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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121화 (121/141)

#121화

나를 지켜 주겠다는 단순한 말을 저렇게 하는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체스터는 만만하기는커녕, 단순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으니까.

저 말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아주 많은 뜻이 담겨져 있을 텐데, 쉽게 짐작이 가질 않았다.

아니, 약간은 짐작이 갔다.

앞으로 그럴 일이 없을 거라는 말은, 이드리안을 잡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촉촉하게 적시던 물기가 한순간에 바짝 메말랐다.

“이드리안을 잡았나요?”

“네.”

“어떻게…… 됐나요?”

“당연히 죽었죠, 율리아.”

그,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만, 왠지 무언가 꺼림칙했다.

“당신의 몸이 회복되는 대로, 영지로 내려가죠.”

“……네?”

“당신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살고 싶다고.”

그랬었다. 진실을 몰랐을 때는 모든 일이 끝나면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삶이 무의미했다. 이번에는 이드리안으로 인해 아빠를 잃었지만, 지난번에는 체스터로 인해 아빠와 오빠, 유모를 잃었다.

그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괴로웠다.

“아니요. 이젠 그러고 싶지 않아졌어요.”

“…….”

“황성으로 돌아갈래요.”

체스터의 눈빛이 알 수 없게 변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해도, 그가 어떤 말을 내뱉더라도 지금의 선택을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몸이 회복되는 대로, 황성으로 보내…….”

“안 됩니다.”

“이제 절 위험하게 할 요소는 없잖아요.”

너를 제외하고는 없으니까. 이제 더는 비극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도, 증오도, 원망도, 후회도.

전부 내려놓고 이번 생은 물이 흐르는 곳을 따라가듯 살고 싶었다. 애증으로 태어난 딜런과 함께.

딜런은 처음이었으니까.

단 한 번도 딜런이 있었던 삶은 없었으니, 이번만큼은 딜런과 함께 살다 죽는 것도 괜찮겠지.

“몸이 회복되는 대로, 딜런과 함께 황성으로 돌아가서 살 거예요. 그 전까지 딜런과 잘 지내요.”

“…….”

“황성으로 돌아가면 당신한테 딜런을 보여 줄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흐응……. 딜런을 아빠 없는 아이로 자라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잖습니까, 율리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위협이었다.

“아니면 제가 모든 걸 기억하고 있어서 그러는 겁니까.”

“…….”

심장이 철렁하고 움직였다가 한순간 멈췄다.

체스터가 말하는 ‘모든’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이 되기 때문일까.

내가 체스터의 비밀을 전부 알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기분 탓이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조금의 웃음기도 없는 얼굴. 저절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죠?”

결국 내가 선택한 건 모르는 척, 회피하는 거였다.

“전부 알고 있는 거 압니다.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

“제가 당신의 가족들과 유모를 죽인 것도, 당신에게 죽으라고 했던 것도 전부 기억하고 있잖아요, 율리아.”

손이 덜덜 떨렸지만, 체스터의 목소리만큼은 소름 끼치게도 무척 다정했다.

그러나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조금도 예상할 수가 없어서,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은 없었다.

“왜 모르는 척합니까. 당신이 저를 미워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지 않는 게 더 부자연스럽죠.”

“그때 그랬던 거…… 후회됐어?”

“네. 후회했죠.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

“당신한테는 미안합니다. 제가 얼마나 잘못한 건지…… 알고 있어요, 율리아.”

이런 상황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체스터가 나와 같이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사실도, 그때의 일을 언급할 거라는 것도 생각한 적 없었는데.

그래서 대처가 쉽지 않았다.

“잘못했어요, 율리아.”

“내가 용서하길 바라는 거야?”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단지, 당신한테 미안한 감정도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합니다.”

“거짓말.”

“진심입니다. 저를 평생 미워해도 괜찮아요.”

저 말을 믿으라고 하는 걸까.

목소리는 정말 미안해하는 느낌이 강렬한데, 왜 직감은 저 말들을 부정하라고 아우성인 건지.

“미워해도 된다고?”

“네. 당신한테 미움받아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잘못한 게 많은 건 저니까요.”

“거짓말. 내가 평생 얼굴도 보기 싫다고 하면 그 말은 안 들어줄 거면서.”

“…….”

“거봐. 부정 못 하잖아.”

무의식이 말하던 게 이거였을까. 입 안이 썼다.

조소가 입가에 번졌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하면서 마지막에는 자기가 우선인 사람.

“저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증오해도 좋습니다. 단지, 그럴 거면 제 옆에서…… 제 눈에 띄는 곳에서 그렇게 해요, 율리아.”

“푸흡!”

나도 모르게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깁스가 되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숨죽여 웃었다. 물론, 이렇게 해도 내가 웃고 있는 건 뻔히 보이겠지만.

정말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체스터의 발언에 체통을 잃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하하하하!”

“율리아…….”

