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으…….”
깨어나기가 무섭게 머리가 아팠다.
오히려 몸은 이젠 익숙해졌는지 그렇게 고통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맨정신으로는 그와 몸을 뒤섞는 행위를 할 자신이 없었기에, 관계를 맺기 전에는 사리 분간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셨다.
그 대가로 잠에서 깨어나게 되면 숙취로 인해 두통이 일렁였다. 마치 지금처럼.
옆에 잠들어 있는 체스터를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짐승.”
체스터는 내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인지했기에, 내가 자신을 예전처럼 사랑해 주길 바라는 것은 포기한 듯했다.
그 대신, 짙은 소유욕을 방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체스터는 내 몸에 자신의 흔적들을 빼곡하게 새겨 넣었다. 마치 제 것이라고 낙인을 찍는 것처럼.
정말 몸이 묶여 있지 않을 뿐이었지, 구속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율리아, 더 누워 있어요.”
“됐어.”
그의 말을 무시하고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이내 체스터의 손이 내 허리를 휘감으며 침대에 도로 눕혔다.
목덜미에 뜨거운 숨결이 닿자 살갗이 불에 그을리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딜런은 제가 데려올게요.”
딜런. 곧 딜런의 첫 번째 생일이 다가왔다.
어쩌면 그때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몰랐다.
아무 잘못 없는 아이를 이용하는 거지만, 이제는 내가 살고 싶었다.
이 숨 막히는 곳에서 벗어나, 체스터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복수를 하고 싶었다.
“……곧 딜런의 첫 번째 생일이야.”
“그렇습니까? 무엇을 원합니까.”
그는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무엇을 해 주길 원합니까, 율리아.”
“축하 파티.”
“흐응?”
“딜런의 생일 축하 파티를 크게 열어 줘.”
“그러죠.”
체스터는 내 어깨에 입을 맞추고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바닥에 떨어져 있던 옷을 주워 입었다.
“직접 준비해 볼래요?”
“……뭘?”
“딜런 생일 파티.”
“…….”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봐요. 산책하거나, 딜런이랑 안에서 노는 것만으로는 지루하고 심심할 테니.”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이참에 안주인 역할을 해 봐요. 뭐, 귀찮다거나 하기 싫다면 거절해도 됩니다.”
“……아니, 할래.”
어쩌면 이번 파티를 내가 준비할 수 있다는 건 절대적인 기회일지도 몰랐다.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단 한 번의 기회.
저절로 침이 꼴깍거리는 소리를 내며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내가 직접 할 거야.”
“그래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준비해 봐요, 율리아.”
체스터는 눈웃음을 치며, 내 손에 입을 옷을 쥐여 주었다.
“예산은 신경 쓰지 말고, 원하는 대로 해요.”
“……그럴 거였어.”
“그럼 잘해 봐요. 뭐, 힘들거나 헷갈린다거나 어렵다든가 하는 게 있으면 언제든 저를 부르고요.”
“알았어. 이제 나가.”
“딜런을 데리고 올 테니, 옷 입어요. 내 사랑.”
“…….”
그 말을 끝으로 체스터는 방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 체스터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꺼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내게 주어진 기회를 제대로 잡는 게 중요하다고 봐야 했다.
어쩌면 내 생명을 좀먹는 이곳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비록 딜런을 이곳에 두고 떠나야 할 수도 있겠지만…… 딜런을 이곳에 두는 조건으로 벗어날 수 있다면, 아이를 포기할 수 있었다.
이곳에 두고 간다고 하더라도, 체스터가 잘 챙겨 줄 테니까.
심장이 무진장 쿵쿵거리며 뛰었다.
“내가 나쁘다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어.”
변명이라는 것도,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았다.
딜런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내 안위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결국 이기적인 사람은 체스터가 아닌, 나였다.
나를 위해, 내가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각별한 존재인 딜런을 포기하는 선택을 내리고 있었으니까.
“율리아.”
문이 열리면서, 나를 부르는 체스터와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딜런이 두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보니, 어쩌면 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게 더 잘 어울리는 그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내가 이질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딜런의 머리카락 색이 나와 같지 않았더라면, 정말 체스터와 판박이었을 거란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이리 줘.”
“딜런이랑 잘 놀고 있어요. 곧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줄게요. 일할 땐 보모한테 맡겨 두고요.”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그렇지만 어떻게 신경 쓰지 않습니까. 당신과 관련된 일인 걸요.”
“…….”
“당신이 해야 할 일을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그 전까지 딜런이랑 함께 시간을 보내세요.”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어.”
“그럼 다행이고요.”
체스터는 침대 위에, 안고 왔던 딜런을 내려놓고, 내게서 등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갔다.
문으로 향했던 시선을 침대 위를 기어 다니고 있는 딜런에게로 옮겼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위험한 시기인 만큼, 딜런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우으아!”
“그래, 딜런. 엄마야.”
역시 딜런은 작다 못해,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방긋방긋 웃으며 침대 위를 기어 다니는 딜런을 살짝 들어 안아 품에 꼭 안은 채로 보드라운 뺨에 내 뺨을 비비적거렸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기가 내 배에서 나왔는데, 어떻게 이런 답답한 곳에 두고 떠날 생각을 했던 건지.
