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모진 말들을 내뱉고 달아나는 율리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그렇게 간절해 보이지 않았나.
최대한 그녀를 붙잡아 보려고 했는데, 바람과는 다르게 붙잡히지 않았다.
곧이어,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각하! 부인께서…….”
함께 왔던 기사가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로 율리아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율리아의 행방은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무엇보다 애초에 내 보호가 끝났으니 어떻게 될지는 뻔했으니까.
“알고 있다.”
또 내 앞에서 등을 보였다. 그렇게 애원했는데, 율리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게 너무 괘씸했다.
나는 진심이었는데. 율리아가 소중하니까 계속 보호해 주고 있었던 건데.
그녀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직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율리아에게 나보다 세상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시킬 필요성이 느껴졌다.
“어차피 보호 없이는 원래 그렇게 됐을 테니까. 많이 늦게 현실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경각심 정도는 가지게 하는 게 좋겠지.
어쩌면 이번 일로, 나에 대한 트라우마가 다른 트라우마로 덮어씌워질 수도 있었다.
바로 율리아를 따라갈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혼자 다니는 희귀한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예쁜 여자를 납치해 데려갈 곳은 뻔했으니까.
더러운 것들이 득실거리는 암시장에 경매로 나오리라는 게 뻔히 예상되었다.
그러나 적어도 다칠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마 그런 곳에서 많이 일한 녀석들이라면 단번에 율리아는 절대로 다치게 해서는 안 될 만큼 높은 가치를 가진 상품이라고 판단할 테니까.
“암시장이 언제 열리는지 알아 와.”
“네, 알겠습니다.”
기사는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
내 보호 없이, 그렇다고 해서 확실히 너를 보호해 주는 사람도 없이, 내게서 멋대로 도망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경험해야, 다시 우리가 지내던 곳으로 돌아갔을 때 도망칠 생각은 꿈도 꾸지 않겠지.
그래도 너무 늦게 도착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를 극도의 공포 속에 남겨 두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 * *
정신이 들었을 때는 사방이 너무 어두워서, 주변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왜 내가 모르는 곳에서 깨어난 건지. 정신이 들면서 기절하기 이전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서서히 떠올랐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생각이 차분해지면서 차츰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긴 어디지?”
눈을 깜빡거리며 어둠 속에 눈을 적응시켰다.
몸을 움직이려고 하자 팔에서 알 수 없는 불편함이 느껴졌다. 마치 무언가가 손목을 움직일 수 없도록 묶어 둔 것처럼.
손목뿐만이 아니었다. 발목도 무언가로 묶여 있어 일어설 수가 없었다.
아니, 손목 발목만의 문제가 아니라 몸 자체가 무언가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으윽!”
저절로 앓는 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그때 멀리서 천천히 가까워지는 듯, 서서히 선명하게 들리는 묵직한 남자의 발소리에 몸이 흠칫 떨렸다.
그래. 이유 없는 호의는 존재할 수가 없는 거였다.
상품 가치? 그런 이야기를 꺼냈으니, 적어도 내게 생명의 위협을 가하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은 있었다.
단지, 두려울 뿐이었다. 생명의 위협을 가하는 것 말고도, 사람을 공포에 질리게 하는 방법은 다양했으니까.
무엇보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내게 별로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깨어났나요?”
“…….”
먼저 내게 말을 걸어오기에 다시 눈을 감고 잠든 척을 했다.
“깬 거 다 알고 왔어요. 자는 척하지 마세요.”
“…….”
그 말에 눈을 떴다. 그러자, 나를 납치했던 남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제게 묻고 싶은 게 아주 많을 거예요, 그렇죠?”
“여긴 어디야!”
“역시…… 이렇게 보니까 정말 예쁘네요. 돈 많은 귀족들이 정말 좋아할 얼굴이에요.”
“그게 무슨 뜻이야?”
“비싸게 팔릴 것 같으니까. 맘껏 성질부려도 다 받아 줄게요. 몸에 상처만 내지 마세요.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죠?”
“너……!”
“대신 먹을 건 제대로 된 걸로 줄게요.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하는데. 돈 많은 귀족의 첩으로 들어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괜찮은 조건이잖아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쪽은 귀족의 후처나 첩으로 들어가서 호의호식하고, 저는 당신을 그 귀족한테 비싸게 팔아넘기고. 서로에게 좋은 거 아닌가요?”
말이 통하지 않았다.
“내가 누군지 알고……!”
“누군데요?”
“난 제국의 황녀야! 하나뿐인 황녀라고!”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님께서 호위도 없이, 혼자서 다니다 못해,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고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는 믿을 만하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반박할 말이 없긴 했다.
