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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116화 (116/141)

#116화

애증. 내가 지금 체스터를 보며 느끼는 감정을 정확하게 나타내는 단어였다.

고작 두 글자였지만, 이보다 내 감정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체스터……. 흡!”

체스터는 또다시 입술을 겹쳐 오며 다음에 내뱉을 말들을 제 입으로 전부 삼켰다.

놓아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집요함에 혀를 온전히 내주었다.

그의 팔을 꽉 붙잡지 않는다면, 그의 묵직한 체중에 중심을 잃고 넘어질 것만 같았다.

이어서 체스터는 능숙하게 드레스 안으로 파고들었다. 허벅지에 뜨겁게 느껴지는 그의 손이 닿았다.

“으응…….”

“괜찮습니까?”

체스터의 괜찮냐는 말은 지금 이 이상의 선을 넘어도 감당할 수 있겠냐는 뜻을 담고 있었다.

원하고 있지만, 나름대로 나를 배려해 주겠다는 게 느껴져 귀엽긴 했다.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눈웃음을 치며 그의 목에 팔을 휘감았다. 괜찮다는 승낙의 의미를 담아서.

“안 멈출 겁니다.”

“멈추지 않아도 돼요, 체스터.”

우리의 공통된 목표를 이룬다면 다음부터는…… 지금처럼 행복과 달콤함에 취해 있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 지금 느끼는 애증이라는 감정에서 증오는 잠시 묻어 두고 애정이라는 감정에 흠뻑 취하고 싶었다.

“하윽!”

목덜미에 날카로운 치아가 콱 박히는 감각에 저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점점 더 체스터의 몸과 내 몸 사이의 틈이 좁아지더니, 끝내 온전히 맞닿았다. 그의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불규칙적으로 변하는 호흡이, 피부 위로 닿았다 떨어지며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뜨겁고 굵직한 불기둥이 몸을 반으로 가르는 감각이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그의 어깨를 꽉 붙들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흐아, 아…….”

“율리아, 숨 쉬어요.”

귓가에서 감미롭게 감도는 그의 부드럽고 나직한 음성에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착각이 일렁였다.

체스터의 말대로 천천히 호흡했다. 원래의 규칙으로 되돌아가기 위함인 것처럼.

“아, 체스터…….”

“사랑해요, 율리아.”

“으응, 흡!”

미처 대답할 겨를도 없이, 그의 입술에 또다시 내 입술이 삼켜지며 모든 말들이 잠식되었다.

부드럽게 얽혀 들어오는 미끄러운 혀와 타액이 입 안에서 무엇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도록 엉망으로 뒤엉키며 섞여 들어갔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황홀하기 짝이 없는 달콤함에 취하다 못해 녹아들고 있었다.

* * *

뭐, 결론적으로 따지자면 이드리안에게 보낼 편지 작성은 끝났다.

이 편지의 내용이 나오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생각이 필요했지만, 그만한 가치는 있다고 본다.

{친애하는 이드리안 블레어 소공작님, 오랜만이네요. 저는 황녀 율리아 베아트리스랍니다.}

공식적으로는 율리아 지크베르트 공작 부인이지만, 그런 진실을 부정하는 발언을 살짝 넣고.

{소공작님한테 긴히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이렇게 서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오직 둘이서만 볼 수 있도록 은밀하게 만나자는 말을 심고.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곳에서 단둘이서만, 이야기하는 게 가능할까요? 전에 제게 긴히 했던 제안이, 아직 유효한가 싶어서요.}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적은 뒤 종이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체스터는 편지의 내용을 외울 게 뻔하니 눈치를 조금이라도 주는 내용이 존재한다면 귀신같이 알아차릴 사람이었다.

그 점을 생각해 체스터에게 온전히 진실만을 알려 주지는 않았다.

그러니 체스터는 편지에 숨겨진 의미를 바로 눈치채지는 못할 터.

그러나 이드리안은 편지의 뜻을 알아채야만 했다.

나는 체스터의 편에서 이드리안만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게 아니라, 체스터에게도 지옥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싶었다.

내가 느꼈던 모든 감정들을 두 사람 모두가 겪길 원했다.

“……체스터.”

그를 불렀다. 편지의 작성은 전부 끝났으니까 이제 봉투에 넣어 밀봉된 이걸 이드리안에게 보내면 되었다.

“다 썼으니까. 블레어 소공작한테 제가 몰래 보내는 것처럼 해 줘요.”

“…….”

체스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편지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어젯밤부터 내가 친필로 이드리안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으니, 지금 표정이 뚱한 걸 테지.

그에게도 박했던 편지를. 그것도 친필로 쓰는 거였으니.

하지만 이렇게 쓰지 않는다면 이드리안은 분명 이상함을 눈치챌 것이 뻔하다.

체스터도 그걸 알기에 대놓고 불평하진 않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거겠지.

어제 보상도 톡톡히 주었는데.

“아직도 삐졌어요?”

“안 삐졌습니다.”

“어제 편지보다 더 좋은 거 줬잖아요.”

“…….”

“어제는 마음에 안 들었어요?”

“한참은 부족하고 모자랍니다, 율리아.”

흐응?

대충 체스터가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못 알아듣는 척하며, 외면하려 했다.

그 순간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내 허리를 휘감았고, 뒤이어 그의 얼굴이 코앞까지 가깝게 다가왔다.

