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생각보다 깊게 잠들었던 건지. 눈을 뜨니, 옆에 체스터가 없었다.
한시라도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남자가 옆에 없으니 무언가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몽사몽한 정신머리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지개를 켜며 방 밖으로 나가려 문고리를 잡는 순간, 문이 저절로 열렸다.
“어……?”
“깼습니까?”
체스터였다.
“잘 잤어요, 율리아?”
“…….”
“식사는 내려가서 할래요? 아니면 여기로 가져올까요?”
다정했다. 정말 아주 많이 상냥하고 친절했다.
바보 같은 심장이 미친 것처럼 요동치는 걸 보면 이런 따뜻하고 말랑한 행동에 나는 녹아내리는 모양이었다.
이런 사실을 결코 그에게 들켜서는 안 되겠지.
체스터가 없으면 그 빈자리를 그리워하면서, 막상 그가 있으면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속을 갉아먹었다.
물론 지금은 더욱 복잡미묘한 감정들의 소용돌이가 형성되었지만.
“내려가서 할게.”
“네. 밥 먹고, 딜런이 있는 곳으로 가죠.”
“…….”
“날이 쌀쌀합니다. 옷 갈아입고 가죠. 갈아입혀 줄게요, 율리아.”
“됐어. 혼자 입을 수 있어.”
“그럼 밖에서 기다릴 테니,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세요.”
체스터는 들고 있던 드레스를 내게 넘겨주고, 방문을 닫았다.
앞으로 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이런 생활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불편했다.
그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심란해졌다. 내 감정을 잠잠히 가라앉히려면 어서 빨리 영지에 도착해야 했다.
정말 양날의 검이었다.
영지에 도착하면 당연하게 갇힐 걸 뻔히 알면서도, 그의 얼굴을 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일말의 희망에 그러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으니까.
“하아…….”
나직한 한숨이 나왔다. 쉽게 마음을 깨끗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우스울 뿐이었다.
* * *
“율리아, 이곳에 유명한 디저트 가게가 있다는데 가겠습니까?”
“……생각 좀 해볼게.”
영지로 내려가는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는 않았다.
체스터는 영지에 도착하기 전에 돌아선 내 마음을 다시 되돌리기 위해 애를 쓰는 건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전부 꿰고 있는 만큼, 그것들로 나를 회유하기 위해 안달이었다. 그리고 효과는 무척 탁월했다.
유명한 디저트 가게라면 쉽게 넘길 수 없는 부분이었으니까.
단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바로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않고, 말하는 데 뜸을 들였다.
“좋아, 이번만 허락하는 거야.”
이러면 정말 체스터와 다시 시작한다는 착각이 들었다.
남들 눈에 남녀가 함께 다니면 연인처럼 보일 테니까. 그것도 무척 다정한 데이트를 하는 것처럼.
“대신 딜런도 함께 가.”
기분 탓인지 체스터는 딜런을 두고, 나와 둘이서만 다니고 싶어 하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러니 딜런도 무조건 함께 가야만 했다.
혼자 다닐 수 없다면, 한 명을 더 추가해서 다니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듯하니까.
“네. 그리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내 마음과 대비되게도 무척 밝았다.
“딜런은 내가 안을게.”
“지금 그런 손을 하고서, 그렇게 말을 하면 제가 그걸 허락해 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깜빡했다. 지금 내 왼쪽 손목은 뼈가 으스러져서 아직 낫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을.
체스터는 한 손으로 딜런을 안고, 다른 손으로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도망 안 갈 테니, 손잡을 필요 없어.”
“당신이 도망칠까 봐 잡는 게 아니라, 그냥 당신의 손을 잡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럼 더 잡으면 안 되잖아.”
힘을 풀며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는 내가 손을 빼낼 수 없게 힘을 주었다.
“뭐 하는 짓이야.”
“손 정도는 잡아 줄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뭐라 말을 한다 해도, 그는 뜻을 굽힐 의지가 없는 것 같으니 체념해야겠지.
체스터의 손을 잡은 채로, 그가 알아봐 두었다는 디저트 가게로 들어갔다.
체스터는 가게에 있는 케이크를 전부 주문하고, 나를 전망이 좋은 위층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내게 앉으라는 듯 의자를 빼 주었다.
이어서 체스터는 딜런을 품에 안은 채로, 자연스럽게 내 맞은편에 앉았다.
“영지에서 당신이 잘 지낼 수 있도록 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별로 안 궁금한데.”
“제 영지에는 아직 가 본 적 없잖아요. 기대해도 좋아요. 절대 당신이 실망하지 않게 해 놓았으니까.”
체스터는 꽤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얼마나 내가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핑계를 댈 수 없게끔 해 놓았을지 참 두려웠다.
애초에 그곳은 내가 나갈 수 없도록 해 놓은 공간인데.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까. 헛웃음만이 나올 뿐이었다.
“당연히 그렇게 했겠지, 체스터. 그래야 내가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못할 테니까.”
