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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122화 (122/141)

#122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어떠한 소리도 내뱉을 수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해졌으니까.

“율리아, 이 정도면 충분한 대답이었다고 보는데……. 아닙니까?”

머리 위에서 들리는 그의 나직한 음성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가 직접 말했잖아, 체스터.”

“무엇을요?”

“내게 네가 한 잘못들을. 말하면서 못 느꼈어? 내가…… 널 또다시 사랑할 수 없다는 거.”

과연 자신이 잘못한 행동들을 스스로 돌이켜 보며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 아무것도 느낀 게 없을까?

“이번에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없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율리아.”

“……이 상황에서 할 말이 고작…… 그거야?”

“그럼 제가 어떤 말을 하길 원합니까?”

이어진 그의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신이 원하는 말이 있다면 그리 말하겠습니다.”

“됐어…….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하니까…… 예전 생각이 나네요.”

“…….”

“귀여워요, 율리아.”

뜬금없는 소리.

쓸데없는 말을 더는 듣고 있을 생각이 없었기에,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아프잖아요. 움직이지 마세요.”

“…….”

“그 상태로는 혼자서 이 저택에서 나갈 수 없다는 거 알잖아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일단 누워요.”

체스터는 언제 일어난 건지.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면서 몸을 돌리면 그의 가슴팍이 보일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몸도,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체스터의 말이 들리긴 하지만, 들리지 않는 척 무시하며 문고리로 팔을 뻗었다.

“……뭐 하자는 거야?”

그러나 문고리를 잡고 내리며 문을 여는 순간, 그의 손이 열리던 문을 닫았다.

“애초에 당신이 그런 꼴로 눈앞에 보인 그 순간부터 이곳에서 내보낼 생각은 없었습니다.”

“……뭐?”

“그럼 나갈 수 있을 줄 알았습니까? 위험하게 어떻게 이곳에서 내보내겠습니까.”

“그게 무슨 억지……!”

“뭐, 일단 몸이 회복되면 행동반경을 이 방에서 저택으로 늘려 주겠습니다.”

“……날 가두겠다는 말이야?”

“네. 잘 알아들었네요, 똑똑하게.”

문고리를 움직이며 잡아당겨 봤지만, 문을 덮고 있는 체스터의 손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무의미한 움직임이었다.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으니까.

정말 체스터는 나를 이 방 안에 가둘 생각이었다.

그가 안에 있으면 이런 식으로 내가 나가지 못하게 막을 것이고, 나를 방 안에 혼자 둔다는 것은 문을 밖에서 잠그겠다는 의미.

지금 이렇게 나온다는 건, 바깥에도 이미 손을 써 두었다는 것.

위험했다. 외부의 위험이 사라지니 내부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지금 나는 독 안에 든 쥐였다.

“걱정 마세요. 방 안에는 욕조가 딸린 화장실도 있으니까요.”

“……언제부터 계획했던 일이야.”

“당신이 그 작은 머리를 굴리며 귀엽게 굴 때부터?”

처음부터 일을 꾸몄다는 소리였다. 이렇게 될 줄 알고!

“마음 같아서는 오늘도 제가 율리아를 씻겨 주고 싶지만, 직접 씻는 게 좋겠죠?”

“…….”

잠깐만? 오늘도? 아니, 이건 아니잖아!

다급하게 머리카락과 피부의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았다.

어쩐지 약간 뽀송한 느낌도 나고, 머리카락이 푸석하지도 않았다. 찝찝함은 조금도 없고 심지어 좋은 냄새가 나는 이유가 이거였구나.

별로 반갑지 않은 사실이었다.

“뭐, 안 씻고 잠든다면 그때 제가 씻겨 줄게요.”

“그럴 일은 없…… 꺅!”

분명 바닥에 잘 붙어 있던 발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랬기에 자연스러운 비명이었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휘감더니 그대로 내 몸을 짐짝처럼 들고 성큼성큼 침대로 향했다.

발버둥을 치기는 했지만, 체스터에게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했다.

“이거 놔!”

“어차피 놓아줘도 못 나갑니다.”

“너 싫어!”

“네네. 어떻게 당신이 저를 좋아하겠습니까.”

결국 체스터는 나를 도로 침대에 눕혀 주고 이불까지 친히 덮어 주었다.

“도망가지 마요. 지금은 몸을 회복하는 것에만 집중하세요.”

“…….”

“알겠죠, 율리아?”

약간의 반항심으로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고수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딜런도 데려올게요.”

“……정말?”

“네. 정말요.”

체스터는 내가 대답을 하자, 피식하고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딜런이 나와야 입을 열어 주네요.”

“…….”

“쉬어요, 율리아. 적어도 당신을 걱정한 건 사실이니까요.”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방 밖으로 나갔다. 이어서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서 방문을 잠그는 소리겠지.

이제는 이 방 안에 나 혼자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조심스럽게 다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 방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싶어, 빨빨거리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조금의 빈틈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척 치밀하게 설계해 두었던 건지. 창문이란 창문은 죄다 쇠창살로 막혀 있었고, 딱히 비밀 공간도 없었다.

“……처음부터 가둘 생각이었던 거야.”

내가 모든 걸 알아 버렸단 것을 눈치챘을 때부터, 내 눈을 피해 차근차근 준비해 왔던 거였다.