“미워해도 되는데, 그렇게 할 거면 옆에서 하라고? 무슨 낯짝으로?”

“…….”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미안하면서, 잘못했다면서!”

가끔. 그의 얼굴을 볼 때면 그때의 기억으로 인해 힘들었었다.

하지만 애써 외면했다. 그 사람이랑 지금의 체스터는 다른 사람이라고 분리하며 힘겹게 부정해 왔는데.

부정하고 또 부정했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체스터, 네가 뭔데……?”

침대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침대에서 벗어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체스터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네가…… 뭔데, 네 마음대로 하려고 그래?”

“율리아.”

“전에도, 지금도…… 변함없이 똑같이 이기적인 거 알아?”

“……당신한테 상처를 준 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쿵-.

앉아 있던 체스터를 있는 힘껏 밀자, 그는 순순히 밀려나며 의자와 함께 바닥으로 넘어졌다.

충분히 버틸 수 있었는데. 아니, 사실 조금의 타격도 없을 텐데.

아마 내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 주기 위함이겠지. 이렇게라도 해야 내가 그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을 테니까.

“네가…… 네가 미워.”

“저를 미워하세요, 율리아.”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촛대를 붙잡았다.

약간 무겁긴 했지만, 그걸 붙잡은 채로 체스터에게로 다가갔다.

“……네가 죽어 버리면 좋겠어.”

그의 머리 가까이에 휘두른 촛대가 다다르기 직전에 저절로 손이 멈칫했다.

체스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전부 받아들이겠다는 눈빛으로, 아무렇지 않게 나를 빤히 응시할 뿐이었다.

차라리 내가 모든 감정들을 제게 쏟아 버리길 바라는 사람처럼 가만히 있었다.

“율리아, 저를 죽여 버리고 싶다면서요.”

“…….”

“뭐, 당신이 무엇으로 내리치든 쉽게 죽지는 않을 테지만. 그런 걸로 당신의 화가 조금이라도 덜어진다면 좋겠습니다.”

결국 촛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나는 체스터에게 화가 나도, 나는…… 사람을 무언가로 때릴 수 없었다. 기껏해야…… 손으로 뺨을 내리치는 정도.

미워 죽겠는데. 정말 미운데.

“율리아, 울지 마세요.”

“…….”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눈물은 분노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다른 감정일까?

“왜 웁니까. 당신이 원하는 만큼 때려도 됩니다. 당신의 분이 풀릴 때까지 전부 맞아 줄 테니까 울지 마세요.”

“……네가 나한테 한 잘못들. 하나하나 말해 봐.”

“당신을 처음부터 알아보지 못했던 것. 먼저 다가왔었는데 몰라서 차갑게 내쳤던 것. 당신의 가족들을 비롯해, 당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전부 죽인 것.”

“…….”

“당신한테 스스로 죽으라 했던 말. 마지막으로 당신한테 모질게 굴었던 것들.”

지금 내뱉은 모든 말들이 체스터가 후회하는 것들일까.

그는 묵묵히 자신의 잘못들을 나열했다. 후회도 미련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눈동자로.

이걸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전부 잘못했습니다.”

결국 불편한 몸을 제대로 일으켰다.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숨이 막히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집에 갈래.”

혼잣말하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그의 손이 내 손목을 붙잡으며 자신 쪽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나를 빤히 응시하는 새빨간 눈동자에서는 무엇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율리아, 제가 당신의 옆에서 사죄하는 건 안 됩니까?”

“…….”

“다 받아 줄게요. 당신이 무얼 하든 상관없이 전부 받아 줄 테니까 제 옆에 있어요.”

“왜?”

“다른 그 무엇보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왜…… 날 사랑해?”

지독하게 궁금했다. 체스터가 날 사랑할 이유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었으니까.

늘 그의 사랑이 불안하게 느껴졌던 건, 나를 사랑할 만한 이유가 보이질 않았기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의구심이었다.

그리고 나와 사랑에 빠질 만한 커다란 계기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전전생에서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거짓말이잖아, 나 사랑한다는 거.”

“진심입니다, 율리아.”

“그럼 이유가 뭔데? 뭐가 계기가 됐는데?”

“…….”

“거봐. 말 못 하잖아.”

난 말할 수 있는데. 왜 내가 널 사랑하게 되었는지 물어보면 바로 대답할 수 있는데.

“사랑에 이유가 필요합니까.”

“……적어도 계기는 있을 거야. 나는 있었으니까.”

“혼자 남겨진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따뜻했던 사람이 당신이었습니다, 율리아.”

체스터는 나를 온전히 끌어당겨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랐다. 뺨이 바로 그의 심장 부근에 닿은 자세가 되었다.

귓가에 커다랗게 맴도는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나의 것인지, 체스터의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들립니까? 제 심장은 당신한테만 뜁니다.”

“…….”

“이 정도면 납득이 되겠습니까? 제가 당신을 사랑하게 된 계기와 당신을 지금도 무척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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