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우에엑!”
두려움에 생리적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며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는 이러한 내 행동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그걸 알기에 태연하게 행동하고 싶어도, 영혼에 새겨진 그 기억을 쉽게 잊을 수가 없었다.
사랑하던 남자가 내 소중한 사람을 전부 죽인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는데. 어떻게 그 장면을 쉬이 잊을 수 있을까.
아니, 사실 지금껏 외면해 왔던 거였다.
이번 생과 전전생은 다를 거라고, 이번 생은 체스터도 날 사랑하니까. 내 모든 것을 앗아 간 그와는 다를 거라고 나를 세뇌했었다.
지금도 전전생의 체스터와 지금의 체스터는 다르게 치부해야 했다.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받아들이지를 못했다.
“율리아……. 괜찮습니까?”
이런 내 행동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체스터는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데.
생각보다 트라우마가 내게 강하게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씻고 와요, 체스터.”
“알겠습니다.”
체스터는 지금 내가 한 말을 듣는 게 나를 위하는 거라고 판단했는지. 순순히 발걸음을 옮겼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방 안에 나 혼자 남겨졌다.
그때도 이랬었다. 단지 죽어 있는 사람들이 바뀌었을 뿐.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잘못된 거…… 하나도 없잖아……. 내 사람이 죽지 않았잖아.”
심장이 터질 것처럼 아팠다. 전전생의 기억이 아직도 영향을 미치며, 내 심장을 후벼 팠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힘겹게 일어섰다.
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방 안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태어난 이래로, 암살 위협이 없었던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그동안은 보안이 상당했기 때문에, 암살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느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배후가 누구지? 어떻게 내가 이곳에 있는 걸 알았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체스터가 데려갔으니, 배후가 누군지 알아낼 건 분명했다.
“나는 죽지 않아……. 절대로…….”
내게 거는 주문이었다. 살고 싶은 의지가 가득 담긴.
폐가 물로 가득 차는 고통과 온몸이 얼어붙는 추위가 몸에 퍼졌다. 두 손으로 팔을 감쌌다.
절대로 추운 날씨가 아닌데, 입김이 나오는 착각마저 일렁였다.
몸이 크게 휘청거렸지만 개의치 않고, 이 방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리가 되어 있는 방 침대에 놓인 이불 속으로 들어가 오들오들 떨리는 몸을 덥혔다.
“하아, 하…….”
이대로 여기 있는 게 과연 안전할까?
더는 이곳도 안전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그렇다면 난 어디로 가야 하지?
이곳조차 더는 안전하지 않은데.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 더 존재하기는 할까?
배후가 누군지라도 안다면…… 아니, 안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단순하게 거주하는 곳의 경비를 강화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분명 이곳도 단단히 경비를 했을 터였다.
“율리아.”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몸이 흠칫 떨렸다.
이불 틈 사이로 나를 부른 이가 누구인지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다행히 체스터가 맞았다.
더는 전전생을 연상시키는 피가 잔뜩 묻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아서일까. 이젠 털이 쭈뼛 서지는 않았다.
시원한 비누 향이 코끝에 훅 닿았다.
체스터가 곁에 앉은 건지. 침대가 잠깐 흔들렸고, 익숙한 그의 체취가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체스터는 없어요?”
왜 나를 걱정해? 직접 싸운 건 체스터였는데. 내가 다칠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정말 쓸데없이 다정한 사람.
“다친 곳……. 직접 싸운 건 체스터잖아요.”
“다친 곳이 있다면 예전처럼 직접 치료해 줄 겁니까?”
“진짜 다쳤어요?”
이불 속에 숨어 있었지만, 그가 다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밖으로 빠져나와 체스터를 이리저리 살폈다.
일단 잘생긴 얼굴부터 찬찬히 확인했다.
혹여나 이 완벽한 조각상 같은 얼굴에 작은 생채기라도 났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꼼꼼하게 살폈다.
다행히 국보급 얼굴에는 조금의 상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곳에 상흔이 있을까. 시선을 그의 얼굴에서 떼어 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율리아, 이제는 괜찮습니까?”
체스터는 내 허리를 휘감으며,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가까이 잡아당겼다.
숨결이 닿는 무척이나 가까운 거리였다.
“체스터?”
“많이 놀랐을 텐데……. 세심하게 챙겨 주지 못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
“이번에는 제가 반드시 당신을 지킬 겁니다.”
굳건한 의지가 가득히 담겨 있는 그의 눈빛에, 근거 없는 신뢰가 형성되었다.
그의 말에서 알 수 없는 꺼림칙함이 느껴졌지만, 애써 꾸역꾸역 짓누르며 모르는 척했다.
나를 와락 끌어안는 그의 행동이 무언가 의심스러웠다. 분명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체스터, 저한테 숨기는 거 있어요?”
“없습니다.”
“……정말?”
“네. 정말. 오늘 놀랐을 텐데, 푹 쉬어요.”
“비밀이 있다면 저한테 들키지 마요.”
분명 당신은 내게 숨기는 게 있다.
하지만 그걸 나한테 결코 들키고 싶은 눈치가 아니니, 죽을 때까지 그 비밀을 안고 간다면 그 이전까지는 눈감아 줄 수 있었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내게 들키지 마. 당신이 숨기는 그게 뭐든지, 체스터.
“재워 줄게요, 율리아.”
* * *
지금은 잠들었지만, 나를 보며 기겁하던 율리아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착각이 일렁였다.
생각보다 충격이 컸던 걸까.
