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더 밤이 깊어지기 전, 탈출을 강행해야만 했다. 더 늦어진다면 영영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체스터가 나를 막기 전에, 내가 먼저 이곳을 벗어났다.
딜런이 눈에 계속 밟히긴 했지만, 지금 내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체스터의 시선이 계속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는 그냥 날 내버려 두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겐 기회이니 연회장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세실!”
밖으로 나오자, 멀리서 세실이 있는 게 보였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면서 세실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세실은 말 한 마리의 고삐를 쥐고 있었다.
“율리아, 기다렸어. 준비는 다 끝났어.”
“……고마워.”
“완벽할 수는 없지만…….”
세실은 고삐와 함께 접혀 있는 종이를 내게 쥐여 주었다.
“승마는 할 수 있지?”
“응!”
“네가 지낼 곳은 그 종이에 적어 뒀어.”
“……세실, 고마워.”
“너무……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이런 방법이 맞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게 네가 원하는 방법이라면 도와줄게.”
“이만큼 도와준 것만으로…… 충분해, 세실.”
단지, 내가 네게 한 가지 부탁을 더 해도 된다면…….
“염치없지만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계속 딜런이 마음에 걸렸다.
딜런을 체스터에게 두고 도망친다는 점이 내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고, 떠나려는 발목을 붙잡았으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내가 딜런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세실뿐이었다.
그런데 부탁하고 싶은 말이, 쉽사리 입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뭔데?”
“……내가 이곳을 떠나는 게 딜런을 이곳에 두고 나만 사라지는 거잖아.”
“그렇지.”
“체스터가 딜런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게…… 이만큼 도와준 네게 염치가 없다는 걸 알지만…….”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입 안에 가득한데, 좀처럼 입술 바깥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딜런을 지켜 줄 수 있을까?”
“그럼. 딜런은 내가 잘 지켜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고마워…….”
“네가 안심할 수 있게, 딜런은 내가 잘 지켜 줄게. 그러니 이제 출발해, 율리아.”
고개를 끄덕이며 결국 고삐를 잡고 말을 몰았다. 앞을 보고 달려야 하는데, 계속 고개가 뒤로 향했다.
뒤를 힐끔힐끔 쳐다보다 세실이 더는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시선을 앞으로 고정할 수 있었다.
계속 머릿속에서 딜런이 떠올랐다.
애써 떨쳐 보려고 노력해도, 쉽게 사라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딜런의 얼굴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아…….”
이건 미련일까? 아니면…… 죄책감일까?
* * *
밖으로 나가며 서서히 멀어져 가는 율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온전히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율리아.”
네가 숨기는 게 많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율리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전부 드러났으니까.
사실 율리아가 비밀을 털어놓을 때, 그 사실들을 전부 알고 있었다.
“……나도 겪었으니까. 율리아, 네 말을 믿는 건 당연한 거지.”
나도 네게 숨기는 게 있으니까.
율리아가 전생에 우연히 읽었다던 그 책은 아마도…… 내가 기록한 것이 분명했다.
다시 모든 것들을 되돌리고 싶어서.
무언가 많이 어긋났다는 것을 깨닫고, 한 번 겪은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내가 겪은 미래와 현재는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그런데 변함이 없는 건…… 율리아의 불행이었다.
과정이 어떠하든, 결과적으로 율리아에게는 그렇게 행복한 미래가 다가오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율리아는 전생에 더 행복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행복을 깨부수고 행복이 없는 이곳으로 끌어당긴 게 어쩌면 나일지도 모르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애써 지금까지는 무시해 왔지만, 율리아에게 직접 말을 들으니 확실해졌다.
율리아는 지금보다는 전생에 더 행복했고, 그 행복 속에서 불행만이 가득한 이곳으로 데려온 게 나일 거라는 확신이 생겼으니까.
“무엇보다 나는 내 미래를 바꿨으니까.”
너도 네가 지크베르트 공작에게 가족들을 모두 잃은 채 죽는 미래는 바뀌었지만, 그뿐이니까.
네가 원했을 미래와 현재는 다른 것 같으니.
이곳에서의 삶보다 전생의 삶이 네게는 더 행복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너의 행복을 빌어 주는 게 좋을 테니까.
네가 과거를 알고 있다면 너에 대해서는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있을 것만 같은 지크베르트 공작도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뜻으로 봐도 이상할 게 없었다.
“……우정이라기보다는 죄책감 때문에, 널 도와주는 것 같아.”
너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수 있도록 네 부탁을 들어주는 게 좋을 것 같네.
나는 네가 전생에 사랑했던 지크베르트 공작과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는데, 그건 결국 내 바람일 뿐이었구나.
* * *
찬 밤바람이 뺨과 머리카락을 스쳤다.
잠시 길가에 멈춰 조심스럽게 아까 세실에게서 받았던 종이를 펼치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장소를 확인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여관이 표시된 지도와 함께, 그곳에 미리 사람을 준비해 두었으니, 안내를 받으면 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정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머릿속은 새하얀 백지였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하면서 지내야 하는지 목표가 없었다.
