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사실 율리아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건 대충 눈치를 챘었다.
단지, 이드리안 그 자식이 율리아를 납치할 거라는 가정은 거의 제쳐 두고 있었을 뿐.
율리아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자마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바로, 기사들을 풀어 수색했다.
적어도 수도 안에 있다고 확신했기에, 최대한 구석구석을 뒤졌다.
다행히 머지않아 찾아냈다는 소식을 듣고 율리아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
멀리서부터 새까만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눈에 보였다.
그 연기가 목적지로 향하면 향할수록 점점 선명해지는 모습에 불안감 역시도 그 크기를 부풀렸다.
움직일수록 저곳이 율리아가 있는 곳이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점점 더 부정할 수 없게끔 만드는 사실이 가까워졌다.
“율리아가…… 저 안에 있는 게 확실한가?”
화재가 일어난 곳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에게 물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율리아를 또다시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함이 이성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사그라들 줄 모르고 치솟는 불길이 가라앉아 있던, 회귀 전의 기억과 감정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갑자기 더 크게 들리는 착각이 일렁였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저 안에 율리아가 있는 게 확실하냐고 물었다.”
제발 아니라는 말이 나오길 바랐다.
그러나 바람과는 달리, 결코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이어졌다.
“있었습니다. 블레어 소공작과 함께…… 들어가는 것까지는 확인했습니다.”
“……어디에 있었지?”
“죄송합니다, 그것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이해는 됐다. 발견하자마자, 급박하게 바로 보고를 하러 왔어야 할 테니까.
무엇보다 불이 이렇게나 났는데 밖에서 율리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면 안에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 절반은 불을 끄고,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나지는 않았으니 나머지 절반은 이드리안 블레어 소공작을 찾을 수 있도록 수색에 나서도록.”
불이 난 것을 보니, 이드리안은 저 안에 없을 터.
이곳은 외진 곳이니 도망갔다 하더라도,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됐다.
일단 그렇게 명령을 내려 두고, 검 한 자루를 쥐었다.
“주군!”
근처에 호숫가가 있어 그곳에서 물을 온몸에 적신 후에, 불에 타고 있는 저택 안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검을 휘둘러 현관문을 부수고, 아직 불길이 번지지 않은 계단 위로 올라갔다.
불길이 극심한 곳은 맨 끝방이었다. 그렇다는 건 그곳에 율리아가 있을 확률이 높았기에, 발걸음이 다급해졌다.
쿵-.
무언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소리에, 그쪽으로 더 빠르게 달렸다.
맨 끝 방으로 향하자, 방문이 불길에 잡아먹혀 있는 상태였다.
여기에 율리아가 있으리란 직감이 들었다.
검으로 문을 손쉽게 박살을 내고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앞에 율리아가 쓰러져 있었다.
“딜……런.”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아직 살아 있었다.
율리아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치솟는 불길. 방 안을 채우는 건 붉은색과 타면서 물들어 가는 검은색뿐.
회귀 전, 율리아의 시신을 품에 끌어안고, 모든 것들을 태워 버렸을 때의 기억이 머릿속을 괴롭혔다.
애써 정신을 차린 뒤 일단 쓰러져 있는 그녀를 품에 안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물론, 나오는 도중 중간중간마다 불타는 잔해가 떨어지며 위험한 순간이 있었지만 재빨리 피해 안전한 밖으로 나왔다.
“담요를 가져와.”
밖에 있던 기사를 향해 명했다. 율리아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여기 있습니다.”
기사가 가지고 온 담요를 율리아의 몸에 둘렀다.
일단 율리아를 데리고 무사히 돌아가는 게 우선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를 품에 안은 채로, 말 위에 올라탔다.
힘없이 품에 늘어지는 그녀의 몸에 이가 갈렸다.
“율리아.”
더욱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요소는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시선이 닿는 율리아의 몸 하나하나에서 이드리안 그 개새끼를 갈기갈기 고통스럽게 찢어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선명해졌다.
그녀의 목에는 선명한 손바닥 자국 모양으로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심장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돌아가면 무조건 주치의부터 찾아서, 율리아의 몸 상태부터 살피는 게 좋겠지.
“역시…… 당신한테 바깥세상은 너무 위험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가둬야지.
이미 율리아가 저택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준비는 다 마친 상태였다.
그러니 그녀가 눈을 다시 뜨게 된다면 더는 바깥으로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율리아를 바깥에 내보낼 수 없다는 타당한 이유도 생겼고.
“가만히 있으면…… 제가 당신을 대신해서 그 자식을 고통스럽게 죽일게요, 율리아.”
그러니 당신은 안전하게 있어요.
괜히 바깥으로 나가서 지금처럼 다치거나, 위험에 노출되지 말고.
* * *
한눈에 보기에도 온몸은 시퍼런 멍투성이었다. 아니면 쓸리거나, 화상을 입었을 정도로 몸이 만신창이였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생각보다 율리아의 몸 상태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주치의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현재 무슨 독에 중독된 상태라고 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왼쪽 팔목은 으스러져서 잘못 움직이면 영영 왼손은 쓸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내렸다.
“후우…….”
눈을 꾹 감고 깊이 잠들어 있는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파하는 목소리에 저절로 주먹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으니까.