이 방이 처음부터 이런 구조였던 것도 아닌 게 쇠창살들 중 하나도 녹이 슨 게 없었고, 전부 새것으로 보였다.

무서운 인간.

나를 죽일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이지만, 이곳에 가둘 생각은 아주 많아 보였다.

가질 수 없다면 죽이겠다는 마인드는 아니라 그나마 다행일까.

“하아……. 내 무덤을 내가 스스로 팠구나.”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방에 좌절했다.

* * *

율리아가 깨어났다. 빨리 깨어나는 것은 원했지만, 일어나자마자 그렇게 행동할 줄은 몰랐다.

사실 먼저 진실을 밝힌 건 꽤나 이성적이지 못한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정말 율리아와 관련되면 감정을 쉽게 통제하기가 힘들었다. 지금도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보니, 여운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후우…….”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단 방문은 잠갔으니, 율리아가 스스로 그곳에서 탈출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안심해도 되었다.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옮겨 집무실로 향했다.

일단 수도의 생활을 전부 정리할 필요성은 있었다. 다시는 수도로 돌아올 수 없도록 철저하게.

율리아가 수도로 돌아오고 싶어 해도, 더는 돌아갈 수 없는 이유를 들어야 했으니까.

그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각하.”

“그래. 이드리안은 제대로 처리했나?”

“네. 지하 감옥 역시, 깨끗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럼 됐다. 바로 영지로 떠나면 좋겠지만…… 당장은 힘들겠지.”

겨울이 오기 전에 돌아가면 좋겠는데. 겨울이 오면 이동할 때, 몸이 약한 율리아는 분명 추위에 덜덜 떨 테니까.

그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추위를 잘 타는 율리아의 체질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었다. 나로 인해 생긴 체질이었다.

“영지로 떠난다고 결정이 나면 바로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하라 명령해 두고…… 저택의 경비를 이전보다 더 강화해.”

아……. 하나 깜빡할 뻔했네.

가장 중요한 걸 빼먹을 뻔하다니, 나답지 않았다. 율리아와 관련된 게 가장 중요한 사항인데.

“그리고 율리아가 혹시라도 위험한 행동을 보이거나, 저택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면 막고.”

“네.”

“영지 저택도 청소해 두라고 전달해.”

“그리하겠습니다.”

“그래. 가 봐.”

수도를 떠날 준비는 천천히 진행하는 중인데, 과연 율리아의 몸이 빨리 회복될지.

그게 문제였다.

시계를 보니, 율리아가 약 먹을 시간이었다.

주치의가 직접 가도 되는 거지만, 조금이라도 율리아의 얼굴을 두 눈에 담는 시간을 늘리고 싶었다.

율리아는 내 얼굴을 보기도 싫어할 수 있겠지만, 이런 핑계도 없다면 정말 그녀를 보기가 힘들었다.

“…….”

집무실에서 나와 준비된 약과 물을 가지고 율리아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열쇠로 잠갔던 방문을 열어, 들어가기가 무섭게 새하얀 무언가와 부딪혔다.

“율리아, 뭐 합니까?”

“아…….”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상태로 눈동자만 데구루루 굴리는 율리아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역시 너무 귀여웠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작고 연약할 수가 있는지.

이렇게나 예쁘고 사랑스러운 사람인데, 어째서 전에는 그토록 밀어내고 내치지 못해서 안달이었을까.

정말이지 당장에라도 잡아먹고 싶다는 음험한 욕망이 꿈틀거렸다.

“분명 제가 쉬고 있으라고 했는데.”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거든?”

이전의 율리아도 사랑스러웠지만 역시 지금이 더 좋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참지 않고, 아무런 눈치도 보지 않으며 말하는 게 제법 귀여웠으니까.

그녀의 이런 모습은 회귀하기 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나를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율리아의 모습이 훨씬 더 보기 좋았다.

“약 가지고 왔으니, 먹어요.”

“……주치의를 놔두고 왜 직접 가져와?”

“약을 몰래 먹지 않을 수 있으니, 직접 살필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전부 핑계였다. 사실은 그냥 율리아가 보고 싶어서 온 거였다.

정말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아픈 상태인지. 아니면 외부적으로만 많이 다쳤을 뿐, 내상은 크지 않은지.

모든 게 걱정되어 나아져 가는 그녀의 얼굴을 실시간으로 보고 싶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율리아를 품에 안고 사랑해 주고 싶었다.

“그렇게 감시하지 않아도 약 정도는 잘 챙겨 먹어. 오히려 주치의가 주는 게 더 안심되는 거 몰라?”

“…….”

“네가 주는 걸 어떻게 믿어? 그게 내게 도움이 되는 약인지, 아니면 독약일지.”

“적어도 저는 당신한테 해가 될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믿어도 됩니다.”

율리아는 조금도 내 말을 신뢰하지 않는 듯, 어이가 없다는 조소를 지었다.

그마저도 사랑스러워 보인다면 내가 미친 거겠지.

지금 율리아의 모든 반응은 내가 자처한 것이니, 받아들여야 했다. 그녀가 나를 미워해도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입장이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아니, 내가 어떻게 널 믿어?”

“……약만 다 먹으면 나갈게요.”

입 안이 썼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무엇인지 정말 뼈저리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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