짜증 나? 다음부터는 주의할게…….”

“아닙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냥 매일 와도 됩니다.”

“……정말?”

“네. 정말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녀가 너무 미치도록 사랑스러워서, 심장이 쿵쿵 뛰어 댔다.

“체스터, 혹시…… 어디 아파?”

그녀는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손을 뻗어 내 이마를 덮었다.

그게 좋았다. 율리아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열은 없는데.”

“율리아.”

“으응?”

“결혼할래요?”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두 눈만을 천천히 깜빡거릴 뿐이었다.

“싫습니까?”

“시, 싫을 리가 없잖아!”

정말이지 귀엽기 짝이 없는 반응에 피식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그때는 왜 인지하지 못했던 건지.

“왜 웃어? 장난……친 거야?”

“장난으로 느껴지나요? 율리아는 제가 이런 장난을 칠 사람으로 보입니까?”

“…….”

율리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말 귀엽다는 말밖에 나오질 않았다.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은 채,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한입에 꿀꺽 삼켜 버리고 싶다는 새까만 욕망이 일렁였다.

“율리아, 왜 그럽니까?”

“뭐, 뭐가?”

“얼굴이 엄청 빨갛다는 거 알고 있습니까?”

“나를 이름으로 불러 준 건…… 방금이 처음이잖아…….”

아, 전에는 그녀의 이름을 습관처럼 불렀기에 잠깐 잊었다.

이게 첫 번째 삶이라면 나는 이때 율리아를 ‘황녀님’ 혹은 ‘황녀 전하’라는 존칭으로 불렀었지.

뒤늦게 아차 싶었다.

“그럼 황녀 전하라고 불러 드릴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된 장난기가 스멀스멀 올라와 나를 집어삼켰다.

전혀 그렇게 불러 주기를 원치 않다는 걸 알고 있기에 장난스럽게 내뱉는 말이었다.

“아니!”

뻔히 이러한 대답이 나올 것을 알고 있었다.

“아, 아까처럼…… 앞으로도 이름으로 불러 줘…….”

정말 너무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얼굴을 발갛게 붉힌 채로, 부끄러워 미치겠지만 그래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수줍게 내뱉는 모습이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다.

저 조그마한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지만, 아직은 그럴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참아 냈다.

“율리아.”

“…….”

“율리아, 율리아, 율리아.”

“하, 한 번만 불러 줘도 충분해!”

피식-.

저절로 자연스러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하고, 입 안에 가득 퍼지는 그녀의 이름은 무척 황홀했다.

“알겠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율리아는 이전과 다르게 아무런 기억도 없는 걸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는 다르게 기억이 없다면 이전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니까.

“당신이 이곳에 오는 것을 따로 막거나 하지는 않겠습니다. 언제든 당신에게는 문을 열어 둘 테니, 마음껏 찾아와도 됩니다.”

“정말?”

“네. 하지만 내일은 오지 마세요.”

마음껏 찾아와도 된다는 말에 환하게 밝아지던 얼굴이 내일은 예외라는 이야기에 다시 시무룩해진다. 정말이지 사랑스러웠다.

“내일부터는 제가 당신한테 찾아갈 테니까요.”

“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모습이 정말 천사가 따로 없었다.

정말 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여자.

이번에는 꼭 내 옆에서 율리아가 건강한 몸으로,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내일 제가 직접 황성으로 찾아가겠습니다.”

“…….”

“수도에는 예쁜 곳이 많으니까요. 굳이 이곳이 아니어도, 함께 있을 장소들은 많습니다.”

당신과 함께 해 보지 못한 것들.

전에도, 훨씬 더 전에도 하지 못했던 평범한 연인들의 데이트를 이제야 해 볼 심산이었다.

그동안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해 보지 못했던 것 같아서.

늘 우리는 어그러져 있었다. 관계도, 마음도, 상황도 전부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율리아가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 평범한 사랑이었지, 아마.

남들이 보고 말하는 평범한 연인들처럼. 함께 만나서 놀러 가고, 맛있는 걸 먹고, 일상을 공유하고, 집에 데려다주는.

이미 많이 늦었다는 것을 알지만, 아니, 더 늦기 전에 데이트를 제대로 해 볼 생각이었다.

“지금 이건 데이트 신청입니다, 율리아.”

“아…….”

처음부터 결혼을 얘기하는 행동은 무척 급작스러웠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그러니 계단을 올라가듯이 한 단계 한 단계를 차근차근 진행해 볼 생각이었다.

내가 아니면 안 되도록.

종이에 물이 스며들 듯,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게 당신과 데이트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응……. 좋아!”

율리아의 대답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다행이었다. 후회는 이미 충분히 했다. 이제는 후회할 일들을 만들지 말아야겠지.

내가 율리아에게 속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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