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율리아, 궁금하잖아요.”
“…….”
“딜런이 어디에 있는지.”
체스터의 숨결이 목덜미에 가까이 닿았다.
목 부근에 있는 모든 솜털이 쭈뼛 서며, 몸이 위험을 감지하면서 급히 경고했다.
지금 나는 맹수를 바로 뒤에 둔 초식 동물의 입장과 다름없기에, 당장에라도 달아나야만 했다.
“아닙니까?”
“…….”
“율리아, 이제 도망 못 쳐요.”
하지만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그의 몸이 온전히 나를 가두었으니까.
밀어내지 않는 이상 지금 그를 벗어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체스터의 팔이 허리를 휘감았다.
“알잖아요.”
“몰라.”
“돌아다니고 싶다면, 저와 함께 다녀야 한다는 거는 알잖아요.”
문을 열지 못하게 버티던 그의 손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체스터가 직접 문을 열었다.
“가요, 율리아.”
자기 마음대로 내 허리를 붙잡고서는 방 밖으로 나를 데리고 나갔다.
완전 제멋대로.
“이거 놔!”
“싫어요.”
“내 몸에 네가 닿는 게 소름 끼쳐!”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나를 붙잡고 있던 그의 팔이 풀렸다.
시선을 들어,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 꽤 많이 상처를 받은 눈치였다.
“내가 지금 너랑 한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만으로 너는 감사히 여겨야 해, 체스터.”
“……율리아.”
“너만 보면 이젠 구역질이 나.”
상처받으라고 내뱉는 말이었다. 마음이 아프라고 하는 말이었다.
그러니, 지금 내가 토해 내는 말 하나하나에는 조금의 후회도 없어야만 했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툭하면 딜런으로 날 협박하려 들잖아. 너한테 딜런이 소중한 존재가 맞기는 해?”
“……당연히 딜런은 당신의 아이니 제게도 무척 소중합니다.”
“그럼 왜 딜런을 가지고 날 협박해? 몇 번이고 말했지만…… 딜런이 소중하면, 나와 딜런을 위해 깔끔하게 이혼하고 각자 갈 길 가 줘.”
“당신한테 보여 줄 선물이 있다고 했던 거, 기억합니까?”
체스터는 말을 돌렸다. 이런 식으로 회피하는 게 이젠 그의 습관처럼 보였다.
그가 이곳에 선물을 준비해 두었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긴 했다.
“……그건 기억해.”
“가요. 여기에 오고 나서부터 계속 보여 주고 싶었어요.”
“뭔데.”
체스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내 손을 붙잡고 어디론가 데려갔다.
걸어가며 저택의 구조를 눈에 익혔다.
기회가 찾아온다면 바로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최대한 천천히 걸으며 길을 외웠다.
내 직감상, 지금 체스터는 깊숙한 안쪽으로 향하는 게 아닌, 바깥으로 나가는 게 분명했으니까.
오히려 내가 처음에 있었던 그 침실이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바깥으로 나가는 길이 무척 길었다.
나는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할지. 두려웠지만, 내게는 방법이 없었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율리아.”
아직 성 바깥으로 나간 건 아니었다. 그러나 원래 있던 곳과 꽤 멀어졌으니 생각보다 바깥과 가까운 곳일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정원을 가로지르면서부터 멀리서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화려한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만개한 정원 너머로, 유리로 된 규모가 꽤 커 보이는 온실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이 미친놈은 대체 얼마나 쓸데없는 곳에다가 돈을 처바르고 있는 건지.
“내가…… 이런 게 있으면 나가자고 하지 않을 줄 알았어?”
“그러면 좋겠지만, 그러긴 쉽지 않겠죠.”
“그럼 이딴 짓을 한 이유가 뭐야.”
“당신이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
당연하다는 듯 조금의 고민도 없이 나온 대답이었다. 진심이라는 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 이상의 감정이 들지 않았고, 들어서도 안 됐다.
“당신이 예전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지 못한 지 꽤 지나서요.”
“내가 웃으려면 이런 걸 보여 주는 게 아니라, 네가 내 눈앞에서 사라지면 돼.”
“율리아.”
“네게 이유가 있었어도, 그건 너의 사정이지 내가 이해해 줄 필요는 없어.”
나는 너로 인해서 아직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어.
네가 지금 나를 사랑한다는 그 감정이 진심이라 하더라도, 영혼 속에 새겨져 있었다.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트라우마라는 이름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너도 알고 있잖아, 체스터.”
“…….”
“네가 내 마음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거. 그러니 이런 헛짓거리는 하지 마.”
“사랑해요, 율리아.”
쓸데없는 말.
심장이 욱신거렸지만, 애써 그 통증을 무시한 채로, 체스터에게서 등을 돌렸다.
“딜런은 어디에 있어?”
유일하게 이 상황 속 아무런 잘못도, 죄도 없는 존재는 딜런이었다.
체스터와는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지만, 딜런은 예외였다. 딜런이 체스터를 닮았더라도, 딜런은 딜런이지, 체스터가 아니니까.
무엇보다 지금처럼 최악의 상황 속에서 체스터의 옆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의 옆에 있어서, 마음이 흔들리는 게 아니었다. 그가 옆에 있기에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 불쾌했다.
차라리 딜런이 있다면 이 울렁이는 감각을 조금은 잠재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체스터.”
