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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118화 (118/141)

#118화

반은 자발적으로 끌려온 이곳은 블레어 공작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별장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 편지를 받았을 때부터 따로 마련해 둔 곳일까.

장소가 크게 중요한 건 아니니, 넘어가기로 했다.

“체스터가 눈치채지 못하게 다 한 거죠?”

“네. 당연히 그리했죠. 서류상 지크베르트 공작 부인인 황녀 전하를 납치하는 건 중죄니까요.”

이드리안은 부드럽게 웃으며, 차를 내 앞에 내왔다.

“그래서 황녀 전하께서 누구의 방해도 없이, 제게 은밀하게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가요?”

말 하나 내뱉는 것부터가 긴장감이 들었던 걸까.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았기에,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삼킨 후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당신이 필요해요.”

“제가…… 왜 필요하시죠?”

이드리안에게 이런 요청을 은밀하게 표현한 거니, 자연스럽게 납득할 수 있는 거짓된 핑계를 대야 했다.

“체스터가 제 아버지를 죽였으니까요.”

내가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다고, 이드리안이 오해하게끔 만들어야 했다.

아마 이드리안은 내가 진실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을 터였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 조금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을 테니까.

“황녀 전하는 체스터가…… 선황제 폐하를 죽였다고 생각하나요?”

“……아닌가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오히려 내가 지금 하는 말이 진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단 것을 표현했다.

그러자 이드리안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마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는 것보다는 가리는 게 더 효과적일 테니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체스터가 아빠를 죽인 건 사실이긴 했으니까. 단지, 이번 생이 아니라 전전생이라 그렇지.

“아아……. 황녀 전하께서는 체스터가 선황제 폐하를 죽였다고 확신하시는군요.”

“제가 잘못된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흐음……. 체스터가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은 모양이네요.”

“……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게 느껴졌다.

“그러니 잘못된 사실을 알고 있는 거겠죠.”

쿵-.

심장이 철렁였다.

왜? 침묵하지 않고, 내게 진실을 알려 주려는 저의가 무엇인지 조금도 예상되지 않았다.

이드리안은 앉아 있던 곳에서 느긋하게 일어났다.

“아니면 황녀 전하는 전부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하는 건가요?”

보이지 않는 위협에 움직이려고 했는데, 거짓말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몸만 움직여지지 않는 게 아니었다.

말을 하려고 입술을 움직여 봤지만, 달싹이기만 할 뿐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움직여지지도 않고, 목소리도 안 나오죠?”

“…….”

“이제 독이 다 퍼졌나 보네요.”

이드리안의 발소리가 뒤에서 났다. 나직한 웃음소리가 미약하게 귓가로 파고들었다.

“무슨 독인지 궁금하겠죠?”

어깨에 낯선 손바닥이 닿는 감각이 느껴지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몸에 마비가 오는 독이에요. 생명에 지장은 없는. 조금도 치명적이지 않으니, 안심해도 돼요.”

무슨 안심을 하라는 거야!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보려고 아등바등 댔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팔이라도 움직여 보기 위해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아무리 마비 독이라 하더라도,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하니 내가 노력한다면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여전히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무척이나 위험하다는 것을.

지금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협상? 아니, 그조차도 지금 입이 꾹 막혀 있었기에 회유도 불가능했다.

지금 상황의 주도권은 이드리안에게 있었다. 그도 내 속내를 궁금해하는 만큼, 지금 나 역시도 그의 꿍꿍이가 궁금했다.

“아아, 겁먹지 마세요.”

체스터가 미친놈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드리안도 상당히 미친놈이었다.

이런 점이 상당히 비슷하기 때문에 둘은 친구가 된 게 아니었을까.

“당장은 안 죽일 거니까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혼자만의 시간을 드릴 테니, 그 시간을 즐겨 보세요.”

그 말을 끝으로 이드리안은 이곳에서 나갔다.

아무리 움직이려 노력해 봐도, 정말 몸은 돌처럼 무거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게 쉽지 않았다.

제발 이드리안이 돌아오기 전까지 팔은 움직일 수 있는 게 좋을 텐데.

아니, 움직일 수 있어야만 했다. 그래야 나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시간 감각이 무뎌졌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지금은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벅찼다.

아직 이드리안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이러는 건지 조금도 모르겠다.

“…….”

입술은 움직여지지만, 아직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그래도 왼팔은 이제 어느 정도는 의지대로 움직였다.

고작 한쪽뿐이었지만, 둘 다 못 움직이는 것보단 이게 더 낫겠지. 어쩌면 조금씩 약효가 떨어지고 있을 수도 있었다.

움직일 수 있는 팔로 혹시 몰라 숨겨 두었던 암기를 잡아 드레스 소매에 감추었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시야에 이드리안이 들어왔다.

“황녀 전하, 혼자만의 시간은 어떠했나요?”

나긋나긋하고 기분이 좋아 보이는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귀를 강타했다.

아직 내가 팔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서는 안 됐다. 이건 내가 가진 유일한 패였으니까.

“황녀 전하는…… 체스터에게 굉장히 특별한 존재라는 거 아시나요?”

“…….”

