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115화 (115/141)

#115화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뛰어 댔다.

애써 사실에 가까운 가정을 부정하고 싶어서, 수첩의 냄새를 맡았다. 그러나 오히려 이 행동이 가정을 사실로 만들었다.

율리아의 체취가 미세하게 남아 있었으니까.

“……빌어먹을.”

이딴 건 진작 태워 버렸어야 했는데.

태워 버리는 걸 깜빡하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 깜빡할 걸 깜빡했어야 했는데…….

아마 다 읽었을 게 분명했다. 아니, 다 읽지는 못했더라도 읽으면 안 되는 부분은 다 읽었겠지. 그러니 반응이 그랬던 거고.

초조함이 몰아쳤다.

역시 방법은 하나일까. 마음 한구석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꾹꾹 짓누르고 있던, 음험한 욕망이 머리를 내밀었다.

율리아 한 명을 가두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방에 가두고, 그 누구도 볼 수 없게 꼭꼭 숨겨 둘 수 있었다.

대신 영영 그녀의 마음을 얻어 낼 수는 없겠지.

가두는 순간, 닫히는 방문과 동시에 율리아의 마음의 문도 잠길 테니까. 하지만 그러는 한이 있더라도 율리아를 놓아주고 싶진 않았다.

“아직은…… 모르는 척하려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먼저 드러내기 전까지는 나도 모르는 척해 주는 게 맞겠지.

그럼…… 그 전까지 율리아를 온전히 이곳에 가둬 둘 준비를 끝내야 했다.

그녀가 내게서 도망칠 수 없게. 두 번 다시는 등을 보일 수 없도록.

이미 가두기에 최적화된 방이 있긴 했다.

하지만 율리아가 끝까지 모르는 척을 한다면 나 역시도 방에 가둘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보험은…… 들어 놓는 게 좋겠지.”

만약 방 안에 감금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스스로를 다치게 하지 못하도록 수갑과 족쇄를 마련하되, 그것들이 율리아의 피부에 흉을 남기지 못하도록 따로 제작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수첩을 태우려다가 멈칫했다.

지금 이 수첩을 태워 버린다면 혹여 율리아가 다시 이 수첩을 보러 왔을 때 내가 눈치챘다는 것을 알겠지.

이미 엎질러진 물. 차라리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게 율리아를 안심시킬 수 있다면 그게 더 나았다.

수첩을 다시 이중 장치가 되어 있는 서랍에 놓았다.

“……그냥 영원히 모르는 척해 주면 좋겠는데.”

이건 내 이기적인 욕심이려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게 내 욕망이라는 걸 알지만, 통제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한 번 놓아 주었으니까. 내게서 도망칠 기회는 단 한 번만 줄 생각이었다. 그러니, 다시 내게서 떠날 생각을 한다면 이제는 가둘 생각이었다.

“눈에 안 보이는 것보다는 미워하는 눈으로 나를 보는 게 더 나으니까.”

두 번 다시는 율리아가 없는 삶을 겪고 싶지 않았다.

* * *

“체스터.”

“네.”

“블레어 소공작을 만날 수 있게 해 줘요.”

내 말에 체스터의 미간이 구겨졌다.

질투. 그래, 그것이 체스터가 나와 이드리안의 만남을 탐탁지 않아 하는 이유 중 하나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직접 확인을 해 볼 필요는 있었다.

물론 체스터는 없이. 체스터가 없을 때마다 이드리안은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으니까.

“안 된다는 말은 하지 마요. 당신이 마음에 안 들어도, 저는 그렇게 하고 싶거든요.”

“율리아.”

“왜요? 혹시 저를 못 믿어요?”

“……당신을 못 믿는 게 아닙니다.”

“그럼 무슨 이유 때문인데요?”

“……제가 질투가 나면 돌아 버린다는 거…….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율리아.”

아, 맞다. 체스터가 질투하면 계획을 어그러트릴 확률이 높았다.

나는 이드리안에게 가벼운 죽음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느낀 암담함의 반이라도 느끼길 바랐다.

“체스터, 이번만 모르는 척해 줘요.”

“다른 건 됩니다. 당신이 직접 찔러 죽이고 싶다거나 이런 건 됩니다!”

내 계획이 무엇인지 듣지도 않았으면서,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부 꿰뚫고 있다는 게 소름 끼쳤다.

도대체 그는 모르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아직 체스터는 제 계획이 무엇인지 듣지도 않았잖아요!”

“말하지 않아도, 뻔히 보입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할지.”

“…….”

“이드리안과 직접 대화할 생각이겠죠. 그건 위험합니다, 율리아.”

다 알고 있었다. 내 생각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어설픈 거짓말로는 절대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에, 그를 설득하는 게 옳은 방향이었다.

“다 알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죠. 만날 수 있게 해 줘요. 눈을 한 번만 감아 주면 돼요.”

“…….”

“걱정된다면 따라와도 좋아요. 그냥…… 대화할 때 훼방만 놓지 않으면 돼요!”

“율리아, 제가 뻔히 걱정할 걸 알면 시도조차 하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체스터의 허리를 팔로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말했다.

“믿어 주면 안 돼요?”

“율리아, 이러면 제가 허락해 줄 거라고 생각합니까?”

“저 못 믿어요?”

“이건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블레어 소공작이 눈치채지 못하는 거리에서 지켜봐 줘요, 체스터.”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만약 체스터가 허락해 주지 않는다면 몰래 빠져나가는 방법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내게도 위험 부담이 컸다. 가장 안전한 건 그의 보호 아래에 있는 거였다.

