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128화 (128/141)

#128화

내가 준비하는 딜런의 생일 파티는…… 내가 딜런에게 해 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 될 테니까.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딜런의 모습을 두 눈에 담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사랑해, 내 아가.”

딜런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씁쓸함이 입 안에 감돌았다.

이게 잘못된 선택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내가 비참했다.

“아부부?”

“엄마가 미안해, 딜런…….”

품에 딜런을 꼭 안은 채로,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초대장을 빙자한 구해 달라는 신호를 보내야 했으니까.

오빠에게 보내기에는 위험 요소가 많았다. 그러니, 내가 편지를 보내는 대상은 오빠가 아닌 세실이었다.

세실이라면 체스터의 눈을 조금은 더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 사실 황제인 오빠가 이곳까지 방문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꽤 거리가 있었으니까.

생각해 보니 그건 세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수도에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영지에서 파티를 열어야 하는 지금은…… 애초부터 황후인데, 이곳에 올 수 있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으으……. 뭐든 쉬운 게 없네.”

그래도 작은 희망이나마 품고 초대장을 보내 보기로 했다.

세실이 어떠한 이유로든, 이곳에 오게 된다면 단둘이서만 얘기를 할 수 있을 터.

그럼 그게 곧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될 텐데.

이 안에서는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려면 무조건 세실이 이곳에 와 줘야 할 텐데. 아니면 그곳에서 나와 계획을 세우든가.

그냥 나 혼자 이곳에서 혈혈단신으로 빠져나간다 해도, 체스터의 능력이라면 금방 또다시 이곳에 끌려올 게 뻔했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억압받을 게 분명했다.

“세실.”

그러니 지금 나는 네가 필요해.

나를 이곳에서 꺼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너니까. 제발…… 나 좀 살려 줘.

* * *

지크베르트 공작과 함께 영지로 내려간, 율리아에게서 초대장이 도착했다.

다름 아닌, 딜런의 생일 파티에 참석해 주면 좋겠다는 초대장이었다.

지크베르트 가문의 영지가 수도에서 꽤 거리가 있었기에 약간 망설여지긴 했지만, 승낙의 답신을 보냈다.

기분 탓이 아니라면, 율리아의 글씨가 평소보다 삐뚤빼뚤했다.

마치 어딘가 불안한 사람처럼.

글씨는 사람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 같기에, 그렇게 동요한다는 건 분명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음이 틀림없었다.

“율리아.”

무엇보다 잘 살고 있다고, 정말 행복하다는 말이 편지에 단 한 글자도 담겨 있지 않았다.

정말 내가 영지에 와 주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처럼, 제발 자신을 좀 구해 달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넌 어떻게 살고 있는 거야.”

정말이지 소리 소문이 없었다.

물론, 지크베르트 공작이 율리아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거란 확신은 있었다.

제3자가 보기에도 지크베르트 공작은 율리아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율리아는 자신은 행복하다거나 잘 지내고 있다는 안부조차도 전하지 않은 걸까.

무엇보다 편지의 내용에서는 조금의 산뜻함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삭막해.”

내가 제대로 판단한 게 아니길 바라지만, 그래도 율리아가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거라면.

무슨 도움을 원하는 건지.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지크베르트 공작과 연관이 있으리란 건 분명했다.

율리아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지크베르트 공작을 두고서, 내게 도움을 요청한다고?

“설마…… 지크베르트 공작과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원래 결혼은 마음으로만 하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율리아에게는 딜런도 있으니 고작 마음이 식어서 헤어지는 일은 없을 텐데.

하지만 두 사람이 영지로 내려간 뒤 아무 소식도 들리지 않았던 것이 다시 한번 마음에 걸렸다.

당연하게도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던 게 화근이었을 수도 있었다.

“……이걸 폐하께도 말을 해야 할까.”

그렇지만, 정말 율리아에게 내가 아닌 황제의 도움이 필요했더라면 폐하께 따로 편지를 보냈을 터.

아니, 어쩌면 폐하를 믿지 못할 수도 있었다.

폐하는 율리아와 관련된 일이라면 이성과 함께 판단력이 흐려지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으니까.

율리아도 그걸 알고 내게만 이렇게 초대장을 보낸 걸지도 몰랐다.

우리는 친구니까. 이렇게만 써서 보내도 자신의 대략적인 상태나 심정은 알아차릴 거라 믿고.

“나만…… 알고, 나 혼자 가는 게 맞겠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율리아.

지금 내가 당장 해야 할 것은, 율리아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조사였다.

설렁줄을 당기자, 시녀가 들어왔다.

“지크베르트 공작 부인이자, 황녀인 율리아가 현재 어떻게 사는지 사교계에 들리는 소식이 있다면 바로 알아다 주렴.”

“네, 황후 폐하.”

바로 폐하께 손을 빌리면 율리아가 원하지 않는 그림이 나올 수도 있으니, 일단은 나 혼자 은밀히 알아보는 게 맞겠지.

오히려 폐하의 귀에 들어가면 독이 될 수도 있으니까.

