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세실의 도움으로 무사히 지크베르트 공작령에서 빠져나왔다.
어쩌면 체스터가 묵인하고 있기에, 조용하게 지크베르트 공작령을 벗어날 수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무엇이 진실이든 이젠 아무런 상관없었다.
“……여행을 떠날 거니까.”
제국은 넓은데, 황녀라는 신분을 가지고서도 지금껏 돌아다닌 곳이 별로 없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혼란스러운 감정을 정리하고 싶었다.
어딘가에 갇혀 있는 게 싫어서 나왔으니, 자유롭게 발걸음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이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 체스터가 날 추적하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
크게 짐을 챙길 필요도 없었다. 옷이야 여행을 떠난 곳에서 새로 사면 그만이고, 먹을 것이야, 마을에 들러서 사면 될 테니까.
그러니 금화만 좀 챙기면 그만이었다.
벽에 걸려 있던 망토를 걸치고, 주머니에 금화만을 담아서, 바깥으로 나갔다.
마구간 근처로 가자, 하인이 알아서 말 한 마리를 꺼내 왔다.
안장에 올라타, 말을 몰았다.
딱히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발길이 닿는 곳이 곧 목적지일 뿐이었다.
“…….”
하나만 유의하면 됐다. 지크베르트 공작령과는 최대한 멀어지는 방향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 그것만 주의하면 충분했다.
* * *
매일 보고를 받았다.
율리아가 목적지 없는 여행을 떠났다는 것도, 계속해서 이곳과 멀어지고 있다는 것도,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것도.
전부 보고를 받기에 알 수 있었다.
“정말…… 율리아는 조심성이 없다니까.”
호위도 없이, 혼자서 여행을 떠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데. 그걸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특히 율리아처럼 예쁜 여자는 더욱 위험했다. 생각보다 그림자의 크기는 컸으니까.
가장 먼저 위험에 노출되는 게, 혼자 다니는 예쁜 여자인데. 정말 내가 호위를 붙여 놓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그래도 이런 순진함이 사랑스럽긴 했다.
율리아는 정말 특별했다. 근처에 있지도 않은데, 저절로 내 입에 웃음을 짓게 만들었으니까.
“흐응, 딜런. 엄마는 네가 보고 싶지 않은가 봐.”
딜런을 돌봐 줄 사람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이에게 맡기지는 않았다. 율리아가 있었다면 누군가를 고용해서 아이를 맡겼겠지만, 그녀가 없는 지금은 내가 직접 돌보는 게 마음이 편했다.
율리아는 딜런을 애정으로 키우고 싶어 했으니까.
그런 율리아가 황후한테 따로 무슨 부탁을 했는지. 황후가 내게서 딜런을 뺏으려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결국에 아이는 내 품에 있었다.
“네가 어서 커야, 이 자리를 물려줄 수 있을 텐데.”
“우으아?”
“네가 크면 지크베르트라는 이름의 것들은 전부 네 것이 될 거라고, 아들.”
얼굴에는 율리아를 닮은 구석이 조금도 없었지만, 그래도 표정이 풍부한 건 그녀를 닮아 보였다.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래서 다들 아이를 원하는 걸까. 딜런을 곁에 두면 심심할 시간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자리를 네게 물려주고…… 네 엄마랑 여행을 다니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지금 이곳저곳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율리아의 행동들을 보면, 내게서 도망치려 했던 이유가 공간이 한정되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유라면 충분히 해결해 줄 수 있었다.
율리아와 함께 다니는 거라면 어디든 만족스러울 테니까.
그러니 그 전까지 내가 딜런을 잘 케어해야만 했다.
그녀를 다시 이곳에 데려왔을 때 딜런이 무척 사랑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면 마음을 돌릴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아부부!”
양팔을 벌리며 안아 달라는 딜런의 모습이 마치 율리아를 연상시켰다. 안아 달라는 버릇도 닮았다.
대충 시계를 보니 율리아가 있을 때 늘 산책했던 시간이었다.
딜런은 꽤 기억력이 좋았다. 제법 똑똑했다.
“딜런, 산책하고 싶어?”
친애하는 아드님께서 산책하고 싶다는데, 기꺼이 그 요청을 이루어 주어야지.
익숙하게 딜런을 품에 안으며, 바깥으로 나갔다. 오늘도 어김없이 날씨는 좋았다.
“다음에는…… 율리아도 함께 있으면 좋을 텐데, 그치?”
딜런은 대답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그녀가 바라던 이상적인 가족이 완성되려면 율리아가 지금 옆자리에 있으면 되는데.
하나가 없어서 완성되질 못했다.
일방적으로 약속한 기간은 한 달이었다.
그러니 한 달 안에 제 발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직접 데리러 가야겠지.
* * *
“흠…….”
한 달이 지났다. 그런데 정말 율리아는 조금도 돌아올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데려오려면 언제든 데려올 수 있었다.
못 잡는 게 아니라, 안 잡는 것일 뿐.
돌아올 생각이 전혀 없는 모습이 제법 화를 불러일으켰다. 나 혼자만 그녀의 부재를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 것만 같아서.
내 삶의 절반에 그녀가 존재하는 만큼, 그녀의 삶의 절반도 나로 채워져 있을 텐데.
삶의 절반이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한데, 그럼 그녀도 지금의 나처럼 부재를 느껴야 하지 않나?