아…….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곤란한데.

“저는 질투가 무척 많은 사람입니다.”

“…….”

“율리아도 잘 알고 있잖아요.”

“체스터, 쓸데없는 행동 말고 어서 편지나…….”

“당신이 이런 방식으로의 복수를 바라니 따라 주는 거지만, 저는 이런 방식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

질투심에 사로잡힌 소유욕으로 가득한 눈동자가 선연하게 보였다.

정말…… 그의 일기를 보지 않았더라면 껌뻑 넘어갔을 정도로, 가증스러웠다.

무슨 뻔뻔함으로?

내 가족들을 죽이고, 소중한 사람을 눈앞에서 도륙 내고, 기어이 나를 죽게 만든 사람이 무슨 낯짝으로 이렇게 구는 걸까.

만약 그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가 전쟁터에 있을 때, 기록한 게 정말 맞다면…….

나와 만나기 이전부터. 내가 칩거 생활을 하고 있을 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단 의미였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요, 체스터?”

“…….”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기로 했잖아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결말대로.”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게 아니라면 저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어요. 당신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면…… 굳이 이곳에서 당신과 지낼 이유는 없죠.”

“율리아.”

“딜런은 제가 재혼해서 새아빠를 얻어, 그 사람을 친아빠라고 생각하게끔 키우면 그만…….”

“재혼?”

아, 체스터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하나였다.

내가 재혼하는 것.

딜런을 함께 양육해야 한다는 것은 단지, 핑계일 뿐이었다. 딜런이 아빠가 없는 아이로 자라는 것이 걱정되는 게 아니라…….

아이로 하여금 나를 자신의 옆에 머무르도록…… 아니, 좋게 말해서 머무르는 거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를 이곳에 가두고 싶어 하는 거였다.

또한 내 옆에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가 존재하는 것은 조금도 원하지 않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네, 재혼이요.”

‘재혼’이라는 단어가 그의 신경을 박박 긁어 놓는 건 틀림없었다.

“하……. 율리아, 어떻게…… 재혼이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꺼냅니까.”

입가에 경련이 일어나듯, 그의 턱은 덜덜 떨고 있었다.

눈에는 당장에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이, 투명한 액체가 고여 있었다.

“어려운 건 아니잖아요. 체스터도, 저도 재혼이 딱히 어려운 사람들은 아니니까요.”

“…….”

“맞죠? 알고 있잖아요.”

피식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체스터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그는 내 말의 뜻을 이해했다. 우리의 이혼을 아쉬워하는 쪽은 온전히 체스터뿐이라는 사실을.

“알겠습니다, 율리아.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네. 그럼 부탁할게요, 체스터.”

체스터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약간의 보상을 담아서.

* * *

편지 하나가 도착했다. 편지 봉투에는 발신자가 누구인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편지를 꺼내어 보자,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알 수 없는 환희가 차올랐다.

경박한 웃음이 밖으로 크게 터져 나오지 못하도록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

율리아 지크베르트……. 아니, 율리아 베아트리스.

이전에 했던 말이 아직 유효하냐는 그 발언에서 이게 함정일지, 아니면 진심인지 헷갈렸지만 다른 문장을 보고 깨달았다.

둘이서만 보자는 것. 그 문장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이 편지를 체스터가 순순히 보내 줬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분명 보내더라도 체스터의 살벌한 감시를 벗어나지 못하리란 걸 알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조금이라도 낌새를 알아차릴 수 있는 간접적인 표현은 조금도 사용되지 않았다.

“영리해.”

‘이전에 했던 말.’의 유효함.

그리고 ‘다른 사람 없이 단둘이서만’ 볼 수 있냐는 것.

이 두 가지만으로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이 편지는 체스터와 함께 작성했고, 은연중에 정보를 내게 내어 주고 있다는 것.

내가 약속 장소를 정해서 보내 준다면 아마도 체스터를 포함한 기사들이 그곳에 잠복해서 지켜볼 거란 뜻.

그러니, 그곳에서 자신을 몰래 빼내어 듣는 귀가 없는 곳에서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의미를 담아내고 있었다.

“무척…… 영리하단 말이지.”

단지 마음에 걸리는 건, 체스터가 과연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였다.

그녀는 분명히 영리하고, 체스터를 아주 잘 다루는 모양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체스터가 그녀를 봐주고 있기에 그럴 확률이 높았다.

겉으로는 그녀가 그의 머리 위에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체스터의 손아귀에 갇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일단, 둘이서 만나 얘기해 보는 게 좋겠지.”

고귀하신 황녀 전하께서 나와 어떠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길래, 이리 편지를 쓴 건지 알아보고 싶으니까.

책상에 앉아, 편지지를 꺼냈다. 그리고 적당히 내용을 써서 편지 봉투에 넣었다.

수하를 불러, 잘 밀봉된 편지 봉투를 율리아 베아트리스 황녀에게 은밀하게 전달하도록 명령했다.

“흐음……. 재밌어지겠네.”

체스터는 전부 알고 있을 텐데. 내가 황녀 전하의 부친인 선황제를 죽게 만들었단 사실을.

그걸 황녀 전하께서는 조금도 알지 못하는 걸까. 아니, 모르니까 이런 은밀함을 담은 편지를 내게 보낸 것이겠지.

흥미로운 기분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하늘이 참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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