정말 황녀인데. 호위 하나 없이 혈혈단신으로 지금껏 돌아다녔고, 체스터에게 쫓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진짜 나는 황녀란 말이야!”
“정말 황녀라면 더욱 상품 가치가 올라가겠네요.”
“뭐?”
“원래 세상이 이래요. 정말 아가씨가 황녀일지도 모르겠네요. 세상 물정을 이리도 몰라서야.”
남자는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 모습이 체스터와 겹쳐 보였다. 차라리 체스터가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방금 한 생각은 취소다.
체스터랑 같이 사는 건 다시 생각해 보니 좀 그랬다.
“원하는 게 돈이야? 나 돈 많아!”
“아가씨한테 받을 돈보다는 아가씨를 팔아서 벌 돈이 더 많을 것 같은데요?”
“그, 그럼 황실에 살짝 내 얘기만 해 줘도……!”
“그러다가 저희가 망하는 수가 있겠죠?”
혼란스러웠다.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이 남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 속에 잠긴 내 모습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볼 수 있었다.
“어차피 아가씨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 헛된 희망 같은 건 품지 마세요.”
“아니! 황성에 알려야만 해.”
그러나 순간 떠올랐다. 체스터는 순순히 나를 포기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다면 반드시 그는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아낼 게 분명하고, 나는 그대로 끌려가겠지.
당연하게 이곳은 박살이 나겠고.
이곳이 어떻게 되든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지만, 이후 내 신변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황성에서 이 사실을 알아야 너도 살고, 나도 살아!”
“그렇게 절실하게 말해도, 들어 줄 생각 없어요.”
“진짜라고! 진짜 내 말 들어야 해! 차라리 제국군이 이곳에 오는 게 나을지도 몰라!”
적어도 제국군은 이들을 생포했으면 생포했지 죽이진 않을 테니까. 그러니 그들에게도 황성에 알리는 게 이득이었다.
체스터는 무척 잔혹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전생에 황성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때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이곳은 피와 비명으로 얼룩질 것이 뻔했다.
“경매는 3일 후에 열리니까. 그전까지 얌전히 있어요.”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자기 할 말만을 남긴 남자가 유유히 이곳에서 멀어졌다.
* * *
3일간 불안 속에서 살았다. 체스터가 3일 안에 나를 찾아내어 이곳으로 쳐들어올까 봐.
또다시 코끝에 피비린내가 진동할까 봐 걱정했었는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뭐가 더 나은 선택인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확실했다.
아마, 그 남자가 말했던 돈 많은 귀족이란 늙은 귀족을 의미하는 거겠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체스터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체스터는 딜런의 아빠였으니까.
“이제 시간이 됐으니 가요.”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 남자가 와서는 구속 장치를 푼 뒤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끌려간 곳은 무척 깨끗한 방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나이가 있는 여자들이 있었다.
“깨끗이 씻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혀 놔.”
“네.”
그 말을 끝으로 안에 있던 여자들에게 끌려가 씻김을 당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혀졌다.
새 옷은 꽤 노출이 심했다.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어김없이 손목은 끈으로 단단히 묶였다.
마지막엔 검은 천을 내 머리에 씌우며 내 시야를 가렸다. 시야가 차단된 상태로, 어디론가 끌려갔다.
잠시 후 나는 방석 위에 앉혀졌다.
“…….”
어떻게 해야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까.
체스터는 내가 이곳에 있는 걸 모르는 게 분명했다. 알았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 없으니까.
그때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며 바닥 아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딘가로 나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점점 시끄러운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소음은 가득했다.
“이번 상품은 아주 희귀한 머리카락 색과 예쁜 눈동자를 가진 절세 미녀입니다!”
상황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정말 사람을 물건처럼 사고파는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물건으로 취급되고 있는 게 나라는 것.
“자, 이번 상품은 1만 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1만 골드.”
“2만 골드.”
“3만 골드.”
“5만 골드!”
“8만 골드!”
“10만 골드!”
숫자는 빠르게 올라갔다.
“10만 골드가 끝입니까?”
그 순간, 진행자는 내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을 단번에 벗겼다.
내 얼굴이 온전히 드러나던, 그 순간이었다.
“100만 골드.”
익숙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조용하고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심장이 쿵쿵거리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뛰어 댔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것만 같아서.
아니, 알 것만 같은 게 아니라 조금도 낯설지 않은 사람의 것이었으니까.
“100만 골드! 이게 끝인가요?”
그 ‘100만 골드.’를 말한 이는 내 몸을 흠칫하게 만드는…… 체스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