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체스터.”
“네.”
“어서 이거 풀어.”
“싫어요.”
체스터는 내 발목에 채운 이것이 마음에 드는지, 계속 웃는 낯짝을 유지했다.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그의 얼굴을 발로 밟았다. 물론, 맨발이라 딱히 아프지는 않을 거란 가정하에 이런 행동을 했다.
“이걸 풀어 주거나, 저리 비…….”
순간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뜨겁고 촉촉하며 말캉한 감촉을 가진 무언가가 발바닥을 핥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분 탓이 아니라면 그 무언가는 혀가 분명했다.
“뭐 하는 거야!”
소리를 지르며 다급하게 그의 얼굴에서 발바닥을 떼어 냈다.
“제 사랑을 표현하는 중이었는데, 이 정도로는 부족했습니까?”
“아니! 이런 거 하지 마!”
“하지 마?”
“어! 하지 마. 진짜 싫어!”
“싫어?”
체스터는 계속 짜증 나게 내가 한 말의 끝을 따라 했다.
내 성질을 살살 긁으며 폭발하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면 제대로 성공했다.
“너는 나가고 딜런이나 데려와!”
“……율리아, 저도 좀 봐 주면 안 돼요?”
“응. 안 될 것 같아.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돌리고 싶다면 내 발목에 채운 이거나 풀어.”
“그건 안 됩니다.”
“그럼 나가.”
“율리아, 당신이 제 사랑을 의심하는 거라면…….”
“딜런을 데려오면 조금은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지?”
너도 알잖아. 지금 이렇게 시간이나 질질 끌어 봤자, 네게 딱히 이득일 게 없다는 것 정도는.
오히려 얼른 딜런을 데려와 치솟는 내 분노를 가라앉히는 게 낫다는 걸 잘 알 텐데.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요, 율리아.”
그렇게 말을 한 체스터는 방 밖으로 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온전히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숨을 편히 쉴 수 있었다.
“하아…….”
전부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체스터에게 기회를 준 것부터 시작해서, 그를 조금은 신뢰한 것, 그리고 그의 본래 성정을 망각한 것.
전부 잘못되었다. 이렇게 되지 않을까 의심했으면서도 틀린 선택을 하다니.
또다시 체스터를 믿은 내가 바보였지.
가식적이기 짝이 없는 체스터의 말을 듣고 얌전히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내가 아니었다.
그걸 그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기에, 밖으로 나가는 것을 방금까지도 꺼렸던 거겠지.
“어차피 이건 성 밖으로만 안 나가면 제대로 발동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그러니 적어도 영주 성 내부에서는 마음껏 돌아다녀도 제지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되었다.
물론 자신과 함께 다녀야 한다는 암묵적인 조건이 붙긴 하겠지만, 그걸 오늘은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으니 무시해도 되겠지.
체스터는 딱히 방문을 잠그거나 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문은 아주 쉽게 열렸다.
복도로 나가자 돌아다니는 사용인들도 보이지 않았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나를 신뢰한다는 뜻인지. 아니면 나를 시험하겠다는 의도인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든 이건 내게 좋은 상황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방 밖으로 나온 것도, 그에게 또다시 엿을 먹이자는 생각을 한 것도 좋았다.
단지……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내가 이곳을 떠난 지 한 달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저택 내부에 조금 큰 변화가 찾아온 것 같았다.
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았을 테지만, 인테리어부터 이전과 많이 바뀌어 있었다.
들어올 때는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복도의 모습이 이제는 제대로 보였다.
“…….”
분명 내 기억 속에서는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는데,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아무리 내부의 일부분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눈에 띄도록 바뀔 줄은 몰랐다.
이곳으로 들어올 때, 길을 잘 봐 두었어야 했는데.
당연히 내 기억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고 여긴 안일함이 이런 낭패를 불러왔다.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다시 방 안으로 돌아가서 얌전히 있는 게 옳은 선택이 될지 잠시 고민하는 순간, 무언가가 번뜩 떠올랐다.
체스터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긴 했어도, 왜 별다른 조치 없이 나를 홀로 남겨 두고 방을 나갔는지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처음부터 내가 이 복도부터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던 거야.”
그게 아니었다면 체스터는 절대 나만 혼자 두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 터였다.
“율리아, 여기서 뭐 합니까?”
뒤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꽤나 평온했다.
이미 내가 가만히 방 안에 있을 리는 없다고 처음부터 단정해 왔던 것처럼.
조금의 분노도, 흔들림도 없이, 무척이나 안정되고 평온한 목소리로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불러 세웠다.
“……그러게.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걸까.”
헛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몸을 돌려, 체스터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그는 딜런을 품에 안고 서 있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무엇을요?”
“네가 채운 이 발찌 때문이 아니라도, 내가 이곳에서 스스로 빠져나갈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글쎄요? 어느 정도 예측은 했지만, 확신은 없었습니다.”
내가 노려봤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부드럽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당신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딜런을 데려왔으니, 이제 딜런과 놀아요.”