차라리 딜런이 있었을 때는 미래에 대한 생각이라도 났었다. 무사히 딜런을 낳고, 줄 수 있는 사랑을 전부 주며 애정으로 키워 주자고.
그런데 지금은 아무런 삶의 목적이 없었다.
당장 체스터에게서 달아나는 것에 급급해서, 내가 그에게서 벗어나 진정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의문이 생겼다.
딜런을 두고 나오면서까지…… 체스터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막상 그 뒤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나는…… 뭘 하고 싶은 거지?”
체스터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거라면, 이렇게 그에게서 멀어지는 게 아니라 그의 옆에서 기회를 노리는 게 맞았다.
그런데 나는 그에게서 멀어지는 선택을 하고 있었다.
일단 세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이곳에서 멀어지는 게 우선이겠지.
그래. 어디론가 떠난다면 하고 싶은 게 생기지 않을까.
공부를 한다든가, 아니면 여행을 떠난다든가.
체스터에게서 벗어나면 할 수 있는 건 많아지잖아? 그러니 혼란스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이곳에서 멀어지고 나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잡생각은 애써 지워 버리며, 다시 말을 몰았다. 체스터가 마음만 먹으면 나를 찾아내는 건 무척이나 쉽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미안해. 딜런, 내 아가.”
지금 이 혼란스러움 속에서 유일하게 생각나는 건 딜런이었다.
내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어야만 했다. 반드시…….
지금 나는 사랑하는 딜런을 체스터에게 두고서 혼자 떠나왔으니까.
* * *
율리아를 내버려 두었다. 어디 한번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라고.
또다시 뒷모습을 보이며 내게서 도망치려고 전전긍긍하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붙잡거나 막지는 않았다.
과연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지.
먼저 제풀에 지칠 것이 분명했기에, 도망치려는 게 이전부터 뻔히 눈에 보였어도 모르는 척해 왔다.
마음대로 도망쳐 보고, 발버둥 치다가 결국 그 끝에는 날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모든 걸 체념한 채 내 옆에 있길 원했으니까.
“딜런, 네 엄마가 우리를 버리고 떠났는데 어떻게 할까?”
품에 안고 있던 딜런의 등을 토닥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딜런은 아직 이해하지 못하겠지. 율리아가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내게서 도망치고 싶어 했다는 것을.
“흐음……. 정말 율리아는 귀엽단 말이지.”
그나저나, 율리아는 정말 나를 몰랐다. 도망치는 행동을 보이지 않아도 가둬 두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는데.
도망치면 더 붙잡고 싶어진다는 걸 모르는 걸까.
마치 눈앞에서 먹잇감이 등을 보이며 도망치면 더욱 맹렬히 쫓는 맹수처럼.
“괜찮을 거야, 딜런.”
“우으?”
“결국 엄마는 돌아올 거니까. 자의로든, 타의로든.”
자의로 오지 않는다면 끌고서라도 데려올 생각이니까.
“엄마한테 어느 정도의 자유 시간을 줄까?”
“아우!”
“응? 내일까지만 내버려 두자고? 하루는 너무 적나? 이왕 도망쳤으니, 일주일 정도 자유는 줘도 되겠지.”
정말 웃음이 입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시 이곳으로 율리아를 데리고 오게 되면, 단 한 발자국이라도 방 밖으로 나서지 못하게 가둘 생각이니까.
어서 빨리 가는 발목에 족쇄를 채우고, 매일매일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살아 있다는 증거인 따뜻한 체온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싶었다.
“그래도 스스로 돌아오면…… 족쇄는 채우지 말까? 우리 아들은 어떻게 생각하지?”
“아부부?”
“그래, 일주일 만에 생각이 정리되기는 쉽지 않겠지. 한 달 정도는 시간을 주는 게 좋을까?”
“우으!”
“그래. 한 달 후에 엄마 데려오자.”
내 사랑, 율리아.
그렇게 내게서 도망쳐서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하는데, 느낄 거면 제대로 느껴야겠지.
내게서 도망치고 싶어서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더라도 나는 결국 당신을 찾아낼 텐데.
지난번과는 다르게 이렇게 허술하게 도망치면 어쩌자는 건지.
귀엽긴 귀여웠다. 내게서 벗어나려고 힘겹게 버둥거리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때쯤엔 엄마도 반성 많이 했을 거야, 딜런. 나를 두고 떠나는 건 조금의 감정도 없겠지만, 너를 두고 떠났다는 점에서 죄책감에 시달릴 게 분명하거든.”
그래도 이렇게 어두울 때 이동하면 위험할 텐데.
하지만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엄마가 다칠 일은 없을 거야. 이미 호위를 붙여 놨으니까.”
그녀가 매일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보고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위험하지는 않은지. 혹시나 나를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게서 벗어난 것을 후회하지는 않을지.
궁금했다. 과연 율리아는 내게서 떠나면 무엇을 하려고 했던 건지.
“딜런, 그럼 오늘은 이만 들어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