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보름달이 선명한 늦은 밤이었다.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소공작님, 그분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래. 체스터 몰래 전해 주는 척은 잘했겠지?”
그렇게 해야, 내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그 편지의 내용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구미가 당기는 내용으로 가득했지만, 황녀가 진심이라 하더라도 의심을 지워 낼 순 없었다.
“네, 본부대로 했습니다.”
“그래. 잘했다.”
황녀가 판에서 놀아나고 있다 해도, 함정이 분명 존재할 걸 알면서도,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내 모습이 우습긴 했다.
사랑? 그런 게 존재할 리가 없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런 감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황녀를 탐내는 이유는 아직도 떨쳐 내지 못한 지독한 열등감 때문일 뿐.
“나가 봐.”
“네.”
허리를 숙여 인사한 수하가 밖으로 나갔다.
그래도 체스터 그 자식에게도 사랑하다 못해,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황녀의 존재는 그 자식에게 절망감을 안겨 줄 수 있는 유일한 패였으니까.
* * *
편지를 받았다. 혼자서만 보고 싶었지만, 체스터와 함께 확인해야만 그가 나를 온전히 신뢰해 줄 터.
조금이라도 그의 의심이 쌓여서는 안 됐다.
체스터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속을 알기가 어려운 사람이었으니까.
바로 편지를 가지고, 집무실에 있을 그에게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체스터.”
노크도, 허락도 없이 그냥 집무실 문을 활짝 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답신이 온 겁니까?”
“네. 생각보다 무척…… 빨리 와서 놀랐어요.”
“어디 있습니까?”
“체스터랑 같이 보려고, 아직 뜯지도 않았어요.”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체스터에게 살랑살랑한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가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팔이 허리를 단단하게 감쌌다. 혹시라도 넘어지거나, 떨어지면 위험하니까.
다른 손으로는 내가 가지고 온 편지를 뜯었다.
“흐음…….”
편지를 읽은 체스터는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내용은 간단했다. 긴 인사치레와 구구절절한 미사여구를 제외하고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알겠다는 의미였다.
과연 이드리안은 내 편지 내용의 의미를 알아들었을까?
그는 멍청하지는 않으니, 잘 알아들었으리라 믿는 수밖에.
* * *
툭, 툭, 툭, 툭-.
불안함에 딜런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왔는데도, 초조함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아 손가락 끝으로 요람을 두드렸다.
“네가 이곳에 있는 한…… 율리아는 날 떠날 수 없을 텐데.”
율리아를 닮은 은빛 머리카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가 애지중지하는. 지금 나와 이곳에서 지낼 수 있는 유일한 연결 고리가 되어 주는 존재.
딜런은 사랑하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그걸 잘 아는 만큼 율리아가 늘 반복해서 말하는 애정으로 키워 주고 싶은데.
“결국 율리아의 말대로 이용하는 걸지도 모르지.”
율리아를 정치적 목적 따위는 없이 대했다고 말하지만, 은연중에는 어느 정도 그런 이유도 자리 잡고 있었겠지.
하지만 율리아는 본능이었다.
회귀 이전의 삶을 머리는 기억하지 못했었지만, 몸은 그걸 기억하고 있어서, 그리고 알 수 없는 그 위태로움에 시선을 빼앗겼다.
지켜 주고 싶다는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사람.
누군가의 보호 없이, 이 험난한 세상에 노출되는 순간, 전부 찢기며 사라질 것만 같이 너무나도 순수한 사람.
그 순백의 빛을 지켜 주고 싶었다.
“결국…… 지키지 못했지만.”
아니, 그녀의 빛을 꺼뜨린 원인이 나겠지.
나로 인해, 율리아는 변했다. 하얀색은 금방 다른 색에 쉽게 물든다는 것을 알려 주듯, 본래의 색을 잃어 가며 결국 오염되었다.
처음부터 정신이 불안정했다는 사실을 핑계로 삼으려 해도, 그 상태를 제공한 게 어쩌면 나일 수도 있었다.
과거의 정신이 불안정했다 하더라도, 그건 과거일 뿐.
회귀 전의 기억을 율리아도 함께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결국에는 내 잘못이 맞았고, 내 죄였다.
“후…….”
율리아는 감정을 숨기는 데 미숙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내가 움직여 주기를 바라고,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내게 복수하고 싶은 거겠지.
율리아도 이제는 모든 진실을 알아 버렸으니까.
차라리 진실을 몰랐더라면. 아니, 율리아에게 과거의 기억이 없었더라면. 내가 회귀하기 전에 저지른 모든 일들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조금은 나았을까.
“딜런, 네 엄마는 이번에도 다른 꿍꿍이가 가득하던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정말이지 율리아는 깜찍했다.
이드리안에게 보내는 편지의 진짜 속뜻을 내가 정말 모르리라 생각한 걸까?
이걸 눈을 감아 줘야 할지. 아니면 만나지 못하도록, 방 안에 가둬 두어야 할지.