전에도 독을 마시는 바람에 사경을 헤맸을 때, 너무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기가 버거웠다.
그래서 원치는 않았지만…….
“차라리 그렇게 아파할 바에는 제 손으로 끊어 주고 싶었었는데.”
다행히 제가 또다시 당신을 죽이려고 했던, 그 순간에 기적적으로 정신을 차려 준 바람에 후회할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도 무사히 당신이 눈을 떠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제발 살아 주세요, 율리아.”
파리하게 질린 율리아의 손을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붙잡았다.
정말 다시 깨어나면 당신한테 이런 일이 반복되지 못하도록 할 테니까.
아직 이드리안은 추적 중에 있었다. 생각보다 미리 도망갈 준비를 견고하게 해 두었던 건지 미꾸라지처럼 잘도 수색망에서 빠져나갔다.
그래도 이번에는 공식적으로 이드리안의 추적을 할 수 있었다.
율리아는 말 그대로, 공작 부인이기 이전에 고귀한 황녀였다. 황족을 납치한 사건이니, 이번에는 황실에서도 개입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먼저 발견한다면 절대로 곱게 죽일 생각이 없었다. 죽여 달라고 빌 정도로 아주 고통스럽게…… 고통 속에서 죽어 가게 만들 생각이니까.
내 것을 건드린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할 테니.
그렇게 속으로 칼을 갈고 있을 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기사 한 명이 들어왔다.
“각하!”
“무슨 일이지.”
“후……. 저희 측에서 먼저 잡았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의자에서 일어났다.
곤히 잠들어 있는 율리아의 모습을 다시 한번 두 눈에 담고서야, 방에서 발걸음을 떨어뜨릴 수 있었다.
“내 검은 어디에 있지?”
“밑에 있습니다.”
“그럼 그 자식은 어디에 있지?”
“일단 급한 대로, 그…… 지하 감옥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래.”
예전부터 거슬렸었다.
율리아를 마음에 두었을 때부터, 그녀의 곁을 내가 맴돌며 열심히 유혹할 때부터, 눈에 거슬리게 행동했다.
그때 알아차렸더라면, 율리아가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을까.
겉으로는 친구였지만, 무의식에 내제되어 있던, 불안감이 있었기에 결국 회피하고 굳게 믿었던 신뢰가 온전히 박살이 났다.
검을 챙겨 지하 감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굴 보기가 참 힘든데, 이렇게 얼굴을 보네.”
“……체스터.”
결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이드리안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비웃음조차도 나오지 않는 건, 율리아에 대한 마음 때문이겠지.
“내 것을 건드렸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지.”
“후…….”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맞지. 그때, 황녀의 찻잔에 독을 탄 이유가 궁금하겠지?”
“어차피 너는 죽을 테니, 마지막 유언이라고 생각하고 들어 주지.”
이드리안은 무엇이 재미있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저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의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그건 실패했긴 했지만, 이번 일을 꾸미게 된 계기가 되어 줬거든.”
“…….”
“그 여자가 너한테 특별해 보여서, 네 눈앞에서 죽는다면 네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고, 재미있을 것 같았어.”
“그래서 재밌었나?”
“재밌었지. 물론 황녀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고작 그런 걸로 흔들릴 네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알거든.”
“무슨 의도로 율리아를 죽이려 든 거지?”
“뭐겠어. 나보다 불행해야 하는 네가 너무 잘 사는 것 같아서, 원래대로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놓으려 그런 거지.”
“그럼 차라리 날 노리면 됐잖아!”
왜. 왜 율리아를 노리는 건지.
“너는 죽이고 싶어도, 죽어 주지를 않잖아. 그러니 상대적으로 약하고 네가 쩔쩔매는 황녀를 노린 거지.”
“…….”
“그리고 너는 고작 네가 죽는 걸로는 그렇게 절망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네가 가장 버티기 힘든 건, 그 여자의 죽음일 것 같아서 말이야.”
악질이었다.
사실 율리아에게 이전에 했던 행동들이, 내 약점이 그녀라는 것을 모두에게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런데 내 과거의 그 행동들이 덫이 되어 발목을 잡았다.
“틀리지는 않았잖아? 지금 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어. 날 찢어 죽이고 싶은 그 눈……. 황녀의 목숨이 위태로운가 보지?”
“닥쳐!”
칼날이 아닌 칼등으로 이드리안의 얼굴을 내리쳤다.
유독 율리아와 관련되면 이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큭, 체스터. 네가 이러는 건 스스로 네 약점이 뭔지 알려 주는 꼴이란 거 몰라?”
“그걸 내가 모를 리가 있겠어.”
“나만 너의 불행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아주 잘 알 텐데.”
“잘 알고 있어. 그치만 넌 너무 시끄러워.”
그러니 그 살아 있는 입을 닥치게 하면 되는 거겠지.
분이 풀릴 때까지. 율리아의 몸을 떠올리면 정말 온몸을 다져 버려도 속이 시원하지 않지만, 분노를 억누른 채 칼등으로 때렸다.
아직은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바로 죽지는 않을 정도로 힘 조절을 하며, 때렸다. 율리아가 깨어나기 전까지 죽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 만큼 끔찍한 고통을 알려 줄 생각이었으니까.
“큭, 커헉!”
맞는 소리와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허덕이는 앓는 소리만이 지하 감옥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