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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114화 (114/141)

#114화

지금 당장은 체스터가 필요했다. 체스터나 오빠 없이,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까.

내게 힘이 생기기 전까지는…… 체스터의 보호가 필요했다.

“율리아, 이곳에서만 생활하는 건 당연히 불편하겠지만…… 바깥에 돌아다니는 건 당분간 자제하면 좋겠습니다.”

“왜요?”

“아직…… 딜런의 존재는 이드리안도 모릅니다.”

그럼 존재가 숨겨지는 이상, 적어도 딜런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의미였다.

그렇지만 체스터도 블레어 공작가나, 황성에 심복을 심어 두었듯, 블레어 가문에서도 분명 이곳에 첩자를 심어 두었을 터.

그가 이렇게 말을 한다는 것은 딜런을 지키기 위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체스터, 이곳에서는 딜런의 존재가 외부로 새어 나갈 걱정은 없어요?”

“네. 이곳은 안전하니, 안심해도 됩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나요?”

“끄나풀들은 전부 정리했으니까요. 그러니 저택 안에서는 편히 있어도 됩니다.”

정리. 그 말의 의미는 전부 죽였다는 거겠지.

“모든 일이 끝나면. 그때는 딜런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영지로 내려가서 사는 게 어떻습니까?”

“괜찮아요. 이해하니까.”

첫 번째 복수 대상은 이번 생의 아빠를 죽게 만든 블레어 소공작이었고, 두 번째는 회귀한 체스터였다.

첫 번째 복수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아직 체스터가 필요했다.

“율리아, 딜런은 제가 안겠습니다.”

“네.”

체스터는 딜런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집무실에서 나갔다.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외출하고 싶어도 당분간은 참아 주세요, 율리아.”

“네.”

블레어 소공작. 어떻게 해야 가장 고통스러워할까.

정말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내가 체스터를 버리고 자신에게 오기를 원한다는 식으로 말을 하면서, 뒤로는 우리 아빠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당신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네?”

“어떤 방식이 완벽한 응징이라고 생각합니까.”

“…….”

“원하는 결과를 말한다면 최대한 그리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내가 지시만 하면 정말 어떻게든 내가 내뱉은 말대로 할 사람처럼 굴었다.

“체스터가 생각하기에, 그 사람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느껴질 게 뭐라고 생각해요?”

“……아마 오랜 염원을 끝내 이루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게 뭔지 알고 있어요?”

“그것까지는…… 잘은 모릅니다.”

흠……. 아주 가까운 사이인 체스터조차 모른다는 건, 본인 스스로밖에 모른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쉽지 않았다. 죽음만이 그의 공포이자 고통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약했다.

아빠는…… 고통받으며 죽어 갔으니까.

체스터도 모른다면 직접 알아보면 되었다.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적어도…… 그가 내게 원하는 게 있다는 건 분명했으니까.

목적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목표를 이루는 과정 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체스터도 알고 있을 테고.

“이건 알겠죠. 블레어 소공작은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원한다는 거는요.”

“안 됩니다.”

“아직 제대로 말도 꺼내지 않았잖아요! 일단 듣고…….”

“무슨 말이 나올지 뻔히 보이니 하는 소리입니다. 절대 안 됩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체스터는 듣지 않아도 전부 아는 모양이었다.

난 그의 생각을 조금도 읽을 수가 없는데.

“왜요. 저는…….”

“당신이 그 자식과 얽히는 꼴은 못 봅니다.”

“…….”

“차라리 그 자식이 당신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블레어 공작 부부를 노리는 것도 괜찮겠죠.”

그는 자연스럽게 딜런의 침실로 들어갔다.

“체스터.”

“네.”

“블레어 소공작은 우리 아빠만 건든 게 아니잖아요. 나도…… 죽일 생각으로 자객도 보냈잖아요.”

어떻게 고작 그런 걸로 만족할 수 있어?

아마, 나를 죽이는 것에 실패했으니 당분간 나는 건드리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을 노릴 건 뻔했다.

그렇다면 오빠를 노리는 게 아닌, 황후 자리를 공석으로 만들려고 하겠지.

정확한 목표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황권을 흔드는 게 그의 주된 목적인 것 같았다.

“율리아……. 그렇다면 저희 측에서도 자객을 매수하면 됩니다. 당했던 것 그대로 돌려주면 그만입니다.”

“말로 받으면 되로 갚아 주는 게 미덕이죠.”

“네?”

“죽거나, 아니면 영영 바깥으로 나올 수 없게 감옥에 가두거나 하는 게 아닌 이상…… 분명 이런 일이 반복될 거예요.”

만약 이대로 그를 내버려 둔다면…… 딜런의 존재를 영원히 숨기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드러내는 순간 딜런의 목숨이 위험해질 것이 뻔했으니까.

나는 그런 상황이 오는 것을 조금도 원하지 않았다.

“저는 그걸 원하지 않아요, 체스터.”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할 생각입니다.”

체스터는 딜런을 요람 위에 눕혔다.

“딜런은 하녀에게 맡기고, 자세한 얘기는 다른 방으로 옮겨서 하는 게 좋겠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가 들어오고 난 후, 체스터와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향한 곳은 집무실이 아닌, 온실이었다.