나를 미워한다고 말하던 때보다 공포로 물들었던 눈빛이 더 보기 힘들었다.
그러니 필사적으로 숨겨야 했다. 아니, 내가 절대로 입을 열지 않는다면 영영 죽는 그 순간까지 율리아는 진실을 알 수 없을 터였다.
내가 그녀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회귀한 사실을, 그리고 그 기억을 율리아는 모두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서 당신은 저를 본 처음에…… 그렇게 사색이 된 얼굴을 한 거겠죠.”
율리아에게 저지른 죄가 많고, 그 죄를 모두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실을 말하고 사과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진실을 말하는 순간부터 그녀가 받아 주지 않을 사과니까.
이번 일은 아마 이드리안이 벌인 짓일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자객이 음독하고 죽은 걸 본 순간 확신했다.
실패를 염두에 두고 일을 실행하는 치밀한 녀석은 이드리안뿐이고, 이곳에 자객을 보낼 만한 사람도 이드리안뿐이었다.
며칠 동안 얼굴을 가리지 않고 율리아와 거리를 활보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빠르게 움직일 줄은 몰랐다.
괜히 밖에 나갔나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율리아는 내일 나와 함께 수도에 올라갈 것이 눈에 보였다.
그녀는 겁이 많으니까. 이곳이 더는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판단은 마쳤을 터였다.
단지 어디에서 지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는 못했을 테니, 수도로 함께 가자고 이야기를 꺼낸다면 마지못해 수락할 터였다.
“떠나지 마요, 율리아.”
수도로 돌아가면 이제 모든 걸 정리해야겠지.
* * *
다음 날 일어났을 때, 침대 옆에는 체스터가 없었다.
오늘 수도로 떠날 거라고 했지만, 어제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도 그냥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나서 그런지 뭔가 서운함이 몰아쳤다.
이제 어른인데, 늘 나는 어린 시절에 멈춰 있었다.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마도 유모가 들어온 거겠지.
“율리아.”
예상과 달리 유모가 아니라 체스터였다.
“안…… 갔어요?”
“제가 왜 당신을 두고 가겠습니까.”
체스터는 딜런을 품에 안은 채, 내게 다가왔다.
“이곳이 이렇게나 위험한데, 제가 어떻게 사랑하는 당신을 혼자 이곳에 두겠습니까. 걱정되게.”
낯 뜨거운 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니 함께 수도로 올라가요, 율리아.”
“이곳보다…… 수도가 더 안전할까요?”
“수도가 안전한 게 아니라, 제 곁이 안전할 겁니다.”
“…….”
“제가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율리아.”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는 실제로 제국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어제도 괴한들을 물리치는 걸 직접 두 눈으로 봤으니, 더더욱 그의 옆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체스터는 혼자서 자객 10명 정도를 제압하고 한 명은 살려 두었을 정도의 실력자였으니까.
“함께 가요, 율리아.”
“체스터, 제가 황성에 돌아갔는데 또 가족이나 주변 사람이 죽는 비극이 일어난다면 어떡하죠?”
“선황 폐하의 죽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거라면 그건 율리아의 잘못이 아니니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러니 자책하지 말아요.”
“……전부 다 저 때문인 것 같아요.”
“율리아의 잘못은 없으니, 그런 말 말아요.”
이마에 뜨겁고 말캉한 감촉이 닿았다 떨어졌다.
“함께 돌아가요, 율리아. 그럼 모든 걸 알려 줄게요.”
고개를 끄덕이고, 내 앞에 내민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체스터가 안고 있는 딜런을 내가 안으려고 손을 뻗었다.
“율리아.”
“우리 아기잖아요. 저도 안아 주고 싶어서 그래요, 체스터.”
“그럼 지금 말고, 마차 안에서 안고 있어요.”
“…….”
“당신이 걱정되어 그럽니다, 율리아.”
“알겠어요. 당신이 저를 걱정해서 그러는 거 아니까. 그럼 옷만 갈아입고 바로 출발해요.”
슈미즈 차림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으니까.
체스터만 있다면 무슨 옷차림이든 상관없지만, 황성으로 돌아가는 거니까. 슈미즈를 입고 다닐 수는 없겠지.
“금방 갈아입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줘요.”
“네, 밑에서 기다리겠습니다.”
* * *
수도로 돌아가는 마차에는 나와 딜런, 그리고 체스터 총 세 명이 있었다.
딜런을 품에 소중히 안고, 입을 열었다.
“어제 수도로 가기 전에 알려 주겠다고 했잖아요. 당신이 수도로 가는 이유를요.”
“…….”
“밤에 일어났던 일 때문에, 망설이는 거라면 괜찮으니까…… 이제 알려 줘요, 체스터.”
체스터는 내가 강하게 말하자, 살짝 눈치를 봤지만 결국에는 어쩔 수 없었는지 망설이던 입을 열었다.
“장인께서는 병사가 아닌…… 타살을 당했습니다…….”
“…….”
“심증은 완벽했지만…… 물증이 없어서 잡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어제…… 우리한테 자객을 보낸 사람과 동일범인가요?”
그는 입술만 달싹거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딜런을 안고 있던 손과 팔에는 힘이 실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체스터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체스터, 말해 줘요.”
“……맞습니다. 우리에게 자객을 보낸 사람도, 당신의 아버지를 죽게 만든 사람도 전부.”
“그 사람이 누구예요?”
“……블레어 공작 가문의 장남, 이드리안 블레어 소공작입니다.”
전생에 읽었던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었다.