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체스터의 에스코트를 받아, 바깥으로 나갔다. 그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하녀에게서 딜런을 받아, 안아 들었다.
“딜런, 생일 축하해.”
지금 내 감정이 어떠하든, 그래도 오늘은 하나뿐인 내 아이의 생일이었기에 오로지 딜런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부드러운 웃음을 얼굴에 머금으며 말했다.
그리고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는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그래.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으면 했다. 그래야 내가 이곳을 제대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연회장 안 가장 상석으로 가, 앉았다.
안은 초대받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체스터.”
“네.”
“세실이 오면…… 세실과 둘이서 얘기하고 싶어.”
“흐음…….”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거야.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오랜 친구인데, 그 정도는 허락해 줄 수 있잖아.”
“……그러죠.”
체스터는 못마땅해하는 눈치였지만, 결국에는 허락했다.
물론, 세실이 황후라는 자리에 있으니 권력 서열도 그녀가 체스터보다 더 위였다.
그러니 그의 허락이 없더라도, 세실이 직접 말을 꺼낸다면 체스터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율리아.”
“왜.”
“허튼 생각 하지 말아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고 그렇게 말해?”
“뻔히 보입니다.”
내가 도망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오늘만을 위해, 그의 경계심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얌전하게 지내 왔다.
그러니 눈치채지 못했을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도 되는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날 못 믿어?”
“신뢰라……. 먼저 신뢰할 수가 없다고 말한 사람이 누군데, 재밌네요.”
할 말을 잃었다. 우리 둘 사이의 신뢰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건 나였으니까.
그렇지만…….
“나를 믿어서…… 딜런의 생일 파티를 내게 맡긴 거 아니었어?”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어째서 딜런의 생일 파티를 내가 주관하도록 기회를 준 건데?
“저도 당신을 믿은 적 없습니다. 율리아는 늘 제게서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잖아요.”
“그럼…….”
나한테 이번 일을 맡긴 저의가 뭐야?
나를 믿지 않는데, 왜 내게 도망칠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를 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날 믿지 않았다면 절대 이런 중요한 행사를 맡기지 않았을 텐데.
“……날 믿지도 않으면서 이번 일을 내게 왜 맡긴 거야.”
“한 번 정도는 기회를 주고 싶었으니까요.”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니…… 율리아, 도망치지 마요.”
“…….”
“제가 미치는 꼴 보고 싶지 않다면 그만둬요. 오늘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으면 외출도 할 수 있게 해 줄게요.”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이미 다 알면서 하는 말인 것만 같아서.
하지만 내가 어떻게 이곳에서 도망칠지는 모르는 게 분명했다.
아니, 반드시 몰라야만 했다.
“저를 떠나려고 하지 마요, 율리아.”
“네가 지금 하는 그건 권유도, 부탁도, 애원도 아니야.”
내가 느끼기엔…… 말만 부드러울 뿐인 위협적인 협박이었으니까.
그랬기에 비죽거리는 웃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협박일 뿐이야, 체스터.”
“잘 알아들었네요, 율리아. 지금 제가 당신을 협박하고 있다는 거.”
체스터는 눈매를 부드럽게 접으며 눈웃음을 쳤다.
나 자신보다도 체스터가 나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내 생각을 훤히 뚫어 보고 있는 걸 테지.
어쩌면 내가 그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단 하나, ‘죽음’뿐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죽음’은 가장 최후의 수단이었다. 만약 내가 죽는 선택을 하게 되더라도, 그의 눈앞에서 고통스럽게 죽어 가야만 했다.
그래야 체스터가 아파할 테니까.
“난 새가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나는 새장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새도, 심심함을 달래 줄 새도 아니야, 체스터.”
네 눈에 비치는 나는 새가 아닐까 싶어.
그러지 않고서야 네가 계속 나를 거대한 새장 속에 가두려고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으니까.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를 외부와 차단하려고 하는 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자신과 함께 나가는 게 아니라면 극도로 싫어하는 모습을 비치는 게 과연 정상적인 걸까.
이젠 뭐가 정상이고, 뭐가 이상한 건지 구분이 쉽게 되지를 않았다.
“율리아, 제 눈에 당신이 사람이 아니라 새로 보였다면 이 정도로 끝나진 않았을 겁니다.”
“…….”
“아직 제가 이성이 남아 있을 때, 옆에 있어요. 제가 제정신을 유지하려면 당신이 제 옆에서 떠나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넌 이미 내가 네게서 달아날 거라고 확신하지?”
“도망치지 않을 거라고 말 한마디만 해 주면 됩니다. 그리고 옆에 있어요.”
“나는 도망칠게. 너는 막아.”
“그 말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막거나, 아니면 찾거나. 어차피 너는 늘 네 멋대로 행동했잖아?”
시선을 더는 체스터가 있는 방향으로 돌리지 않았다.
체스터가 꼴도 보기 싫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혹시 딜런을 조금이라도 더 보게 된다면 마음이 흔들릴까 싶어서.
기껏 굳게 먹은 마음이 쉽게 무너질까 두려워서, 애써 옆으로 향하는 시선을 정면에 단단히 고정했다.
