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일어나자마자, 텅 빈 배를 채워 주고자 식당이 있는 아래로 내려갔다.
다른 곳에서도 그러했듯, 미리 환전해 둔 주화를 건네며 익숙하게 아침을 먹었다.
저택에서, 황성에서 먹어 왔던 것들에 비한다면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마음은 홀가분했다.
“…….”
아니, 사실 홀가분하지 않았다.
단지 이 공허하고 무거운 마음을 잊기 위한 자기 세뇌에 불과한 말이었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입맛이 사라졌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숟가락을 내려놓고, 망토를 단단히 여미며 바깥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새하얀 눈이 내렸다. 그 눈을 보니, 딜런이 떠올랐다.
나와 똑같은 머리카락 색을 가지고 있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내 아기가 눈앞에서 어른거리며 양심을 쿡쿡 찔러 와 괴로웠다.
“딜런.”
정말 보고 싶었다. 조금 힘들어지더라도 딜런을 데리고 그곳에서 도망쳐야만 했었다.
이렇게 딜런을 두고 혼자 도망치는 게 아니라, 함께 떠났어야만 했다.
그런 죄책감이 남았지만, 그럼에도 체스터에게서 벗어난 것에 있어서는 후회가 없었다.
“하아…….”
숨을 토해 내자, 하얀 입김이 눈앞을 가렸다. 확실히 겨울은 겨울이었다.
조금은 걷는 게 좋을 것 같아 여관 바깥으로 나갔다.
작은 마을이 아니라, 도시니까 조금은 구경할 거리가 많을 거라는 생각에 사람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혼자 있는 것보다 사람이 많이 있는 장소로 가니 잠시나마 공허함을 잊을 수 있었다.
귓가를 파고드는 시끄러운 소리. 한때는 이러한 소음이 이명으로 이어졌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일단 옷을 사기 위해, 의상실 안으로 들어갔다. 많이 살 필요는 없었기에, 두세 벌 정도만 구매하고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기분 탓일 수도 있었다. 바깥이 아까보다 소란스러워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앗……!”
멍하니 서 있었기 때문인지. 지나가던 사람과 부딪히며 넘어졌다.
그러는 바람에 망토 안에 잘 숨겨 두었던 머리카락의 일부분이 바깥으로 삐져나왔다.
금방 일어나서, 머리카락을 다시 망토 안으로 밀어 넣으며 짐을 들고 다급하게 여관으로 돌아갔다.
이번에 온 곳은 큰 도시니까. 다른 곳보다는 오래 머무를 계획이었다.
그래서 바로 내가 묵는 방으로 들어갔는데.
“오랜만입니다.”
이곳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손에서 힘이 풀리면서 들고 있던 짐이 바닥에 엉망으로 떨어졌다.
그 누구보다 여유롭고, 느긋한 움직임으로 내가 묵고 있는 이 방을 찬찬히 살피는 그의 태도가 왜인지 섬뜩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율리아, 이런 곳에서 지낼 바에는 돌아오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지내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아침도 그렇게 영양가 있는 걸 먹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많이 먹는 것도 아니고.”
심장이 쿵쿵거리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요동쳤다.
어디서 비롯된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극도의 공포심인지, 아니면 멍청하기 짝이 없게 남아 있는 사랑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를 않았다.
“똑바로 챙겨 먹어도 그 연약해 빠진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힘든데. 제가 걱정하지 않게 생겼습니까.”
“그걸 왜 네가 걱정하냐고!”
눈을 질끈 감고 소리를 질렀다.
“그사이에…… 잊었습니까.”
“……뭘?”
“제가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요.”
“…….”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었다.
당연하다는 듯, 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온 대답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제 말을 못 믿는 겁니까? 아니면 믿고 싶지 않은 겁니까?”
“뭐가 답인지 넌 알고 있잖아.”
“……그냥 부정하고 싶은 겁니까.”
“잘 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봐?”
쏘아붙였지만, 체스터는 딱히 짜증 나 보이거나, 화가 나 보이지는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지.
“언제까지 바깥에서 이렇게 지낼 겁니까.”
“내가 언제까지, 어디서, 어떻게 지내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신경 쓰지 마.”
“신경을…… 쓰지 말라…….”
그는 내 끝말을 곱씹으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율리아, 당신이, 그것도 혼자서 이곳까지 아무런 위협도 당하지 않은 채 무사히……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던 게 누구 덕분인지 알고는 하는 말입니까.”
“세실……?”
“당신의 친구? 황후는 아마 혼자서 여행을 떠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가늠하지 못할 겁니다.”
“…….”
“전부 제가 당신한테 신경을 썼기 때문에, 이곳까지 무사히 아무런 사고 없이 올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럼……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체스터의 감시 아래에 있었다는 걸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싶었던 거라면, 함께 다녀요. 당신이 그런 걸 원했다는 걸 알았더라면…… 함께 여행을 다녔을 겁니다.”