* * *

딜런의 생일 파티를 직접 준비하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쉽지도 않았다.

정말 왜 체스터가 내게 이런 일을 맡도록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일을 진행하면서 조금의 잡생각도 할 수 없었으니까.

탈출 계획을 구체적으로 구상하기에는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일단 연회를 제대로 준비해야 했고, 칭얼거리는 딜런을 달래 주기도 해야 했다. 일과 육아를 동시에 병행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체스터의 말처럼 보모에게 맡길 수도 있었지만 딜런을 마음껏 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가능하면 내게서 떼어 놓고 싶지 않았다.

“하아…….”

스트레스가 정말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과연 세실은 내가 보낸 초대장을 보고 눈치를 챘을지부터.

만일 세실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기는 할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일단 힘겹게 도망쳤다고 하더라도, 체스터에게 다시 잡혀 오는 건 아닐지.

다시 잡혀 들어왔을 때는 지금처럼 두 손과 발이 자유롭기는 할지. 미래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 암담했다.

“아니야. 괜찮아. 분명히…… 어떤 상황이 닥쳐도 지금보다는 나을 거야. 그러니 진정해.”

잘하고 있잖아. 최대한 머리를 굴려서, 이곳에서 도망칠 수 있는 계획을 세우고 있잖아.

딜런을 위해서 화려하고 거대한 파티를 열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가 도망칠 수 있는 허술함이 존재해야 했다.

촘촘한 틈 사이로 허술함을 만드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도 연회를 주관하는 일을 제대로 진행하는 것조차 벅차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으니까.

“…….”

품에 안긴 채, 곤히 잠든 딜런의 등을 토닥여 주며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내 심정을 진정시켰다.

정말 딜런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 * *

밤은 늘 찾아왔다. 딜런과 떨어지는 순간부터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체스터와 한 공간에서 지내야만 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도중 유리창에 체스터의 모습이 비쳤다.

한 손에 술잔을 들고 있던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눈을 꾹 감았다.

“율리아.”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체스터가 바로 뒤에 있는 건 아니었지만, 팔랑거리며 서류를 확인하는 소리는 들렸다.

“어려운 건 없었습니까.”

“없었어.”

“다행이네요. 이렇게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하면, 앞으로도 안주인으로 할 일을 줄게요.”

“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내 의지는 어떻든 상관없잖아.”

“그래도 당신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당신이 싫다고 하면 주지 않을 생각입니다.”

“푸흡.”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싫다고 하면 주지 않을 거라는 말.

그래, 체스터는 그랬다. 내가 원치 않는 건 단 하나를 제외하면 하지 않았으니까.

“저는 당신과 함께 행복해지고 싶을 뿐입니다, 율리아.”

“늦었어.”

“……마음을 바꿀 생각은…… 정말 추호도 없는 겁니까?”

“응. 없어.”

어느새 다가온 건지 체스터의 팔이 내 어깨를 감싸며, 목덜미에 그의 숨결이 닿았다.

손에 들고 있었던 술잔을 입술 가까이 가지고 갔다. 매일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만큼, 많은 양의 술을 들이켰다.

그와 처음 잠자리를 가졌을 때처럼. 깨어났을 때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도록.

목구멍 너머로 들어가는 술이 무척이나 따갑고 뜨거우며 썼다.

“율리아.”

“…….”

“맨정신으로 하면 안 됩니까.”

“네가 나라면…… 맨정신으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왜 아직도 체스터는 이상 속에서 사는지.

휘청이는 발걸음으로, 술을 놔둔 곳으로 가 다시 술잔을 가득 채우고, 삼키며 전부 비워 냈다.

식도가 타들어 가는 감각과 동시에, 목덜미에 낯설지 않은 말랑한 감촉이 닿았다.

“흣!”

솜털이 곤두서는 간질거리는 감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요. 술에 취해서 사리 분별조차 못 하는 상태여도 당신은 당신이니까.”

체스터는 한 손으로 내 허리를 감았다. 그리고 이빨을 바짝 세워 내 목덜미를 꽉 깨물었다.

저절로 앓는 소리가 잇새를 비집고 터져 나왔다.

“윽!”

그는 내 허리를 붙잡은 채로, 내 몸을 가볍게 들어 안아서는 침대로 직행했다.

풀썩- 하는 소리와 동시에,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파고들었다. 점막을 훑으며 안쪽으로 침범하는 그의 혀가 어지럽게 얽혀 들었다.

독한 술로 입 안이 얼얼해진 탓일까. 점막을 훑는 그의 혀가 부드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끝내 다가왔다. 딜런의 생일 파티를 여는 날이자, 내가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주어진 날.

긴장된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율리아, 준비는 다 됐습니까.”

문 너머에서 체스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외모 단장은 이미 끝났었다.

그러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끝나지 않았기에, 계속해서 심호흡만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언제까지 심호흡만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문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응. 끝났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문이 열리며 오랜만에 화려한 착장을 한 체스터가 보였다.

그는 내 앞에 손을 내밀며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가요, 율리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