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전전생이자, 전생에 읽었던 소설의 남주가 내 불행의 원인이라는 게 충격이었다.
지금은 소설과도, 내 전전생과도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이라는 것도…… 이제는 인식하고 있었다.
“율리아, 딜런은 제가 안겠습니다.”
체스터는 내가 불안정해 보였던 건지. 그래서 딜런이 걱정된 건지. 자연스럽게 내가 안고 있었던 딜런을 데려가 안았다.
허전해진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꽉 말아 쥐었다.
“……체스터가 하는 말이니, 틀리지 않겠죠.”
“당신이 충격을 받을 걸 알아서…… 알려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됐어요. 저는 진실을 알 권리가 있고, 이제는…… 제가 모르는 게 무엇이었는지 알았으니까요.”
“……괜찮습니까, 율리아?”
“당신은 어떻게 할 거예요?”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이드리안은 체스터의 친구였으니까.
그러니 체스터는 내가 그를 처참하게 짓밟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전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체스터와 이드리안은 친구였으니까.
“무슨 뜻입니까?”
“……저는 용서 못 해요. 아니,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우리 아빠가…… 죽은 이유가 따로 있었다는 게!”
“걱정 마요, 율리아. 저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똑같이 이드리안을 짓밟을 생각이니까요.”
“…….”
“그러니 불안해하지도, 울지도 말아요.”
드레스를 꽉 말아 쥐고 있었던 손은 부들부들 떨렸고, 그 손등 위로 뺨을 타고 흐른 뜨거운 액체가 툭 떨어졌다.
“당신이 아프고 괴로웠던 만큼을…… 똑같이 느끼게 만들 테니까요, 율리아.”
“…….”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당신을 지키겠다고.”
“그는 당신의 친구잖아요…….”
“제가 목숨보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위해를 가했는데, 어떻게 친구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불안했던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동시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은 제게도 소중한 사람입니다.”
“체스터…….”
코끝이 닿을 정도로 무척 가까워졌다. 이대로 조금만 더 움직이면 입술이 닿…….
“으애애앵!”
……으려는 순간, 딜런의 울음소리가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딜런? 왜, 왜 울죠?”
“흠……. 기저귀는 멀쩡한 걸 보니, 아마 배가 고픈가 봅니다.”
“아……!”
다급하게 아까 유모에게 받았던 젖병을 꺼냈다.
“제가 하겠습니다, 율리아.”
말을 마친 체스터는 자연스럽게 젖병을 내게서 가져가 딜런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무척 익숙해 보였다.
“제가 할 수 있어요!”
“율리아, 생각보다 딜런은 무겁습니다. 당신 몸도 온전치 않은데, 당연히 이런 건 제가 하는 게 좋겠습니다.”
“……네.”
“마차에 오래 타야 하는데, 지금 푹 쉬어요.”
“그럼 조금만…… 잘게요.”
“잘 자요, 율리아.”
들끓는 속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체스터는 잠시 황성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같이 갈까 싶었지만, 혹시 내가 수도로 돌아온 사실이 드러나면 위험해질 수도 있었기에, 나는 저택에 남아 있기로 했다.
멍하니 창문 밖을 내려다보았다.
체스터가 공작저 바깥으로 나간 후에, 느낀 사실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아빠가 살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경위도, 알게 된 이후도, 내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내게는 스스로 무언가를 움직일 힘도, 알아낼 수도, 복수할 수도 없었다.
공작 부인이기 이전에 황녀라는 신분도 있었지만, 정말 허울뿐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는 권력의 원천은, 아빠였고, 오빠였고, 체스터였다.
보호라는 이름 아래, 그리고 모두를 살리겠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꼭꼭 숨거나 가만히 있던 나는 고립되어 가고 있던 거였다.
모든 게 완벽히 어그러져서 내가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
“하, 하하…….”
헛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왔다.
나의 어리석음과 멍청함을 너무 늦은 지금에 와서야 깨달았다.
무엇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게 아니라,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었던 거였다.
그러니 지금도 누군가의 보호가 없다면 위험에 노출될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시선을 창밖에서 떼어 내어, 몸을 돌렸다. 휘청이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바로 뒤에 있던 요람으로 향했다.
방긋방긋 웃음을 짓는 딜런은 무척 사랑스러웠다. 그 모습에 안의 모든 게 무너져 내렸다.
“너무, 너무 늦었어…….”
아주 많이…… 늦은 상태라는 걸 알았다. 딜런을 나는 지킬 수 없었다.
그리고 나조차도 내가 지켜 낼 수가 없었다.
옆에 누군가가 있는 게 아닌 이상, 분명 위험에 노출되고, 그렇게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게 된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지금의 나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딜런을 지켜 낼 수 없었다.
이대로 체스터에게만, 오빠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었다. 많이 늦게 깨달았지만…… 내게는 힘이 필요했다.
“딜런…….”
다리에 힘을 주며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요람에 누워 있는 딜런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그 상태로, 문밖을 나가 천천히 저택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익숙하면서 무언가 바뀌었다는 느낌이 선연했다. 기분 탓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쉽게 넘길 수는 없었다.
발걸음은 본능적으로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왜 이쪽으로 가는 건지.
그의 집무실은 그렇게 좋은 기억이 있는 곳이 아닌데, 왜 내 걸음은 늘 이쪽으로 향하는 걸까.