“내가 그걸 원한 게 아니라는 건 네가 가장 잘 알지 않아?”
“…….”
“여행이 주된 게 아니고, 네가 없는 삶이 중요하다는 걸 넌 알잖아.”
체스터는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알고 있었다는 거였다.
이번에는 내게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널 지금 얼마나 싫어하는지 네가 가장 잘 알잖아!”
“……율리아, 돌아와요. 제게 다시 와 주면 안 됩니까?”
“응. 안 된다는 거 알잖아. 알면서 왜 물어봐?”
체스터가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게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나를 강제로 데려갈 생각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다가오지 마.”
그는 내 말을 생각보다 잘 들었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가까이 오던 발걸음을 멈췄으니까.
“율리아, 바깥은 당신한테 너무 위험합니다.”
“그 소리 엄청 지겨운 거 알아?”
“…….”
“네가 보기에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이 안 위험해 보이기는 해? 아니, 내가 생각하기에는 네 곁이 제일 위험해!”
감정이 격해졌다. 이성이 통제를 잃고, 본능이 머리를 지배하며 날뛰었다.
“율리아…….”
“너를 보면…… 널 볼 때마다…… 내 소중한 사람들이 전부 시체가 되었던 모습이 떠올라.”
체스터가 다가오기 전에, 내가 먼저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당장 도망쳐야만 했다. 지금은 그가 약간 충격을 받아서, 가만히 있지만 조금 이따가 충격이 가라앉으면 다시 날 끌고 갈 행동을 취할 테니까.
딜런이 그곳에 있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방에 갇힌 채 체스터만 바라보며 살아야 할지 모르니까.
체스터를 볼 때마다 심장이 뛰는 이유는 어떤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몸에 새겨진 트라우마로 인한 부작용이었다.
내가 편히 숨을 쉬기 위해서는 곁에 체스터가 없어야만 했다. 그를 볼 때마다 죽은 가족들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으니까.
그동안은 무의식적으로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전혀 아니었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똑같았다. 피는 딱딱하게 굳고, 몸은 차게 식은 가족과 유모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아른거렸다.
“우욱!”
지금은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때를 생각하면 비릿한 피 냄새에 구토감이 일렁였다.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윽!”
뛰면서 살짝 삐끗했는지 발목이 뜨겁게 화끈거리면서 저렸다.
그런 다리로 열심히 걸었다. 말이 있는 곳까지는 가야만 했다. 체스터는 추격에 능했으니까.
빠르게 움직여도 바로 나를 따라잡을 게 분명했다.
그랬기에 열심히 움직여 봤지만,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순간,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당장에라도 안 괜찮다고 하고 싶었지만 그런 말은 삼켰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지금 이 사람의 호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과연 그냥 평범하게 도와주기 위함인 건지. 아니면 불순한 의도가 조금이라도 첨가되어 있는 것인지.
구분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점이 퍼뜩 떠올랐다. 곧 체스터가 나타나면 이대로 끌려갈지도 몰랐다.
그랬기에 내 앞에 내밀어진 손을 붙잡았다.
“어디 가는 길인가요?”
낯선 남자는 주저앉아 있던 나를 한 번에 일으켜 세우며 호의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이 도시에서 멀어질 수 있도록…… 아니,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네. 그 정도는 어렵지 않죠.”
경계심이 가득 서렸지만, 그래도 지금은 타인의 도움이 필요했다.
지금 내 발목으로는 이 도시를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으니까.
이 남자의 도움을 받아, 체스터가 있는 여관에서는 멀어질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마차를 얻어 탄 후에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머리카락 색이…… 독특하네요.”
“아…….”
그제야 망토 바깥으로 빠져나온 머리카락이 눈에 보였다.
“어디에서 오셨나요?”
“……제국 사람이에요.”
“혼자 온 거예요?”
“……네.”
“아는 사람은 있어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일한 아는 사람인 체스터는 별로 달갑지 않은 남자였으니까.
“다행이네요.”
“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
“그리고 가까이서 보니까. 정말 미인이시네요.”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그런 남자의 태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눈동자만을 데구루루 굴리며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눈도 무척 예쁘고요.”
“감사……합니다?”
별로 감사할 일은 아니지만, 그냥 침묵하고만 있자니 어색한 분위기를 견딜 수가 없어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남자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죠.”
“네?”
“비싼 상품이니까요.”
“비싼…… 상품?”
“네. 비싼 상품. 흠집이 나면 안 되니까…… 조심히는 다뤄 줄게요.”
그 말을 끝으로, 코와 입이 축축한 손수건으로 덮였다.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알 수 없는 향에 취해 그대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