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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134화 (134/141)

#134화

체스터가 이곳에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저절로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과연 그가 이곳에 있는 게 좋은 일인지, 그렇지 않은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그가 무척 화가 났다는 것을 나타냈고, 그게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100만 골드에 낙찰되었습니다!”

흔들리는 눈으로 100만 골드를 외친 주인공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바라보았다.

후드로 얼굴은 가리고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체격과 풍기는 분위기, 그리고 본능이 그가 체스터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의 뒤에도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긴장감인지 공포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리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체스터는 점점 가까워지다 못해, 정말 코앞까지 다가왔다.

“금액은 지금 전부 지불하도록 하지.”

다시 목소리가 들리자, 불완전했던 확신은 완전해졌다.

혹시나 내 착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체스터가 맞았다.

그의 뒤를 따라온 남자들은 묵직해 보이는 검은 자루들을 바닥에 떨궜다.

경매를 진행하던 남자는 자루를 열어 봤고, 그 안은 금화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이쪽으로 점차 가까워졌다. 본능적인 공포에 몸이 묶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천천히 다가오던 그의 발걸음은 빨라지더니, 단숨에 뒷걸음을 치며 거리를 벌리고 있던 내 앞으로 왔다.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힌 체스터는 한 손으로 내 턱을 꽉 붙잡았다.

그는 장갑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따뜻한 체온보다는 이질적인 질감이 먼저 피부에 닿았다.

이어서 그는 강제로 시선을 마주치게 했다. 시선이 닿은 곳에서는 선명한 핏빛 눈동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직도 정말 저보다 바깥이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들릴까 말까 한 무척이나 작은 목소리였다.

“응? 율리아.”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시리도록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내 뺨을 감싼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어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아직도 그 생각은 변함없습니까?”

“아…… 으…….”

“정말 제 관심이 필요 없습니까? 제가 얼마나 당신한테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긴장이 풀린 걸까.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액체가 뺨을 타고 후드득 떨어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애써 힘겹게 부정해 왔을 뿐. 이곳에 있으면서 체스터가 빨리 와 주길 무의식적으로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가 없는 삶을 꿈꿨지만, 내 옆자리에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는 상상을 한 적은 없었다.

체스터의 말대로 가장 안전한 곳은 정말 그의 곁이었다.

“다시 시작해요, 율리아.”

“흐윽…….”

“과거는 잊고 현재에 집중해요. 응?”

흐릿하게 울려 퍼지는 ‘내 사랑’이라는 단어가 귓가에 맴돌았다.

“울음은 천천히 그쳐요, 율리아. 여기는 금방 정리할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줘요.”

차가웠던 음성은 다정해졌지만 이어서 그가 할 행동은 무척이나 살벌할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체스터가 내가 붙잡혀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게 이젠 단순히 내 상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 버릴 거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내 턱을 붙잡고 있던 손에서 살짝 힘을 풀더니 양손으로 내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러곤 엄지손가락으로는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을 닦아 주며, 이어 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눈 감고 귀 막고 있어요, 내 사랑.”

상냥한 눈웃음을 한 번 보여 준 그는 내 뺨을 감싸던 손을 떼어 내고는 내 손목을 묶고 있던 천을 풀어 주었다.

이어서 체스터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내게 걸쳐 주고서야 몸을 돌렸다.

그의 말대로 눈을 감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체스터가 내게 이렇게 하라고 말한 건, 아마도 전전생에 겪었던 그 트라우마를 자극하고 싶지 않아서겠지.

귀를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손 너머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나는 체스터를 신뢰하는 게 아니었다. 최악보단 차악을 선택할 뿐이었다.

아직도 과거의 기억은 선명히 뇌리에 남아 있었지만, 과연 나는 체스터가 없는 삶을 살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뜨면 주변이 온통 붉은 피로 가득 물들어 있을 것만 같아서 쉽사리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그때 내 곁으로 다가오는 발걸음의 진동이 느껴졌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 귀를 감싸고 있던 내 손등을 붙잡으며, 떼어 냈다.

“다 끝났어요, 율리아.”

“아…….”

나는 그제야 천천히 눈을 뜨고 체스터를 바라봤다.

“많이 무서웠죠? 이제 당신이 무서울 일은 없을 겁니다.”

체스터는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걸쳐 주었던 겉옷을 단단히 여몄다.

“이렇게 얇은 옷을 입은 채로 밖에 나가면…… 많이 추울 겁니다.”

“괜찮아.”

“제 생각 많이 했습니까?”

“……조금.”

“돌아가면 그곳은 안전할 거예요. 당신이 여행을 가고 싶다면 함께 떠나고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더는 돌아다니고 싶지 않았으니까.

