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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120화 (120/141)

#120화

피가 묻은 몸을 깨끗이 씻은 후에, 옷을 갖춰 입고 율리아가 있는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율리아, 어서 눈 떠요.”

그래도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한 수준은 아니었다.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그때처럼 정말 절망적인 상황까지는 아니니, 버틸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녀의 얼굴을 두 눈에 담고 싶었다.

잠든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 방 밖으로 나갔다.

“잘 지키고 있도록.”

“네. 각하.”

저택의 경비를 더욱 강화한 후에, 떨어지지 않던 발을 움직일 수 있었다. 또다시 그녀를 잃을 수는 없었으니까.

이드리안은 이쪽에서 처리하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황성으로 향했다.

* * *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율리아는 어쩌고 혼자 왔지?”

이 정도 물음은 예상했었다. 율리아가 다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이 바깥으로 새 나가지 않도록 잘 숨겼으니까.

“율리아는 몸이 안 좋아져서, 자택에서 쉬고 있습니다.”

“그래? 많이 안 좋은 건가?”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잠시 몸이 쇠약해진 것뿐이니까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흠,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래서 이드리안 블레어는 찾았나?”

“네. 현재 가문의 지하 감옥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황제는 말을 해 보라는 듯,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드리안의 처분은 제게 맡겨 주셨으면 합니다.”

“……황족 시해 죄를 가지고 있는 중죄인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을 테고,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될 거다.”

“중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공식적인 처벌로는 약하다고 봅니다. 결코 살려 둘 생각은 없으니, 믿고 맡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흐음…….”

뭐, 이 정도로는 바로 허락이 떨어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가는 게 있다면 오는 게 있어야 하는 법.

“현재 블레어 공작저에 반역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증좌가 있을 겁니다.”

“…….”

“반역죄를 씌워, 깔끔하게 멸문시키면 후환이 될 것도 없을 겁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긴 하군.”

“블레어 공작가를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어야, 율리아가 위험에 노출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율리아와 관련된 일이니, 그녀를 무척이나 아끼는 오빠이기도 한 황제는 이 일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동참해 줄 것이라 확신했다.

단지 마음에 걸리는 건, 이드리안에 대한 처분권이었다.

“이드리안은 제 손으로 직접 처분하고 싶습니다, 폐하.”

“……그러도록 해. 뭐, 공작이면 믿고 맡겨도 되겠지.”

“그리고 영지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영지로?”

“네. 수도 생활은 정리할 생각입니다.”

더는 수도에 머무를 이유가 사라졌으니까. 율리아와 한 약속도 있었고.

복합적인 이유로, 딜런을 호적에 올린 후에 수도를 떠나 영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미 영지에 있는 성에도 혹여 율리아가 도망치게 되는 상황이 닥칠 때를 대비해 가두어 둘 곳을 마련해 두었다.

“딜런부터 호적에 올리고, 수도 생활을 온전히 정리하고 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율리아는 동의한 부분인가?”

“율리아가 먼저 원했던 일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현재 율리아의 생각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지만, 수도로 올라오기 전에는 모든 일이 끝나면 조용한 곳에서 살아가길 원했다.

그러니 이게 맞는 거였다. 내가 먼저 원한 게 아니라, 율리아가 먼저 요구한 사항이었으니까.

“……그래. 율리아가 그러길 원한다면 그게 맞지.”

“이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수도를 떠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게.”

“네.”

“떠나기 전에 율리아와 함께 방문했으면 하는데.”

율리아는 꼭꼭 숨겨 두고 싶은데, 황명이라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겠지.

그녀를 흔드는 건 혈육과 관련된 일이었으니까.

“율리아도 괜찮다면 그리하겠습니다.”

“그래……. 율리아가 우선이니까. 율리아가 힘들 것 같다 한다면 안 와도 괜찮으니, 이만 가 보게.”

“네.”

귀가해도 좋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몸을 돌려서 나갔다.

이미 율리아를 지킬 보이지 않는 울타리는 세워졌다.

그녀를 위협할 수 있는 외부 요소들을 제거했으니, 타인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감은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는데. 너무 돌고 돌았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도 많았지만, 결론적으로만 보자면 나쁘지는 않았다.

이제 율리아는 내게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하아…….”

저택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볍고,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건 하나였다. 율리아가 깨어나기 전까지 이드리안을 숨만 붙은 수준으로 두고, 그녀가 눈을 뜨는 순간 죽이는 것.

* * *

아파.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팔목이 끊어질 것처럼 아프고, 온몸이 얻어맞은 듯 고통스러웠다.

눈을 떠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강하게 지배했지만, 일어나고 싶다는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대로 영영 눈을 뜨지 못한 채, 고통이 멎기를 원하는 마음이 점점 더 부풀어 갔다.

“율리아.”

나직하게 들리는 익숙한 저음의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불편했다. 무언가 거북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낯선 감각에 좀 더 숨고 싶었다.

“어서 눈 좀 떠 주세요.”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고통이 덜한 쪽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과 이어지는 말캉함에 몸이 흠칫 떨렸다.