갑자기 미안한 감정이 내부에서 휘몰아쳤다.
“미안해, 아가.”
엄마가 잠시 미쳤었나 봐.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너를 이런 위험한 곳에 두고 홀로 떠날 생각을 하다니…….
그래. 다시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는 결정이었다.
내가 껴안고 있는 게 불편한 모양이었는지. 딜런은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그래. 내려 줄게, 딜런. 아무리 여기가 침대 위라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해. 혹시 바닥으로 떨어질 수도 있어.”
멍하니 딜런의 움직임을 찬찬히 감상했다.
어쩌면 딜런이 웃고, 움직이는 모습을 여유롭게 찬찬히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얼마 남지 않을 수도 있을 테니까.
딜런을 봤을 때, 미안한 감정도 느끼긴 했지만 동시에, 딜런으로 인해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발이 묶이게 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지금은 딜런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나는 내가 우선인 사람이었다.
“딜런. 너는 아빠가 좋아? 아니면 엄마가 좋아?”
이왕이면 엄마가 좋다고 해 주면 좋겠는데.
“하아……. 정말 쓸데없는 질문이긴 했네. 어차피 넌…….”
아직은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때이니까.
물론 딜런이 엄마라고 대답했다면 또 마음이 흔들려 남은 삶을 포기하고 이곳에서 지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똑바로 말을 하지는 못하는 시기였기에, 그런 대답은 나오지 않아 딜런을 두고 떠날 수 있겠다는 나쁜 생각이 일렁였다.
딜런의 생일 파티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경비는 느슨해질 게 뻔했다.
병력에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했으니까.
그럼 경비가 해이해진 그 상태에서 유유히 이 성을 빠져나가는 것도, 무척 탁월한 판단이었다.
장담하지 못하는 건 내 달리기 실력과 체력뿐.
“딜런, 네 첫 번째 생일 파티는 엄마가 준비할 거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준비하는 네 생일 파티겠지. 도망에 성공한다면 영영 그에게 붙잡힐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의 눈이 뻗치지 않는 곳을 찾아 몸을 숨기고 숨은 죽이며 얌전하고 고요하게 지낼 생각이었다.
매일 딜런을 그리워하며, 조용히 하늘을 보고 싶었다.
* * *
체스터는 정말 금방 일거리를 가지고 들어왔다.
물론, 내가 해야 할 일이긴 했다. 다만, 지금처럼 제대로 된 일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게 마음에 걸렸을 뿐.
내가 안주인이 맞긴 하지만, 제대로 된 실무를 본 적은 제로였다.
그러니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다운 일을 한다는 것은.
“열심히 준비해 봐요, 율리아. 당신이 그렇게 아끼고 좋아하는 딜런을 위한 생일 파티니까요.”
“그럴 거야.”
“사랑해요.”
“나가.”
체스터는 피식하며 웃음을 터뜨리더니, 순순히 내게서 멀어졌다.
단지 침대에 있던 딜런을 데려가려는 행동을 보일 뿐.
“잠깐만! 왜 딜런을 데려가려는 거야!”
“왜요? 안 됩니까? 딜런이 당신을 방해할까 봐 데려가려는 건데.”
“데려가지 마. 낮에는 딜런과 같이 있을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잖아.”
체스터는 딜런을 다시 침대에 내려놓았다.
“나가, 체스터.”
“…….”
“낮부터 네 얼굴 보는 거 진짜 싫거든? 그러니 좀 나가.”
“그러죠.”
체스터는 방 밖으로 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문에서부터 멀어지며 온전히 들리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역시 그와 한 공간에 있으면 숨이 막혀 왔다.
딜런이 있는 침대로 걸어가 누웠다.
세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랑스러운 내 아기인데,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해 주기로 했는데.
이곳에 갇혀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딜런을 조금씩 원망하는 마음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러면 안 되는데. 딜런만 없었더라면 내가 이곳에 있을 이유도 없었을 텐데. 이런 못된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우으!”
“딜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딜런은 내게 기어 와 환하게 웃으면서 품에 안겼다.
그 순간 또다시 죄책감이 들었다.
아기한테 무슨 생각을 품었던 건지. 죄 없는…… 아니, 오히려 사랑의 산물인 딜런에게 부정적인 마음을 품었다니.
정말 내가 미쳐 가는 게 분명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 아가……. 엄마가…… 못된 생각을 했어, 미안해…….”
“아으?”
“나쁜 건 네 아빠인데.”
원망과 증오의 대상은 체스터인데. 화살이 이상한 쪽으로 향했다.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체스터가 나쁘다는 걸 알고, 딜런에게는 죄가 없고, 아기에게는 내가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
나는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미안해, 딜런.”
이곳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 정말 점점 말라 가다가 미쳐 버릴 게 분명해.
너를 위해서라도 미치면 안 되니까. 미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이곳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사실 딜런을 위함이 아닌, 나를 위한, 내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기적인 변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