역시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아니, 그래도 유일하게 딜런의 존재 하나만큼은 마음에 드는 것 같기도 했다.
* * *
체스터가 만든 안전한 이 영주 성 안에서 갇혀 지낸 지 몇 년이 지난 건지.
오늘따라 날이 좋았다. 그렇기에 체스터가 딜런과 함께 나를 데리고 강제로 바깥으로 나온 게 이해가 됐다.
성 밖으로는 못 나가지만, 이 정도는 가능했으니까. 정말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바깥 공기를 제대로 만끽할 수가 없었다.
물론, 체스터의 허락이 필요했고, 내 의지가 아닌 그의 의지로 바깥에 나온 것이기에 이번에도 체스터가 근처에 있었지만.
“엄마!”
멍하니, 맑은 하늘을 올려다볼 때였다. 이제는 제대로 된 말을 구사할 수 있게 된 딜런이 나를 부르며 이리로 달려왔다.
“…….”
예전에는 그렇게나 애틋하게 느껴지던 아이를 봐도 지금은 무섭도록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애틋함? 그런 감정은 무뎌진 지 오래였다.
체스터가 이렇게 정원으로 나오게 하는 것도, 눈에 띄게 점점 나빠지는 내 건강 상태를 진단한 주치의의 소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몸의 건강만 나빠진 건 아니었다.
마음의 문제와 정신 건강도 별로 좋은 편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인지 체스터는 나를 매일같이 강제로 산책시켰다.
“정말 개 같아.”
딜런이 걷고 뛰는 방법을 알게 된 무렵부터 내 몸에 자리 잡고 있던 공허함은 그 크기를 점점 부풀리더니 내 심장을 좀먹기 시작했다.
그 공허함이라는 감정이 나를 통째로 집어삼킬 생각인 것처럼.
죽지 못해 사는 삶. 딱 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어떤 것에도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점점 마음의 무언가가 결여되어 가는 기분에 휩싸였다.
“엄마?”
“……아빠한테 가.”
저기 혼자 나무 아래 서서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체스터한테나 가면 좋겠다. 정말 귀찮기 짝이 없었다.
이런 감정을 딜런에게 느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딜런은 자라면 자랄수록, 그리고 보면 볼수록 점점 더 체스터를 빼닮았다.
그래서 더욱 딜런을 두 눈으로 보기가 쉽지 않았다.
“엄마……. 나 싫어요?”
“…….”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귀찮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상처받을 게 뻔한데. 그래도 자식이라고 상처 주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기적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과거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예전에는 좋은 엄마가 되어 줄 거라고 했는데, 결국 나는 아빠를 닮아 갔다.
방치. 그리고 외면.
나는 아무리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아빠처럼 내 자식을 방치하고 외면하지는 않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우습게도 나는 별다른 이유 없이, 내 자식에게 내가 아빠한테 당했던 그 행동을 그대로 이행하고 있었다.
이런 내 모습을 보다 못한 건지. 체스터가 이쪽으로 왔다.
“딜런.”
“어서 데려가, 체스터.”
체스터는 이미 체념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곁에서 벗어나는 것을 체념했듯이 체스터도 내가 딜런에게 과거처럼 애정을 퍼 주지 않는 행동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몸도 아프지만, 마음이 많이 아파.”
우습게도 이상적인 엄마가 될 거라고 다짐했던 나 대신, 절대 다정한 아빠가 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체스터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우스웠다.
내가 애정으로 딜런을 키우고 싶다고 했던 말을 전부 기억하는 걸까. 아니면 나를 강제로 자신의 옆에 붙들고 있다는 데서 미약한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일까.
“엄마가 낫기 전까지는 아빠랑 놀까?”
“싫어! 난 엄마랑 놀고 싶단 말이에요! 엄마 옆에 있을 거야!”
평소 나 외의 다른 이들을 차갑게 대하는 체스터답지 않게 딜런을 어르고 달래는데.
딜런은 체스터의 말을 지지리도 듣지 않았다. 그건 날 닮은 건가.
“딜런. 이 엄마랑 같이 있고 싶니?”
딜런은 내 무릎에 찰싹 달라붙으며 귀여운 애교를 부렸지만,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냥 귀여운 애교를 부리는구나. 딱 이 정도의 감상만 들 뿐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는 그러기 싫어. 아빠랑 놀아, 딜런.”
“율리아!”
“왜? 내가 이것도 많이 순화해서 말했다는 건 너도 알잖아, 체스터.”
“……율리아, 당신이 먼저 딜런을 애정으로 키우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랬었지. 기억하고 있어.”
“그런데 왜…… 이렇게 구는 겁니까.”
“그 이유야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매주 내 건강 검진을 하잖아.”
몸 상태뿐만이 아니라, 정신 상태도 매번 꼬박꼬박 체크하고 말이야.
그러니 내 정신 상태를 아주 잘 알고 있는 건, 내가 아닌 주치의와 너잖아, 체스터.
“단지 너는 외면하고 있을 뿐이잖…… 쿨럭!”
기침과 함께 입에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나오는 감각이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