좋은 기억은커녕, 좋지 못한 기억투성이인 곳이 체스터의 집무실인데.
“이어 붙어 있는 초상화…….”
그건 이전과 변함이 없었다.
내가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간 초상화는 찢긴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으나, 얼굴은 알아볼 수 있게끔 잘 붙어 있었다.
왜 그 초상화에서 광기가 느껴지는 건지.
천천히 그의 책상 쪽으로 향했다.
“……어?”
못 보던 물건 하나가 그의 책상 위에 생겼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손바닥보다 약간 큰 액자에 담긴 초상화의 주인공은 나였다.
왜 이런 게 그의 책상 위에 있는 걸까. 의아함이 들었다.
나를 그리워했던 걸까. 아니, 애초에 이런 건 어디에서 구했지? 왜 이런 걸 제작하라고 시킨 걸까.
체스터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잠깐.”
조심스럽게 서랍을 열었다. 혹시라도 전에 봤던 편지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까 싶어서였다.
내가 봤던 그 편지들의 행방이 궁금해서, 딜런을 한쪽 팔로 안은 채 그의 서랍을 한 손으로 뒤적였다.
하지만 편지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분명 한 번에 쉽게 찾을 수 없는 장치 같은 것을 해 두었을 게 분명했다.
예상과 다름없이 서랍 아래쪽에 칸이 하나 더 있었다. 그 안에서 찾은 건.
“……수첩?”
마치 들키고 싶지 않다는 듯, 이중 장치로 되어 숨겨져 있던 건 시간이 오래 지나 퇴색된 수첩이었다.
체스터의 비밀이, 속내가 고스란히 있을 게 뻔했다. 침이 꼴깍 넘어갈 만큼 긴장되었지만 결국에는 호기심에 조심스럽게 수첩을 펼쳤다.
심장이 두근두근 소리를 내며 거세게 뛰었다.
그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니 괜히 손에 땀이 차는 느낌이었다.
천천히 한 손으로 수첩을 넘겼다.
{전쟁터에서 반드시 살아남아야만 한다.}
{꿈에서 그 소녀가 계속해서 나타난다. 그 소녀를 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이런 내용의 연속이었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휘갈긴 그때의 심정.
이제 더는 그만 훔쳐보고 수첩을 덮으려 했다.
다음 장을 보지 않았더라면…… 좋았었을 텐데.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주어졌다.}
시작하는 첫 번째 문장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내가 알지 못한 채, 그를 온전히 믿을 수 있었더라면 좋았었을 텐데.
고작 다음 장을 넘긴 것으로, 온몸의 피가 차게 식으며 세포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
내가 잘못 본 것이길 바랐지만, 몇 번을 다시 눈으로 훑어봐도 변함이 없었다.
{회귀했다. 그녀가 죽기 전으로. 주어진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다.}
바깥의 소리에 다급하게 창문 밖을 확인했다. 체스터가 귀환했다.
이후의 내용을 더 읽어 보고 싶었지만,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아내고 싶었지만, 여기서 멈췄다.
수첩을 덮고, 원래 있던 곳에 놓은 다음에 굳은 얼굴 근육을 풀었다.
“……내가 죽고 회귀한 거야?”
내 가족들을 죽이고, 내 소중한 사람을 내 눈앞에서 죽이고, 내게 죽으라고 했던 전전생의 체스터가…… 회귀했다고.
전전생의 당신과 현재의 당신을 동일하게 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나는 그럼 뭐가 되는 거지?
심장이 쿵쿵거리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같은 사람이었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내 앞에서…… 태연하게 행동했던 거야?
그리고 내가 그에게 죽는 꿈을 계속 꾸었다고 했을 때,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다정하게 위로했던 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언제부터…… 그는 전부 알면서 모르는 척을 해 왔던 거지?
숨이 막히는 기분. 목을 조이는 초조함.
“……딜런.”
이후 떠오르는 건, 지금 품에 소중하게 안은 자그마한 생명체였다.
체스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그의 생각을 읽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이런 식으로 깨달았다.
그때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율리아.”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며 상냥한 얼굴을 한 채 들어오는 체스터의 모습은 결코 전전생의 그와 조금도 겹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전전생의 그와 동일한 사람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전부 가지고, 나와는 다른 식으로 돌아온…….
“오래 기다렸습니까?”
“……아뇨.”
섬뜩했다.
전전생에는 내게 그토록 잔인하게 굴었으면서, 왜 이번에는 부인을 사랑하고 무척이나 다정한 남편 행세를 하는 걸까.
대체 그는 어떤 생각을 하는 건지.
목을 조이는 착각에, 숨이 막혀 오는 착시에 휘감겼다.
“체스터, 액자는 바꾸는 게 좋겠어요.”
“네?”
“일단 보기도 조금 흉하고, 이제는 딜런도 있잖아요. 딜런도 함께 있는 초상화로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내 말에 체스터는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그렇게 하길 원한다면 조만간 화가를 부르겠습니다.”
그에 대한 공포가 조금씩 신경을 타고 올라왔지만, 힘겹게 숨겨 냈다. 내가 알게 된 사실을 드러내어서는 안 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상태를 쭉 유지해야 했다. 체스터를 방심시켜야만 했다. 내게는 필요했으니까.
나부터 딜런까지 지킬 수 있는 나만의 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