곧 세실이 멀리서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이곳에선 그런 차림이 눈에 띄었기에 쉽게 세실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황후의 신분으로 온 게 아니었다.
이해됐다. 황후가 어떻게 쉽게 황성을 비울 수 있을까.
그리고 이곳까지 공식적으로 오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할 테니, 이렇게 오는 게 맞는 거긴 했다.
“다녀와요, 율리아.”
“…….”
나보다 체스터가 먼저 알아차렸던 건지.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가 먼저 내게 권유했다.
그래도 그걸 부정하거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테라스로 향했다.
아마 내가 움직이는 것을 세실도 봤을 테니, 나를 따라올 것이었다.
뒤를 힐끔힐끔 살피며, 조용히 테라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먼저 테라스에 가서 기다리자, 문이 열리며 얼굴을 단단히 가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그 사람이 얼굴을 가리던 후드를 벗음과 동시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오랜만이야, 율리아.”
“세실…….”
“혹시나 내가 예상한 것과 다르게 좋아 보이는 모습이었더라면…… 잘 지냈냐고, 안부를 묻고 싶었는데.”
“…….”
“별로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 그런 말은 못 하겠네.”
그래도 친구를 보니 마음이 좀 놓였다.
저절로 편안한 미소가 입가와 눈에 번졌다. 얼마 만에 이렇게 가식 없이 편히 웃는 건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색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아.”
“……얘기하자면 길어.”
“너는 너만 알고 있는 비밀이 많아 보여, 율리아.”
“미안.”
“나한테도 털어놓지 못하는 비밀이야? 너는…… 꼭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위태로워 보여.”
“네가 보는 게 맞아, 세실.”
정말 세실에게는 숨길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았다.
“네 건강에 문제가 생긴 거라면, 지크베르트 공이 먼저 알아보고 신경 썼을 텐데. 그건 아닐 테고.”
“…….”
“지크베르트 공이랑 무슨 문제라도 있었어? 내가 따로 조사는 해 보려고 했는데, 영지로 내려간 이후로는 네 소식을 알 수가 없었어.”
“너라면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올 거라고 생각했어.”
“…….”
“나 이곳에서 나가고 싶어.”
“지크베르트 공이랑 무슨 일이 있구나? 단순하게 싸운 문제는 아닐 테고…….”
“응.”
“왜 도망치고 싶어 하는 거야. 분명…… 예전에는 네가 행복해 보였는데.”
어떻게 세실에게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해도 너무 허무맹랑한 얘기인데.
나는 사실 율리아로 사는 게 두 번째이고, 첫 번째 삶에서 체스터에게 가족을 다 잃었는데, 그도 그 기억을 전부 가지고 있다고 어떻게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정말 진실만을 말한다고 해서 믿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정신 상태가 이상하다고 판단해 내게 도움을 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세실을 못 믿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내가 알면 안 돼?”
“……그건 아니지만, 네가 믿지 못할 수도 있어.”
그리고 잘못하면 오빠의 귀에도 들어갈 수 있으니까.
오빠에게는 이런 사실을 말해 주고 싶지 않았다. 오빠는 아무런 기억이 없으니까 쭉 모르는 대로 두고 싶었다.
“율리아,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믿어 줄게. 그리고 네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할게.”
“…….”
결국 더는 세실에게 숨기는 것도 무리라고 판단했다. 세실의 손을 꼭 붙잡으며, 눈을 질끈 감고 말을 꺼냈다.
과거에 오빠와 아빠가 체스터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 물론 세실에 관해서는 쏙 빼놓고.
“……율리아.”
“역시…… 네가 들어도 믿지 못하겠지?”
“아니, 믿어. 믿을 수밖에 없지.”
의외의 대답에 놀랐다. 절대 믿지 못하거나, 말로는 믿는다고 해도 눈빛에서는 불신이 비쳐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실의 눈빛은 정말 신뢰로 가득했다. 되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붙잡고 있던 손을 본인이 더 꽉 잡아 주며 긴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연히 믿어, 율리아. 어떻게 안 믿겠어!”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네가 왜 이상해. 나는 널 믿어, 율리아.”
“왜…… 이런 허황된 말을 믿어줘?”
“그건…… 당장은 말해주기 힘들지만, 조만간 그 이유를 꼭 말해줄게. 그리고 여기서 도망치고 싶다고 했지?”
“……응.”
“도와줄게.”
세실의 말에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어?”
“네가 이곳에서 도망칠 수 있게 도와줄게, 율리아.”
“정말로……?”
“응. 그럼.”
세실은 나를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이대로 여기서 벗어난다면 좋겠지만, 의심을 살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연회가 끝나 갈 무렵에 바깥으로 나와. 그럼 준비가 끝나 있을 거야.”
“……고마워.”
* * *
파티가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세실의 도움을 받아 체스터에게서 완벽하게 벗어나기 위한, 찰나의 인내였다.
단지 서로 눈치만을 볼 뿐이었다. 과연 내가 도망을 칠지, 아니면 그 전에 체스터가 나를 막을지.
“…….”
곧 지독한 숨바꼭질이 시작될 거란 생각에 심장이 초조하게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