“……따라오세요.”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앞지르며 다시 성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걸으면 걸을수록 확신했다.
내가 잠을 자고 지내는 곳과 딜런을 둔 곳의 거리가 무척 멀고, 그 침실은 이곳에서 나가기 힘든 위치에 있다는 것을.
따지고 싶은 게 많았지만, 입을 다물고 그저 그의 뒤를 쫓아갔다.
잘못하다가는 딜런도 보지 못할 수 있었으니까.
완전 악질이었다. 내 약점이 무엇인지 훤히 꿰뚫고 그걸 이용하다니.
“여깁니다.”
그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부터 딜런의 방으로 마련된 곳인지.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 내부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체스터도 딜런을 나만큼 사랑하고 있다는 게 진짜인지. 그의 세심한 결정의 흔적들이 묻어났다.
딜런을 가지고 나를 협박해도, 적어도 아이에게 위해를 가할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이 마음 한구석에 서렸다.
“딜런도…… 나처럼 방에 가둬 두고 키울…… 생각이야?”
“글쎄요……?”
“딜런은…… 나와는 다르게 너한테 악감정은 없잖아.”
“당신이 딜런을 자유롭게 나돌아 다니게 키우길 원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손을 뻗어, 요람에 누워 있는 딜런을 품에 안았다.
전보다 확실히 자란 게 맞는지. 몸에 쏙 들어오긴 하지만 전보다는 좀 더 무거워져 안는 게 약간 버거웠다.
그럼에도 좋았다.
이 작은 생명이 나를 향해 웃어 주는 모습에 마음속에 가득한 응어리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 충만했다.
딜런은 아무런 죄도 없으니까.
단지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모든 걸 알고 침묵하던 그를 사랑했기에 태어났을 뿐이었다.
“……체스터.”
혹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아니, 어쩌면 최악은 아니더라도 내가 부재할 경우를 대비해서 약속을 꼭 받아 내야만 했다.
“네, 율리아.”
“내가 없어도, 딜런은 잘 키워야 해.”
“…….”
“날 사랑하는 게 맞다면, 내가 어떻게 되든 딜런은 무사히 잘 키워 내야 해.”
“율리아, 왜 그런 말을 합니까?”
내 발언을 조금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체스터의 눈빛이 별로였다.
그렇지만, 그래도 꼭 약속을 받아 내야만 했다.
내가 이곳에서 벗어나려면 선택해야만 했으니까. 딜런과 함께 도망칠지. 아니면 딜런을 두고 나 혼자 도망칠지.
언젠가 선택의 순간이 올 터.
만약 딜런과 함께한다는 선택을 하게 된다면, 이곳에서 벗어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리라.
“약속해 줘, 체스터.”
“싫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만큼, 딜런을 사랑하기로. 딜런에게 주는 애정이 내게 향하는 애정이라고 생각할게.”
“…….”
“나를 향한 너의 사랑을, 딜런으로 증명해.”
자그맣고 둥근 딜런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따뜻하고 말랑거리고 보드라운 피부의 촉감이 입술에 닿았다. 정말 살아 있는 내 아이라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딜런은 내 아이이기 이전에, 네 아이기도 하잖아, 체스터.”
체스터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길 당신이 바란다면 그리해야겠죠.”
기다리다 보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올 테니까.
그 전까지는…… 그 기회가 찾아오기 전에는 움직임의 자유를 얻긴 해야 했다.
“난 매일 딜런을 보고 싶어.”
“…….”
“매일 구역질 나게 하는 네 얼굴만 볼 수는 없잖아.”
“…….”
“네가 없을 때는 딜런과 함께 있게 해 줘.”
그냥 이렇게 요구해서는 체스터는 절대로 들어주지 않을 테니까. 부가적인 요소를 붙여야 했다.
“그럼 네가 없어도 도망치지 않을게. 딜런이 있는 한, 이곳에서 지낼게. 네 옆에 있어 줄게, 체스터.”
“알겠습니다. 침실에 따로 요람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 * *
영지로 온 이후부터,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체스터는 밤마다 나를 찾아왔다.
낮에는 내가 그의 얼굴을 보는 걸 무척 싫어하기에 딜런과 함께 생활하게 두고, 하늘이 어두워지고 태양이 다시 뜨기 전까지 딜런은 원래 지내던 곳에서 재웠다.
그리고 침실에 단둘만이 남았을 때, 그는 매번 잠자리를 요구했다.
“하아…….”
입술 안쪽으로 가득해지는 뜨거운 숨결.
지독하게 달콤하면서 불쾌했다. 나를 원하는 짙은 욕망이 가득하게 넘실거리며, 음험한 손길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체스터는 내가 이곳에서 원하는 것들은 전부 들어줬다.
바깥으로 나가는 게 아닌 이상, 딜런과 함께 도서관으로 가고 싶다고 하면 허락해 줬고. 딜런과 정원을 거닐고 싶다고 하면 그러라 했다.
다만 그 대가는 밤에 치러졌다.
“흣!”
이전에는 뜨거움과 사랑으로 몽실몽실하고 간지러운 설렘으로 가득했다면.
지금은 짐승처럼 추잡한 본능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깨끗한 피부는 피어나는 꽃처럼 매번 새로운 붉은 얼룩으로 물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