또다시 생명의 위협을 크게 느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체스터의 순순한 협조는 내 안전을 위해 무척 필요했다.

“체스터. 한 번만 이해해 주면 안 돼요?”

“……당장은 안 됩니다.”

“그럼!”

“후……. 이번만입니다. 날짜와 장소는 제가 지정하는 걸로 합시다.”

“당연하죠!”

결국에 체스터는 내 말을 들어줄 줄 알았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체스터는 유독 내 애교에 약했으니까.

지금은 내 의견을 따라 준다 해도, 언제 마음이 뒤틀릴지 모르니 이렇게 확실하게 보상을 주는 게 맞았다.

체스터의 허리를 휘감은 팔을 풀었다. 그리고 자유로워진 두 팔을 뻗어 그의 뺨을 손으로 감싼 채, 잡아당겼다.

쪽-.

쪼옥, 쪽-.

짧게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대었다 떨어뜨리는 것을 반복했다. 체스터는 얌전히 내 뽀뽀를 받았다.

“제 말을 따라 준다니 주는 보상!”

“……율리아.”

“이번 일이 끝나면 지금보다 더 진한 보상을 줄게요!”

“하아…….”

체스터는 나직한 한숨을 뱉어 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한숨을 쉬어요?”

“저한테만 이러는 거죠, 율리아?”

“당연히 체스터한테만 이러죠!”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는 갑자기 나를 번쩍 안아 들더니, 책상 위에 앉혔다.

“일주일이면 어느 정도 준비가 될 겁니다.”

“…….”

“장소는 전혀 마음에 안 들지만…… 블레어 공작저 인근이 좋겠죠. 위험하긴 해도, 제가 근처에 기사들과 함께 기척을 죽이고 있으면 큰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알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보다도 체스터가 지켜보고 있는데, 어떻게 위험이 도사린다고 생각할까.

괜한 걱정이었다.

“믿어요. 적어도 체스터는 저를 위험하게 두지는 않을 거라는 걸.”

“……다행이네요. 그 정도의 믿음을 주는 사람이긴 해서.”

내가 했던 말을 비꼬는 걸까. 뭐, 굳이 말을 꺼내서 싸우고 싶지는 않아 그냥 흘려들었다.

“블레어 공작저 인근에 숲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잠복해 있을 테니, 불안해할 필요 없이 시간에 맞춰서 잘 들어오면 됩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접선 방법이네요.”

일주일이라는 시간.

그건 체스터가 안전장치를 마련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이드리안과 만나게 되는 계기를 만드는 데도 필요했다.

“편지를 쓸 생각이에요, 체스터.”

“편……지.”

“네. 편지요.”

“제게 써 주는 편지도 박한 율리아가…… 다른 남자한테 편지라…….”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체스터한테 편지를 조금 박하게 했던 과거가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예전 일이어서, 깜빡했다.

그런 전적이 있으니, 체스터는 별로 이 방법은 탐탁지 않아 할 게 뻔하지만……. 그렇다고 이 외의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체스터의 표정은 착잡함을 담고 있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것뿐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쉽게 긍정하지 못하는 건 느껴지는 질투 때문이겠지.

“체스터, 질투해요?”

“……합니다.”

“이건 그냥 복수의 단계일 뿐이잖아요.”

“그래도…… 질투가 납니다.”

질투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이렇게 드러내는 그의 모습이 너무 귀엽게 보였다.

이어서 체스터는 나를 끌어안더니, 얼굴을 내 어깨에 파묻었다. 내가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구속하는 듯했지만, 숨통은 트여 주었다.

덩치에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과 행동이 아닌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일단 체스터를 달래 주기 위해, 그의 등을 토닥였다.

“체스터, 이번만 눈감아 줘요.”

“알지만…….”

“알고 있잖아요. 대신 체스터한테는 편지 말고 상을 줄게요.”

내 허리를 붙들고 있던 그의 팔에서 느껴지던 힘이 느슨해졌다.

목덜미에 그의 뜨거운 숨결이 닿으면서, 나직한 음성이 귓가에 간지럽게 울렸다.

“무슨 상입니까?”

“글쎄요……?”

체스터는 흥미를 보였다. 그게 귀엽긴 해서 웃음이 서렸다.

나도 참 중증이었다. 체스터가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전부 알면서 이러는 걸 보면…… 불치병임이 분명했다.

무슨 행동을 해도, 어떤 말을 해도 결코 귀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행위를 저질렀던 사람인데.

아직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깨끗이 도려내지지 않은 걸 보니…… 치료제 따위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무엇일 것 같아요?”

“당신이 주는 상이라면 뭐든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가 뜻하는 게 무엇인지 예상을 하는 듯, 체스터는 나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온전히 풀었다.

몸이 자유로워졌기에,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그는 얌전히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살짝만 당겨도 그는 손쉽게 가까이 다가왔다. 숨결이 닿을 정도의 거리였기에, 숨결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

그대로 그의 입술 위에 내 입술을 포개었다. 이어 벌어진 입술 틈 사이로 숨을 불어 넣었다가, 다시 빼앗기를 반복했다.

그의 혀가 참을성 없이 입술을 비집고 들어와서는 여린 점막들을 훑었다. 이내 혀끼리 얽혀 들었다.

호흡이 입을 오가며 뒤엉켰다. 아무런 생각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하아…….”

잠시 입술이 떨어지며, 신선한 공기가 입 안을 가득히 채웠다.

알고 있었다. 체스터와 나의 끝은 어쩌면 나락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락까지 떨어지지 않는 이상, 내게 지옥을 알려 준 그와 지극히 평범한 이들의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은 처음부터 없애는 게 나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