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쉬라는 말을 끝으로 체스터는 방 밖으로 나갔다.
다시 커다란 방에 혼자 남겨졌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곳에, 아무것도 할 것 없이, 홀로 있자니 정신병에 걸릴 것 같았다.
그 상태에서 체스터의 얼굴을 보면 볼수록 과거의 일들이 어제 벌어졌던 것처럼 더욱 선명해졌다.
눈앞에 새빨간 피가 튀고, 딱딱하게 말라붙은 피에 뒤덮인 아빠와 오빠의 시신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우웨에엑!”
한참이나 헛구역질을 한 후에야 조금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방 안에서 무척이나 안락하게 지내지만, 충족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마음이 텅 비어 갈 뿐이었다. 무엇을 해도, 전부 공허했다.
“……어떻게 해야 해?”
* * *
꼴도 보기 싫다고 오지 말라고 한 건 나지만, 체스터는 정말로 오지 않았다.
사람이 미쳐 간다는 게 무엇인지 정말 제대로 깨닫고 있었다.
더는 으스러진 팔목에서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데, 왜 다른 곳이 아픈 기분이 드는 걸까.
피부에 들었던 멍도 거의 사라져 가고 있는데, 왜 심장에는 멍이 생겨 가는 착각이 드는지.
“……오늘인가.”
늘상 하는 일은 창문을 열고 창밖을 내려다보는 거였다.
영지로 내려가기로 한 날이 오늘이었던 건지, 평소와 다르게 바깥이 무척이나 분주했다.
영지로 내려가게 된다면 내가 돌아갈 수 있는 황성에서 정말 멀어진다. 아니, 수도에 오는 것조차 버거웠다.
체스터는 나를 감금할 게 뻔하니까.
전전생에서는 내 모든 것들을 짓밟아 없애 버렸다면, 지금은 나를 모든 것들에서 고립시킬 생각을 가진 것처럼 비쳤다.
말로는 영지로 내려가면 돌아다닐 수 있게 해 주겠다는데.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지금 여기에서도 이 방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도록, 방문을 잠가 뒀는데.
빠져나갈 틈 따위는 조금도 허락하지 않았다. 약간의 허술함도 존재하지 않는데.
내가 보기엔 영지에 있는 성으로 나를 데려가는 게 마지막 목표일 것이다. 지금도 그곳에 나를 가둘 생각으로 가득할 테고.
그건 지난번의 태도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를 영원히 자신의 옆에 붙여 둘 생각이었다.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보기엔 변질된 미련과 후회로 인한 집착과 소유욕이었다.
“우리는…… 행복할 수 없는데.”
무지했을 때는 행복했었다. 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는 건 무척이나 달콤했으니까.
그러나, 그마저도 기만이었다.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나를 보던 남자인데.
“푸흡.”
지금 내 꼴이 우스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가 돌이킬 수 없는 관계라는 건 나보다도 체스터가 더 잘 알고 있겠지.
그러니 그는 내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닌, 언제 도망갈지 모르는 나를 가두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걸 테니까.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체스터겠지.
“율리아, 이제…….”
창문을 열어 놓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의 표정은 미묘했다.
“후……. 제가 오지 않은 날 동안 창문을 열었습니까.”
“어차피 쇠창살로 다 막아 놨잖아.”
체스터는 내게 다가오더니, 활짝 열어 둔 창문을 닫았다.
“뛰어내리고 싶어도 못 뛰어내리게 해 놨는데, 무슨 상관이야?”
“그런 뜻이 아니라, 찬바람을 직접적으로 쐬면 감기에 걸리기 쉬운 몸이니 걱정한 겁니다.”
“…….”
“감기가 약하게 오는 것도 아니고, 심하게 오잖아요.”
어깨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쌀쌀하니까 걸쳐요.”
담요였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그래도 느껴지는 따스함이 싫지는 않아서, 거절하지는 않았다. 손으로 어깨를 덮는 담요를 꾹 붙잡았다.
체스터의 손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영지로 내려갈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가죠.”
그의 손에 이끌려 거의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방 밖으로 나왔다.
“몸은 괜찮습니까?”
“……괜찮아.”
“다행이네요. 밥은 제대로 먹은 게 맞습니까?”
“……제대로 먹었어. 주는 대로 다 먹었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말랐습니까.”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제가 당신한테 신경을 안 씁니까.”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조용히 그를 따라 저택 밖으로 나갔다.
바깥으로 나오자, 기사 한 명이 딜런을 안고 있었다. 체스터는 자연스럽게 딜런을 넘겨받고, 나를 마차에 태웠다.
그는 내게 딜런을 넘겨주지 않고, 본인이 꼭 안은 채로, 내 앞에 앉았다.
딜런에게 시선을 고정하다가, 이내 눈을 떼어 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딜런인데, 막상 두 눈에 담으니 알 수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내가 참 좋지 못한 엄마라는 걸 깨닫게 될 뿐이었다.
마차 안에서는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오로지 침묵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 * *
날이 저물기 전에, 가까운 도시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아마 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이렇게 온종일 체스터와 함께 있어야겠지. 내가 몰래 도망칠 우려가 있으니, 그에게서 벗어날 수도 없을 테고.
한숨이 나오려고 했지만, 애써 참았다.
“율리아, 씻고 와요.”
“……응.”
내가 체스터에게 꼴도 보기 싫다는 말을 해서일까. 그는 내게 거리를 두는 행동을 보였다.