물론 옆에 체스터가 있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는 않겠지만, 그냥 더는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딜런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영주 성에 있어요.”

“아…….”

“제 생각은 조금밖에 안 했어도, 딜런 생각은 많이 했나 보네요.”

“……응. 딜런 생각은 났어.”

“이럴 때만 지나치게 솔직한 건 별로 좋지 않은데.”

체스터는 짧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나를 소중하게 들어 공주님처럼 안았다.

떨어지지 않게, 그리고 안정감 있게 체스터의 품에 안기기 위해 팔을 그의 목에 단단히 둘렀다.

“넌 과거를 없던 일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게 불가능하더라도, 당신과 관련되어 있다면 가능하게 만들어야겠죠.”

“너는…… 가능하겠지.”

얼굴을 그의 어깨에 파묻었다.

“나는…… 피해자고, 너는 가해자니까. 너는 가해자라서 쉽게 잊을 수 있고, 과거로 묻어 버릴 수 있는 거야.”

하지만 나는 쉽게 그러지 못했다.

그는 과거를 없던 일로 치고 싶어 했지만, 그걸 없었던 일로 치기에는 내게 너무 큰 영향을 미쳐 왔었고, 또한 현재 진행형이었다.

“과거니까…… 아니, 과거이다 못해 이번 생이 아니니까. 이번에는 벌어지지 않은 일이니, 다시 시작하자는 말로 들려. 네 말이, 체스터.”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게 쉽지 않아.”

“…….”

“너도 알잖아. 나는 네 얼굴만 보면 그때가 떠올라서, 몸도…… 마음도…… 아파진다는 걸.”

이걸 모르지는 않겠지. 체스터는 나보다 나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왜 추운 걸 싫어하는지.”

“…….”

“깊은 물을 무서워하는지.”

“…….”

“시끄러운 소리와 지독한 피 냄새에 예민한지.”

내가 말을 내뱉는 동안, 체스터는 아무런 대꾸 없이 묵묵히 경청했다.

“너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잖아. 그 원인은 네게서 비롯되었다는 거……. 아주 잘 알고 있잖아.”

“외면하고 싶어도,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죠.”

“네가 내게 한 다시 시작하자는 말은…… 나는 결코 쉽게 승낙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어.”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정말 알 수 없었다.

“우리가 멀쩡하게 다시 시작하려면…… 우리 둘 다 이런 기억 하나 없이, 처음으로 돌아가야 해.”

“…….”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가 알면 안 되는 기억을 전부 가지고 있잖아?”

“율리아…….”

“그래도 네가 10만큼 노력한다면.”

눈을 꼭 감았다.

“나는 1만큼의 마음을 열려고 노력할게.”

이건 진심이었다. 체스터가 10만큼 노력한다면 1만큼의 마음은 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은 있었으니까.

1이라고 해서, 체스터는 고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터였다.

오히려…… 자신이 많이 노력하면 조금은 마음을 열어 줄 의사가 있다는 점을 더 중요하게 여기겠지.

“장담하진 못하지만…… 노력은 해 볼게. 이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지?”

“네. 당연히 이해하죠.”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내 삶에서 체스터가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게 없었던 만큼, 생각처럼 그를 내게서 지워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딜런이 체스터가 내 삶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증거였으니까.

딜런은 그와 나의 사랑의 결실이자 증오의 대상이기도 했다.

아이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막상 딜런을 보면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후회, 원망, 증오라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몸에서 들끓었으니까.

“내 마음은 확답을 줄 수 없지만, 그래도…… 이제는 네 옆에 있을게, 체스터. 이건…… 약속할게.”

“정말요?”

“물론 내가 전적이 많으니까…… 네가 내 말을 믿지는 못하겠지만…….”

“믿을게요.”

“……그리고 치료도 받을게.”

감정 기복도, 급변하는 생각들도.

정신이 아프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이걸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치료가 필요하긴 했다.

사실 원래부터 내게는 정신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껏 애써 부정해 왔었다.

내가 비정상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던 거였다. 불안한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였다.

그렇지만 이제는 아니까. 내 상태를 내가 인정하니까.

“치료받으면…… 나아질 거야.”

“…….”

“그래야 딜런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테니까.”

“제게 돌아오는 이유가 딜런 때문이었습니까.”

“……딜런이 9할은 차지하지.”

계속해서 딜런이 눈에 밟혔던 건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으니까.

나의 말이 끝난 찰나의 순간, 올라가 있었던 체스터의 입술이 살짝 굳었지만, 다시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워낙 짧은 순간이었기에, 나는 이를 조금도 알아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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