“……황성만큼은 아니지만, 영주 성 안에서도 충분히 이전과 마찬가지로 누릴 수 있을 겁니다.”
“…….”
“부족하진 않을 겁니다. 만약 부족하거나, 필요한 게 있다면 제게 말해 주면 됩니다. 새로 채워 넣으면 그만이니까요.”
비꼬는 말이었는데. 그는 무척이나 진지했다.
정말 진지하게 나를 완벽하게 가둘 계획을 끝낸 상태였다. 벗어날 구멍은 없다는 듯.
정신을 차리고 나니, 보이지 않았던 거미줄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거미줄에 내가 걸려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상황.
“체스터.”
“네.”
“너 정말 미쳤구나.”
아주 제대로 미쳤어.
심란하고 복잡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테이블에 놓인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그러자 크림이 입 안에서 사르르 녹음과 동시에 가득 퍼지는 달콤한 맛에 기분이 좀 풀렸다. 이걸 예상하고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걸까.
무서운 녀석.
“율리아, 저는 늘 미쳐 있다는 거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당신한테 미쳐 있다는 거.”
“……그럼 제정신을 찾아 주길 바랄게.”
“그만큼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아…….”
지긋지긋했다. 진절머리가 나는 말에, 좋아하는 케이크를 앞에 두고도 귀찮음과 짜증이 뒤섞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내가 입 아프게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던 것 같은데.
“지긋지긋해, 체스터.”
“…….”
“내가 널 받아 줄 이유는 없다는 거 알면서, 왜 짜증 나게 계속 그렇게 말해?”
“율리아.”
마지막 남은 케이크 하나를 우아하게 먹자마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들어가자.”
“…….”
“입맛이 뚝 떨어졌어.”
“……율리아, 상식적으로 지금 당신의 입맛이 떨어진 이유는 제게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
“누구라도 이 정도 양의 케이크를 혼자 다 먹으면 배부릅니다. 아니, 애초에 이 많은 양의 케이크를 혼자 다 먹은 것 자체가…….”
내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빤히 노려보자 체스터는 이어 나가던 말을 멈췄다.
살짝은 내 눈치가 보였던 걸까. 아니면 그답지 않게 말을 하면서 뒤늦게 아차 싶었던 걸까.
“많이 먹어도 돼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
“늦었어.”
그를 노려보다가 몸을 휙 돌려서 계단이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결국에는 영지에 도착했다. 조금 천천히 움직여서 그런 건지, 예상보다 며칠은 더 늦게 도착한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했다.
익숙하게 체스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율리아, 도착했으니 바로 씻어요. 목욕물 준비는 다 끝나 있을 거예요.”
“응.”
“씻고 나오면 제가 내부를 소개해 줄게요.”
“……알겠어.”
“네. 분명 마음에 들 겁니다.”
마음에 들기는 개뿔. 하나도 마음에 안 들었다.
물론, 영주 성이 바깥에서 보기에는 나쁘지는 않았다. 황성과 비교하면 안 되지만, 살기에 부족함도 불편함도 없을 게 뻔히 보이는 규모.
어디에 내놔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는 되었으니까.
그러나 어차피 내가 갇힐 곳이라고 생각하니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도착은 했으니, 착잡해지는 마음은 뒤로하고 일단 발걸음을 안으로 옮겼다.
“마님, 목욕물 준비 다 끝났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응.”
하녀들이 이끄는 곳으로 따라 움직였다.
“목욕 시중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알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하녀들은 능숙하게 내가 입고 있던 옷을 벗기며 목욕을 도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서 그런가. 아니면 피곤함이 한 번에 폭발해서 그런가. 몸이 노곤노곤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잠이 쏟아졌다.
* * *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침이었다.
부드럽고 푹신한 침대에서 푹 잠든 듯, 몸에서 뻐근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단지 몸이 무언가에 눌린 듯, 무거울 뿐이었다.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려고 하자, 단단한 무언가가 허리를 더욱 꽉 옭아맸다.
“하아…….”
저절로 짙은 한숨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허리를 덮은 그의 팔을 신경질적으로 있는 힘껏 밀어내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율리아.”
나른하게 잠긴 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아마도 내가 움직인 탓일 확률보다, 원래 깊이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기에 깼을 확률이 더 높았다.
“어디 갑니까?”
“밖에.”
“함께 가요, 율리아. 어제 당신이 너무 일찍 잠들어서 아쉽게도 내부를 소개해 주지 못했잖습니까.”
조금도 아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불편했다.
“체스터.”
“네.”
“충분히 혼자 볼 수 있어.”
이대로 체스터를 무시하고, 방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커다란 손이 열리고 있던 문을 그대로 밀어 닫았다. 무언가 데자뷔가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뒤이어 바로 머리 위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안 됩니다.”
“…….”
“혼자는……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잖아요, 율리아.”
알 수 없는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제가 소개해 줄게요. 딜런도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잖아요?”
“너…….”
생각보다 체스터가 나를 협박하는 수준이 꽤나 높아졌다.
마치 어떻게 해야 내가 곱게 말을 잘 들을지에 대해서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