나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자유를 누리라는 의미인지.
일단 알겠다고 말한 뒤, 욕실로 향해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씻은 후 방 안으로 들어갔다.
“……체스터.”
방 안에는 당연하게도 체스터가 있었다.
그는 가벼운 튜닉 차림이었다. 살짝 젖은 새까만 머리카락과 은은하게 퍼지는 비누 향이 방금 씻고 나왔다는 것을 알렸다.
그런데 마차에서는 함께 있었던 딜런이 방 안에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딜런은 어쩌고 혼자야?”
“딜런은 보모가 잘 봐줄 겁니다.”
뭐?
“걱정 마세요. 당신이 없는 동안 딜런을 전담해서 케어한 보모니, 그런 눈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너는 왜 이 방에 있는 거야.”
내가 혹시라도 자신이 없는 틈을 타 도망갈까 봐 방을 같이 쓰려는 거겠지.
괜한 질문이었다. 새어 나오는 웃음에서 쓴맛이 났다.
“도망 안 갈 거니까…… 굳이 이러지 않아도 돼.”
“한 침대를 쓰지 않은 지 오래된 것 같아서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우린 부부잖아요, 율리아.”
“부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저 단어가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그래, 부부. 아직은 부부지. 근데 괜찮겠어? 내가 몰래 널 죽일 수도 있잖아, 체스터.”
“당신이 절 죽이려고 한다면 기꺼이 죽어 줄 테니, 어서 옆으로 와요.”
정말 그도 모든 것을 기억한 채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더라면, 이렇게 다정한 모습에 홀라당 넘어갔겠지.
지금 비치는 이 상냥함이 나와 진심으로 사랑에 빠져서 나오는 행동이라고 굳게 믿었을 게 뻔했다.
못 이기는 척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체념한 걸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바로 그의 옆에 앉기는 자존심이 상해, 그를 지나쳐서 침대 안쪽으로 들어가 누웠다.
물론 몸은 그가 앉아 있는 곳의 반대편으로 돌린 채.
“이제는 안전하잖아. 내 목숨을 노리던 이드리안과 그 가문도 모든 힘을 잃었잖아.”
“흐응……. 그 사실은 제가 알려 준 적 없을 텐데.”
“……비밀로 할 거였으면 단속을 잘해.”
“잘해야겠네요.”
사실 알고 있었다. 체스터가 일부러 내게 바깥 상황이 대충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 주기 위해 흘린 정보라는 것을.
이건 내가 말했던 철저한 응징이 가해진 복수니까.
몸을 이불로 둘둘 감쌌다. 체스터가 잘생긴 건 맞지만, 그의 얼굴을 볼 기분은 아니었다.
“율리아.”
다정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속삭이는 그가 싫었다.
“율리아는 제 얼굴 안 봅니까.”
“…….”
“저는 율리아 얼굴 가까이서 보고 싶었는데.”
“마차에서 계속 봤잖아.”
어디서 되지도 않는 수작질인지.
마차 안에서 얼마나 불편했는데. 떨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내 얼굴에 따라붙던 시선이 아직까지 선명했다.
“봐도, 계속 보고 싶습니다. 일주일 동안 율리아의 얼굴을 못 봤더니, 계속 보고 싶은 게 당연한 이치 아닙니까?”
“……아닌 거 알잖아.”
정말 못 하는 말이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자연스럽게 내뱉는 건지. 착각이 아니라면 그의 목소리는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듯했다.
그가 있는 방향의 반대쪽으로 돌아누웠기에 사실 확인을 하려면 몸을 돌려야만 했다.
몸을 돌릴지 말지 고민하는 사이, 무거운 팔이 허리를 감쌌다.
“우리 이럴 사이 아니잖아.”
최대한 차갑게 말을 하며, 허리를 휘감은 그의 팔을 밀어내려고 움직이던 순간이었다.
“저를 안 사랑해요, 율리아?”
“…….”
“율리아, 대답해 줘요.”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와야 하는데, 사실 그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어 쉽게 거짓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쪽을 선택했다.
“우리 다시 시작하면 안 됩니까.”
“다시 시작?”
“제가 전부 잘못했습니다. 처음부터 제대로 당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부터…… 제 죄가 맞습니다.”
“알면 이러지 마.”
계속 이러면 흔들린단 말이야.
우리 두 사람 모두가 그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한, 평범한 사람의 사랑을 할 수는 없단 걸 머리로는 잘 알고 있잖아.
“다시 시작할 수 없다 해도…… 적어도 자발적으로 옆에는 있어 줘요, 율리아.”
“그 말은 내가 자발적으로 옆에 있어 주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나를 네 옆에 두겠다는 뜻이야?”
체스터의 얼굴이 보이는 곳으로 몸을 틀었다.
바로 두 눈에 들어오는 새빨간 눈동자를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그의 생각을, 진심을, 감정을 읽어 내고 싶어서.
“글쎄요. 그건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습니다.”
“난 사람이야. 새가 아니라.”
가끔 체스터가 나를 사람이 아니라 새로 보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새장 속에 가두어서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분 탓이길 바랐지만, 나를 고립시키는 행동을 보면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이렇게 한 침대에 있으니까 좋네요, 율리아.”
“……난 별로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체스터는 그저 웃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데, 무척이나 능숙했다.
나와는 다르게.
눈을 감고, 몸을 반대쪽으로 다시 돌려 누우며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