“딜런. 엄마를 어떻게 데려와야 할까?”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데리고 오고 싶은데, 그렇게 하면 분명 율리아의 반발심을 불러일으킬 게 뻔했다.
그렇다면 율리아에게 이곳이 안전하고 바깥이 위험하다는 경각심을 느끼게 할 필요가 있었다.
원래 위협 같은 건 별로 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건 미래를 위함이었다.
율리아를 지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나라는 사실 하나를 그녀에게 각인시키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엄마한테 그냥 딱 위협만 줄게. 아빠가 엄마를 다치게 할 리가 없잖아, 그치?”
딜런이 알아들을 리가 없다는 걸 알지만, 그냥 중얼거렸다.
그리고 딜런을 안은 채로 밖으로 나가, 기사들을 소집했다.
“부인의 호위는 멈추지만, 상해를 입기 직전이라든가, 생명이 위험한 순간이라는 판단이 서는 순간엔 보호한다.”
“예!”
“그래. 나도 부인이 있는 곳으로 오늘 출발할 생각이니, 그리 알도록.”
“예!”
오늘 출발할 예정이었으니, 이게 맞았다.
이미 이동할 준비는 끝나 있었다. 단지, 딜런이 장기적인 이동을 버틸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아직 딜런은 갓난아기에 가까웠으니까. 그게 마음에 걸렸다.
“……딜런, 방금 봤지? 이제 곧 아빠의 자리가 네 것이 될 거야.”
“우으?”
“그래, 너는 아직 어리니까. 몰라도 된단다, 우리 아들.”
율리아가 없어도, 딜런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없으면 절대 웃지 못할 줄로만 알았는데, 그녀가 남긴 존재가 나를 웃게 만들었다.
그래서 지키고 싶었다. 사랑하는 여자의 아이이기 이전, 내게도 소중한 생명이었으니까.
딜런은 이곳에 두고 떠나는 게 맞는 선택이겠지. 혹시라도 약한 아기의 몸으로 무리하게 이동하다가 아플 수도 있으니까.
“……혼자 두고 싶지는 않은데.”
언제든 달려가 볼 수 있는 곳이면 괜찮았지만, 지금은 아주 멀리 이동하는 거니까.
원할 때 볼 수가 없었다.
혼자 남겨지는 그 외로움이 어떠한지. 그 감정이 얼마나 독한지. 가장 잘 아는 건 나였다.
아이에게 부모의 존재가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 역할이 되어 주는지 직접 경험했으니까.
그래서 내 자식에게만큼은 부모의 부재에 대한 불안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부정하고 혐오해 왔던 기괴하고 비이성적인 광기 어린 집착을 하던 어머니의 모습과 내 모습이 아주 많이 겹쳐 보였다.
그렇게 되지는 말아야지. 그렇게 다짐했었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두 눈을 가리며 그 생각을 억압했다.
품에 안고 있던 딜런을 하녀에게 맡기기 전,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딜런, 너는 이곳에 남을 거야.”
“아우?”
“아빠는 잠시 이곳을 떠나 있을 테지만, 결코 너를 버리는 게 아니야. 그리고 반드시 엄마와 함께 돌아올 거야.”
“아부!”
“그러니, 아빠 얼굴을 오랫동안 보지 못해도, 엄마 얼굴을 보지 못했던 지난날처럼 씩씩하게 있어 줄래, 우리 아들?”
못 알아들으리란 것을 가정하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떠나기 전 인사는 꼭 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딜런을 두고 가려는 내 행동에 대한 불안감이 발목을 붙잡아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럼 아빠가 없는 동안 잘 지내야 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녀에게 딜런을 맡기고, 검과 겉옷을 받아 챙기며, 미리 준비된 말에 올랐다.
다시 사랑하는 여자와 재회할 시간이었다.
* * *
“피곤해!”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좋은 여관의 가장 비싼 방을 잡고 올라와서 침대에 지친 몸을 풀썩 뉘었다.
푹신푹신한 매트리스의 감촉에 몸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아, 이불을 꼭 안고 데굴거리다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아…….”
확실히 여행을 다니는 건 즐거웠다.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내가 지금껏 보지 못했던 게 얼마나 많았는지 직접 확인하는 순간이었지만, 계속 우물 속 개구리처럼 살았던 탓일까.
우물 바깥으로 나오니, 처음에는 모든 게 신선하고 재미있다고 느껴졌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흥미와 재미를 잃어 갔다.
새로운 환경은 단지 먹먹한 가슴을 일시적으로 채워 줄 뿐이었다.
“그렇다고……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체스터의 성격상, 나를 추적할 건 뻔했다.
조만간 내가 어디에 있는지 위치 정도는 금방 알아낼 유능한 남자이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잡히지 않게 잘 도망 다니며 여행을 즐기는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딜런은 보고 싶었다.
이 공허하게 뚫려 버린 마음 한편은 전부 딜런 때문인 게 분명했다.
“딜런, 보고 싶어.”
장시간 말을 탄 탓인지, 몸이 많이 묵직하고 이곳저곳이 쑤셨다. 푹신한 이불을 덮은 채, 잘 누워 눈을 감았다.
약간의 후회감이 들면서, 근육통이 온 것처럼 이곳저곳에서 통증이 일어나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아픔을 애써 무시하며 그대로 스르륵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