피부 위로 닿는 뜨거운 숨결.

지독하게 익숙하면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올가미처럼 온몸을 옥죄는 불편함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나를 구속하던 얇은 올가미는 사슬로 변해 온몸을 더욱 꽉 붙잡았다.

“으으…….”

“율리아?”

“딜……런.”

괴로운 와중에도 무의식 속에 남은 선명한 이름과 얼굴에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을 강제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속눈썹 사이로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빛에 저절로 인상을 구겼다.

“율리아……. 정신이, 정신이 듭니까?”

바로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사람은 체스터였다.

“……체스터.”

그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었지만, 목이 바싹 메마른 건지 소리가 갈라지며 나왔다.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눈빛.

체스터는 아무 말 없이, 메말라 버석해진 내 입에 물을 흘려 넣어 주었다.

“딜런은요?”

“지금…… 이 상황에서 딜런이 먼저입니까?”

“딜런이 먼저면 안 돼요?”

“……지금은 당신이 가장 우선입니다. 그딴 몸을 하고서 돌아왔는데, 퍽이나 딜런을 안을 수 있겠습니다.”

비꼬는 말.

걱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심장이 이해하지를 못했다.

말을 조금은 더 예쁘게 해 줄 수 있지 않은가.

“율리아,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고나 있습니까?”

“…….”

“제가 어디까지 당신을 눈감아 줘야 합니까?”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제가 당신의 위험을 감당하면서, 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금처럼 다쳐 오기라도 하는 걸…… 다시는 보지 못하겠다는 의미입니다.”

“…….”

“당신이 제게 불만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이드리안과 작당하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 체스터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 주었다는 뜻일까.

“그런데 작당할 거면 좀 제대로 할 것이지, 이렇게 엉망이 된 걸로 모자라 쓰러져서 생사조차도 알 수 없는 상태의 당신을 본 제 마음이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미안해요.”

“미안합니까?”

“……잘못도 했어요.”

“잘못만 했습니까?”

전혀 웃지 않는 체스터의 얼굴에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무서웠다. 그나마 웃을 때는 그래도 마음이 조금은 놓였는데, 지금은 살벌했다.

무표정으로 화내는 모습이 이렇게 무섭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심지어 윽박지르는 것도 아닌데, 두려움에 질린 심장이 쿵쿵거리며 오작동을 했다.

“화……내지 마요.”

“……제가 왜 화를 내는지 가장 잘 알고 있을 사람이 그렇게 말합니까.”

“제, 제가 잘못한 건 맞으니까…… 사과할게요.”

“후우…….”

체스터는 낮은 한숨을 토해 내며 눈을 꾹 감았다.

내가 한 말이 그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는지. 눈을 감은 채 좁아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지압했다.

본능적으로 그를 관찰하던 시선을 옮겼다. 체스터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고개까지 확 돌렸다.

“율리아, 고개 돌리지 마세요.”

“네에…….”

낮게 깔린 목소리에 냉큼 반대쪽으로 돌렸던 머리를 원위치 시켰다. 정말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말을 잘 들었다.

“왜 온몸에 멍이 든 겁니까. 제대로 설명하세요, 율리아.”

“그, 그게…….”

우물쭈물하며 그때의 진실을 말하는 것을 망설였다.

고개는 돌리지 않았지만, 눈동자는 그의 얼굴을 피해 데구루루 굴렸다.

낮게 깔린 한숨이 옅게 들려오며 약간은 체념한 듯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나마 얼굴은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입니다.”

“…….”

“당신을 책망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왜 당신의 몸 상태가 그러한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체스터는 결국 어르고 달래는 방법을 선택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도 억지로 꾸역꾸역 억누르며, 내가 겁먹거나 무서워서 입을 다무는 방향을 선택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굴었다.

“독을…….”

전부 나를 구슬리기 위한 작전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당했다.

얼마나 아팠었는데. 정말 그때 무서워서 심장 마비로 죽을 뻔했는데.

그때의 감정이 북받치면서 마음속에서 폭풍이 되어 휘몰아쳤다. 굵직한 눈물이 뺨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끅, 마비 독을…… 끄윽, 끅 먹었어요. 흡, 진짜…… 움직이지 못했, 끄윽…… 어요.”

“그렇습니까. 많이 무서웠겠네요.”

“그래서…… 혼자 있는 동안 열심히 몸부림쳐서 왼팔을 움직일 수 있었어요.”

“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숨겨 간 단검으로 이드리안을 찔렀는데…… 그대로 왼손이 부러졌어요…….”

체스터는 하염없이 뺨을 타고 흐르는 내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 주었다.

“그리고 팔목을 짓밟혔어요. 그래서 알았어요……. 충격을 크게 받으면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거.”

“그래서 몸이 그렇게 되었단 건가요.”

“네에…….”

체스터는 내게 안심하라는 듯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율리아.”

분명 다정하고 달콤한 말인데, 어디서 느껴지는지 알 수 없는 살벌함이 본능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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