능숙하게 체스터는 나를 티 테이블에 앉히고, 손수 차를 우렸다.

우린 차를 내 앞에 놓아 주며,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처럼 보이는 디저트들을 티 테이블 위로 옮겨 두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것처럼.

모든 게 그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기분이었다. 분명 아직은 같은 편인데, 왜 이렇게 불안함이 마음 한편에서 일렁이는 걸까.

“체스터.”

“제 마음 같아서는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좋겠습니다.”

“…….”

“전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괜히 위험하게 움직이지 말고, 이곳에서 기다려 주세요.”

“제가…… 당신을 어떻게 믿죠?”

그를 완벽히 믿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마음 한쪽에서는 의심이라는 싹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원인은 체스터에게 있었다.

“제가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으면…… 당신 혼자 무슨 짓을 꾸밀 줄 알고……!”

무엇보다 그는 지금 과거의 비극을 전부 기억하고 있지만, 모르는 척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상황 속에서 체스터를 신뢰할 수 있을까. 두 눈으로 보는 게 아닌 이상, 귀로 듣는 그의 말을 믿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니 가만히 이곳에서 눈과 귀가 막힌 채 있을 생각은 없었다.

“율리아, 진정해요.”

“맞잖아요!”

당신은 내 모든 것을 빼앗은 전적도 있으면서 태연하게 행동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당신을 믿을 수 있겠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런데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내뱉는 순간 주워 담을 수 없을 테고, 아직 내가 이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숨기는 게 맞으니까.

“신뢰는…… 유리잔과 같아서 이어 붙인다 해도…… 깨진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어요.”

“…….”

“깨진 유리를 붙들고 있는 건…… 당신도, 저도 아니라…… 딜런이에요.”

우리의 사이는 위태로웠다. 그의 생각이 어떻든, 이미 나는 그를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 수첩을…… 그의 일기를 읽기 전에도 그를 완벽하게 믿지는 않았다.

단지 나는 딜런이 있으니, 체스터에게 기회를 줄 뿐……. 그를 믿거나, 예전처럼 온전히 그에게 의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체스터도…… 알고 있잖아요. 제가 당신한테 기회를 준 이유는…… 딜런에게 있다는 거.”

“율리아.”

그런 표정 짓지 마. 사람을 뒤흔드는 그런 처량하고 애잔한 얼굴을 하지 말란 말이야.

이번 생에서 아빠를 죽인 건, 체스터가 아닌 이드리안.

그러나 전전생에 아빠와 오빠를 죽인 장본인이 체스터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영원히 잊지 못할 온몸이 얼어붙는 고통의 기억.

윤회를 거듭한다 해도, 내 영혼의 일부에 깊게 새겨져 기억이 없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을 아픔이었다.

그랬기에 체스터의 얼굴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처럼 전부 뱉어 내세요. 속에 쌓아 두지 말고……. 눈치도 보지 말고 지금처럼 말해 줘요, 율리아.”

체스터는 내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나를 올려다보다 다정한 어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것을 원하는지.”

“…….”

“저는 마음속까지 알아내지는 못하는 사람이라, 지금처럼 직접적으로 말해 줘야 합니다.”

“저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은데.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서……. 제가 지금껏 부족했나 봅니다, 율리아.”

그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져 있었고, 그의 눈에는 애정이 담겨 있었으며, 그의 눈매는 곱게 휘어져 있었다.

상냥하고 다정한 눈빛과 말투, 그리고 행동.

“당신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곁에 있어 주지 못하고 외롭게 두었던 것도. 애초에 그런 상황을 제공한 제 잘못이겠죠.”

“…….”

“당신의 잘못은 하나도 없어요. 잘못이 있다면 전부 제 잘못이겠죠.”

체스터는 손을 뻗어 내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게 했다.

이 손으로 그는 내 소중한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게 베어 냈는데.

눈을 꾹 감았다. 그를 사랑하는 감정과 그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감정이 뒤섞이며 내면에서 휘몰아쳤다.

불신하지만 신뢰하고 싶고, 사랑하지만 미운 사람.

“체스터.”

“제가 믿음직스럽지 않다면 늘 옆에서 지켜봐도 됩니다.”

“…….”

“당신이 원하는 게 있다면 언제든 옆에서 알려 주면 이행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율리아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 침실에서 나와 집무실로 향했다.

외출한 사이, 집무실에 있던 율리아가 무척 수상했으니까. 숨긴다고 숨긴 것 같은데 미세한 떨림이나 어색함이 눈에 뻔히 보였다.

그때는 모르는 척해 줬지만, 집무실에는 별로 좋은 추억이 없었기에 의심의 여지는 충분했다.

무엇보다 집무실에서 나온 이후, 율리아의 반응이 꽤 격했으니까.

“……분명 무언가를 본 건데.”

집무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랍을 열었다.

이중 장치를 해 두었던 서랍. 거기에 태웠어야 했지만, 깜빡 잊어버려 아직 태우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먼지가…… 안 쌓여 있고, 손자국.”

누군가 건드렸던 흔적. 먼지가 조금도 쌓여 있지 않다는 건 오늘 누군가 만졌다는 증거였다.

“율리아.”

절대로 이 안의 내용을 알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 알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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