무슨 대화를 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근처에 없는 상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건 분명했다.
애초에 율리아의 말을 곧이곧대로 순진하게 믿을 수가 없었다.
“딜런, 나는 네 엄마를 절대 포기 못 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딜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확실히 아기의 머리카락이라 그런 건지 실크처럼 부드러웠다. 손가락 하나 겨우 잡는 작은 손이 귀여웠다.
율리아도 딜런을 보면 이런 신기함을 느낄까.
“네가…… 뛰어다니며 놀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는 모든 게 끝나서, 율리아가 말하는 평온함이 지속되도록 아빠가 노력할게, 딜런.”
곤히 잠든 딜런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 발소리도 최대한 낮추어 방 밖으로 나갔다.
율리아가 잠들어 있는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그녀가 작은 소리에도 깰까 천천히 문을 열었다.
“…….”
율리아는 침대에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의 등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옆에 누웠다.
색색거리는 고른 숨소리와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박동이 안정감 있게 들렸다.
율리아의 둥근 어깨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그녀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어 더욱 몸을 가깝게 밀착시켰다.
눈을 감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온전히 파묻자 은은한 장미 향이 코끝에 닿았다.
“율리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이 작은 머리를 대체 어떻게 굴리고 있는 건지.
어디까지 모르는 척을 해 줘야 하는 건지. 전부 알면서도 언제까지 눈뜬장님 행세를 해 주며 장단에 맞춰야 하는 건지.
쉽지 않았다.
정말이지…… 율리아는 알다가도 모르겠고, 어디로 튈지 예상이 되지 않으니…… 잠깐이라도 눈을 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두 손과 발을 묶어서 나 말고는 사람조차 구경할 수 없도록 가두고 싶은데.
“아직은…… 아직은 그러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허튼짓은 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율리아의 체온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조금씩 녹아들었다.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 * *
약속한 날짜가 다가왔다.
체스터 몰래 혼자 나가는 것처럼 보여야 했기에 발끝까지 덮는 망토를 뒤집어쓰고, 모자를 푹 눌러썼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체스터가 직접 해 주고 있었다.
“율리아,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다면 그만두어도 됩니다.”
“아니에요. 여기까지 왔는데 그만둔다는 마음이 들 거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당신의 고집을 꺾는 건 어렵겠죠.”
“잘 알고 있네요.”
어쩌면 한동안은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편지의 내용을 이드리안이 잘 간파했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은 체스터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점은 각오했으니까.
지금 내가 하려는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다.
위험한 건 싫었지만, 그럼에도 이번에는 감수해야만 했다.
욕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두 사람 모두에게 복수를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꼭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드리안과 체스터의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내 가족을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었고, 차이가 있다면 그건 서로 다른 삶에서 그리했다는 거였다.
체스터는 지난 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 내가 그에게 복수할 이유는 충분했다.
사실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고 싶다는 욕심이 컸지만.
“후회해요, 체스터?”
전전생에, 죽기 전 그에게 저주를 퍼부어 버리듯 남겼던 말.
반드시 후회할 거라고 했던 그 저주가 과연 통했을까. 궁금했다. 체스터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아니에요. 그냥…… 날 만난 걸 후회하나 해서.”
“제가 당신을 만난 걸 후회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태연하게 내뱉는 말에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졌다.
겉만이 번지르르한 속 빈 강정처럼 텅 빈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체스터, 이제 가요.”
“네.”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올라 약속 장소로 향했다.
중간에 헤어진 뒤 체스터는 약속 장소 근처에서 잠복할 예정이었다. 이드리안을 만날 때는 이미 잠복이 끝나 있을 터였다.
과연 이드리안은 어떤 자세를 취할지.
“도착했습니다, 율리아.”
상념에 잠겨 있었더니, 어느 순간 약속 장소와 가까워졌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묻겠습니다. 마차를 돌릴 생각은 없습니까?”
“네. 없어요.”
“……당신은 제가 지킬 테니, 안심하세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 그곳이 지옥이라 할지라도 찾아갈 테니까.”
“말만이라도 든든하네요, 체스터.”
그는 내 입술 위에 짧게 입을 맞추며 작별 인사를 했다.
왠지 그가 이미 내 계획을 모두 알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단지, 기분 탓이길 바라며 마차에서 내리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체스터는 잠복을 하기 위해 먼저 숲 안으로 들어갔다.
호위들의 뒷모습이 사라졌을 때,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망토를 꽉 붙잡으며 숲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쉿.”
“읍……!”
누군가의 손이 뒤에서 튀어나와 내 입을 틀어막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소리를 커다랗고 빠르게 내며 뛰어 댔다. 누구인지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체스터의 손이라고 하기에는 그렇게 거칠지 않았고, 지금 내게 이런 행동을 할 사람은 오직 단 하나.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황녀 전하.”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목소리가 귓가를 강타했다.
그대로 납치를 당하는 것처럼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