“원래 그런 녀석이 아닌데……. 유독, 황녀 전하 앞에서만 제가 알고 있던 녀석의 모습과는 다르게 행동하더라고요.”

이드리안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의 손이 우악스럽게 내 머리채를 붙잡았다.

아팠지만,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마주친 그의 눈빛에는 선명한 질투와 증오가 뒤섞여 있었다. 그 감정이 누구를 향하는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부모도 죽고, 사방이 적이고, 모든 걸 잃었다면 두려움에 떨거나, 체념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당연한데.”

“…….”

“그 자식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고, 황녀 전하의 옆에 있을 때는 무척 즐겁고 행복해 보이더군요.”

그는 붙잡고 있던 내 머리를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애초부터 마비된 몸이었기 때문에 의자에 앉아 버틸 힘이 없어 바닥으로 큰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몸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왜 가진 게 없는 그 자식이 더 행복해 보이는 거지? 당신의 존재가 뭐길래?”

“…….”

“당신을 없앤다면 그 자식도 분명히 무너지겠지?”

잠깐만……. 죽이지 않겠다며!

이드리안은 내 두려운 눈빛을 읽은 건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까 당장은 죽이지 않겠다고 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어서. 그래도 황녀 전하께는 유감이 없으니, 고통 없이 한 번에 끝내 줄게요.”

그게 무슨 배려야!

이드리안은 두 손으로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아마도 질식사를 시킬 생각인 듯 보였다.

이게 무슨 한 번에 고통 없이 보내 주는 방법인지.

“으윽!”

일단 살고 봐야 했다. 지금 이드리안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

그런 생각으로 암기를 꽉 쥐고 있는 왼손을 움직여 온 힘을 다해 그의 어깨를 푹 찔렀다. 최대한 깊게 박아 넣었다.

다시 빼내서 그의 목에 제대로 박아 넣으려고 한 순간이었다. 이드리안은 얼굴을 찡그리며 내 목을 조르던 손을 풀고, 제 목으로 향하는 칼날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왼손이어서 그런 걸까. 깊이 꽂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드리안에게 그렇게 큰 타격을 주지 못한 듯 보였다.

오히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내가 더 위험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큭……!”

이드리안은 칼날을 바닥에 내던지고, 피가 쏟아지는 어깨를 급히 지혈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는 죽음을 더 재촉한 걸지도 몰랐다.

제대로 죽였어야 했는데. 목을 똑바로 관통시켜야 했는데.

아니, 처음부터 목을 가격했어야만 했는데.

그는 지혈을 멈추고 몸을 돌려 이쪽으로 다가왔다. 지혈을 멈췄지만 고통은 가시지 않았는지 인상은 잔뜩 구겨진 상태였다.

“사람은 불타 죽을 때 가장 고통스럽다지?”

잠깐!

“얼굴은 알아볼 수 있도록 해 두고 싶었는데, 불에 타서 시체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된 것도 괜찮겠네.”

“으으……!”

“체스터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기대되지 않아?”

이드리안은 아까 암기를 쥐고 있었던 내 왼쪽 팔목을 신경질적으로 짓밟았다.

죽을 만큼 아픈 고통이 밀려왔지만, 제대로 된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뼈가 부러지는 아픔에 비명 대신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 황녀 전하는 죽을 테니 체스터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으려나?”

“…….”

“그렇게 노려봐도 소용없는데. 난 추호도 황녀 전하를 살려 둘 생각이 없어서. 원래 이럴 계획은 아니었는데…… 이게 더 재밌겠어.”

이드리안은 성냥을 꺼냈다.

“똑같이 아파 봐야지. 바로 불에 태워 죽이지 않고 천천히 질식해서 죽게 방 안에만 불 지를게.”

그는 무척이나 즐겁다는 듯 웃으며, 불이 붙은 성냥개비들을 하나씩 바닥에, 커튼에, 침대에, 테이블에, 의자에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기에,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다는 희망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얼굴 형태는 알아볼 수 있게 남는다면, 체스터가 황녀 전하의 시신을 수습하기 쉽겠지. 그러니 노력해 봐.”

그 말을 끝으로 이드리안은 마지막 성냥개비를 문 앞에 떨어뜨리고, 방문을 닫은 채 밖으로 유유히 나갔다.

왼쪽 팔목이 부서진 것 같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개죽음을 당할 테니까. 어떻게든 살아 나가야만 했다.

한 가지 다행인 사실이 있다면 아까 바닥으로 몸이 곤두박질치면서 충격을 받은 부분은 조금씩 움직여진다는 거였다.

그래서 이게 미친 짓이라는 걸 알면서 몸을 바닥에 굴렸다. 몇 번이고 부딪히고, 넘어지는 것을 반복했다.

“으윽!”

아팠다. 온몸에 멍이 들었지만, 그만큼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기 시작했다.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나자 두 다리로 멀쩡하게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이제는 몸이 말을 들었다.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후들거리는 두 다리로 일어나 걸었지만, 너무 많은 연기를 들이켠 건지…… 눈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여기서 눈을 감으면 죽는데. 절대로 눈을 감으면 안 되는데.

문이라도 열어야 하는데. 더는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딜……런.”

흐릿한 정신 속,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사람은 딜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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